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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교육]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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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뉴스팀기자
  • 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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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 (대구 도원중 교감)
“그게 울 일이냐?”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큰소리로 야단치시며 자주 하던 말이다. 요즘은 남학생들도 자주 운다. 축구 때문에 학교에 온다는 중3 남학생이 몇 명 있는데 오늘 스포츠리그 대항전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6월 예선 때 5대 0으로 폴폴 날던 애들이 오늘은 “아~ 오늘 공격이 안돼요.”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눈물이 줄줄, 눈자위가 빨개지도록 고개를 다리에 파묻고 운다. 서로 안고 등을 다독이며 아쉬움을 달래지만 속상한 마음은 여전하다.

작년 전국대회에 출전한 전력이 말해주듯이 올해도 우승 후보(?)여서, 고등학교에 간 성격 좋고 의리 넘치는 선배들이 5명이나 카메라를 들고 응원하러 왔다. 앞 팀 경기할 때만 해도 전년도 화려한 경기를 복기하며 전설이 된 지난해 승리의 달콤함에 잠시 젖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앞 팀 선수들의 낮은 경기력과 외모의 특징을 콕 집어 시시껄렁한 비하발언을 끼리끼리 날리면서 분위기는 그야말로 후끈 달아올랐다. 운동하는 남학생들의 대화는 거친 1차원과 맥락이 안 닿는 4차원을 넘나들었지만 분위기 메이커 전 주장과 현 주장선수는 과장된 리액션으로 웃음을 주어 긴장을 풀었다. 그러나 승부차기에서 가장 믿었던 에이스가 심판의 신호 전에 차서(그 때는 골인이었음) 다시 차는 바람에, 밸런스가 흐트러졌는지 수가 읽혔는지 그만 실축을 하고 말았다.

장마 기간인데도 한여름답지 않게 시원한 바람도 불었고, 운동장 짙푸른 느티나무 잎사귀는 만국기처럼 나부꼈다. 이제 무슨 맛으로 학교에 올지 걱정은 되지만, 오늘 쓰라린 경험은 끈끈한 연대감 속에서 아물고 굳어져, 저 멋진 놈들이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어도 가슴을 꿈틀거리게 만들 옹골찬 추억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가끔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학생에게 즉시 개입해야 할 문제 상황도 생긴다. “도대체 제가 얼마만큼 힘들다고 해야 제 마음을 아나요?” 아이는 창백한 얼굴에 팔 토시를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달려온 엄마 앞에서 꺼이꺼이 울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ADHD로 진단을 받아 약을 복용했는데, 아이들에게는 이상한 정신과 약을 먹는다는 식으로 알려졌다. 사회성이 부족한데다 상황에 맞지 않는 특이한 행동을 하다 보니 중학교에 와서도 그 소문이 또 좀비처럼 달라붙어 아이를 괴롭혔다. 아버지는 아들이 마음에 차지 않아 더욱 엄격해졌다.

‘끊어버리고만 싶어 이거 다/ 그만 놔버리고 싶어 모두 다/ 엄마는 바코드 찍을 때 무슨 기분인지/ 묻고 싶은데 알고 나면 내가 다칠까/ 난 사랑받을 가치 있는 놈일까…’ 모 방송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고등래퍼2’에서 김하온·이병재가 부른 ‘바코드’가 3월 말, 4개 음원 사이트 실시간 차트에서 1위를 달렸다. 아이들은 이 가사에 공감하며 이 노래에 열광했다. 문제는 일부 학생이 이 극단적 행동을 모방하는 데 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과 온라인상에서 공감을 하면서 우울의 동굴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대개 우울한 학생들이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온전한 삶의 기술이란 우리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것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 시각은 우리는 문제가 생기고, 고통을 겪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것을 진정으로 배운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받으면서 생각을 한다. 그러한 생각을 통해 고통의 기원을 이해하고, 고통의 규모를 파악하고, 고통의 현존과 화해하며 산다.

그러나 누구나 고통을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고통을 에너지로 끌어올리기 어려운 상태에 놓인, 저만치 혼자 있는 아이인 것이다. 든든한 선배의 비호를 받아 축구 스포츠클럽에 들어가더라도 같이 땀 흘리고 그 대화코드를 이해하며 어울리기는 어렵다. 힘이 많이 들지만 가까운 사람들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주 오랫동안 그 디딤돌이 되어주어야 하는 이유다. 불행한 타인의 존재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자신만의 행복 추구를 위해 점점 굳어가는 우리가 다시 살아난다. 그게 좋은 사회다. “엄마, 이거 울 일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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