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추억기행 .9] 소주이야기<하>

  • 입력 2003-01-09 00:00

1971년 8월, 대구 경품사에 한 획을 긋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8년째 수성못가에서 행상을 하던 김애순씨(당시 36세·대구시 비산동)가
집으로 가기 위해 짐정리를 하다가 손님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코로나 승
용차 그림이 찍힌 병뚜껑을 발견했다. ‘이게 꿈인가 생신가’ 김씨는 즉시
금복주 회사로 확인 전화를 걸었다. “진짜 코로나 줍니꺼?”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김씨의 이 한 마디는 시민들 사이에 ‘진짜 주나’란 유행
어를 파생시키는 등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경품을 받은 김씨 부부는 코로
나를 타고 시가지를 누볐다. 당시 코로나 한 대 가격은 125만원, 변두리
집 한 채 값이었다. 너도나도 못살던 그때 그시절. 그같은 경품은 ‘꿈
같은 일’이었다.
코로나 덕분인가? 금복주(94년부터 참소주로 개명)는 지금 지역의 소주시
장을 석권했다. 경쟁사들이 금복주 독주를 우려하면 금복주 맨들은 슬그머니
47년 금복주의 ‘생존사’를 내민다.
1957년 4월 대구시 중구 달성동에서 ‘삼산물산사’(1975년 1월 <주>금복
주로 상호 변경)로 등장한 금복주. 애숭이에 불과한 금복주의 첫 작품은
진성(眞星)소주. “당신들만 별(星)이냐 우리도 별이다.” 진성이란 이름은
당시 지역 소주계 삼총사 삼성(이병철), 금성(박기수), 명성(권의호)의 ‘세
개의 별’을 모방한 것이다. 1960년 4월, 금복주의 상징 복영감 마크를
단 희석식 복주(福酎)가 등장했고, 1963년 2월 우여곡절 끝에 금복주(金福珠
)가 태어난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금복주의 ‘주’의 한자가 酎(소주의
‘주’의 한자는 酒가 아니고 소주 주(酎)를 사용해야 한다)가 아니고 珠인
게 궁금했다. “복주라니 자기들 소주만 복이 있고 우리 소주는 복이 없
단 말인가.” 경쟁업체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어쩔수없이 珠를 사용한 것이
다. 金자는 당시 인기청주 금배(金盃)의 ‘금’자를 빌려왔다. 천신만고 끝
에 얻은 금복주를 지키기 위해 유사상호로 등장할 수 있는 ‘원복주’ ‘
은복주’ ‘오복’ ‘금복’까지 특허청에 등록해두는 기민함도 보인다.
술통 위에 좌정하고 왼손엔 술주머니, 오른 손엔 부자방망이를 든 복영
감 상은 중국과 인도의 몇몇 고승 이미지를 합성해서 탄생한 것이다. 복스
런 얼굴은 중국 선종의 시조인 달마 대사, 불룩한 배는 중국 후양의 선승
이자 복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포대화상(布袋和尙), 검은 두건과 바른손에 망
치, 왼손에 쌀자루를 둘러멘 인도의 대흑신(大黑神)을 차용한 것이다. 그런
복영감 이미지가 일제 때 고무신 제조회사인 오다후쿠의 심벌과 비슷하다
고 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금복주 홍보·판촉전 과정에 숱한 에피소드가 쏟아졌다.
1탄은 퀴즈권부 광고. 병마개 안에 들어 있는 ‘최고소주는 금복주’란
퀴즈권 8개를 모아오면 고급스텐식기, 자개상을 준 것이다. 주부 2명만
모여도 화제는 오로지 경품이었다. 경품에 눈이 멀어 마시지도 못하는 금복
주를 사러나가는 아내를 달래기 위해 식기를 사갖고 오는 가장들도 생겨났
다. 2탄은 ‘식당을 공략하라’. 요즘과 달리 당시 주당들은 겨울에는 정종
, 여름에는 소주를 즐겨 마셨다. 원대동 서노인집, 이북식 보신탕 전문점
교동집, 사일동의 일미집, 종로초등학교 뒤편 상주집 등으로 판촉요원들을
급파했다. 간판이 귀하던 시절 향촌동 등 시내 곳곳의 구이집까지 찾아 금
복주 상호와 슬로건이 적힌 홍보용 간판을 달아주는 한편, 비수기 겨울엔
판촉맨들이 매상을 올려주면서 밀착 홍보를 했다. 자연 판촉맨들의 속은 말
이 아니었다. 그들의 안주머니 속엔 항상 간장 치료약 메치오닌이 들어있었
다.
69년 5월11일 오후 3시 수성교 남쪽 가설무대. 그날 지역민들의 관심은
온통 대구MBC와 금복주의 합작품인 도민위안잔치에 쏠렸다. 최희준, 배호,
나훈아, 이미자, 은방울자매, 김부자, 송해 등 당대 최고 연예인을 보기
위해 20여만명이 몰려나와 대통령 유세현장을 연상시켰다. 라디오 시대(대
구에 TV가 처음 방영된 것은 70년 7월18일 채널 10 영남TV)였던 당시 지
역민들에겐 놓치기 아까운 공연이었다. 차츰 금복주란 이미지가 지역민의 뇌
리에 깊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전국은
일일 생활권이 된다. 진로, 삼학, 백화 등 서울에 기반을 둔 거대 소주
업체들이 대구를 가만둘 리 없었다. 71년 하반기 전국의 소주업계는 약속이
나 한 것처럼 ‘경품대전(景品大戰)’에 뛰어든다. 금복주(코로나 3대 등 총
2천313명에게 1천350만원 지급), 진로(코로나 3대), 삼학(코로나 3대), 백
화(코로나 1대), 보해(코로나 1대), 삼척의 삼호(피아노 1대), 대선(TV 1대)
이 맞붙은 것이다. 경품대전은 곧바로 전속모델 붐으로 이어진다. 금복주는
비실이 배삼룡을 등장시킨다. “요걸 못마시고 갈 뻔했잖아!”동대구역 플
랫폼 매점에서 금복주를 사 마시다가 기차를 놓치고 만다는 10컷 컨셉트 T
V광고는 폭소갈채를 받았다.
‘일곱 잔 작전’도 소주판매에 일조를 했다. 2명이 4잔씩, 4명이 2잔
씩 먹으려 해도 늘 한 잔이 부족. 결국 “아줌마, 한 병 더!”를 외칠
수밖에. 마케팅전략으로 그들은 수리학적 원리까지 활용한 것이다. 소주맛도
더욱 순해지고 도수도 22∼23도로 낮아졌다. 아스파라긴산 등 건강에 좋은
다양한 기능성 첨가제도 섞고 있다. 하지만 주당들은 쓰고 독해빠진 그
시절 소주 맛을 결코 잊지 못한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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