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에세이] 판타지와의 대화

  • 입력 2012-11-26   |  발행일 2012-11-26 제29면   |  수정 201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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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그래픽디자인팀

동화 속에서 내가 두고 온 유년의 시간을 만난다. 하루 해가 천만 년의 시간만큼 무진장하고, 아무리 놀아도 지겹지 않던 생기 돌던 그 세계는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우리의 지복의 시공간이었다. 동화 속 호랑이는 곶감에 겁먹고 달아나는 귀여운 아이의 마음이었고, “금 나와라. 뚝딱.” 방망이 하나면 번쩍번쩍 금궤를 한가득 채울 수 있는 도깨비도 꼬마의 꾀에는 곧잘 속아 넘어가는 어수룩함이 있었다.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충직한 지니는 내가 원하는 것을 척척 해결해주고, 요술 양탄자를 타면 세상 어디라도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순식간에 데려다 주는 참으로 신나는 멋진 세계였다. 그곳은 아름다운 유리구두를 신고 왕자님과 신나게 춤추는 황홀한 환상의 세계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동화의 세계는 따뜻한 햇볕이 가득한 편안하고 충족한 엄마의 품과 같은 낙원이었다.

그 세상이 언제 사라져버린 것일까? “나는 어른이 되기 싫어요”라고 아무리 외쳐 봐도 우리는 영원한 아이 피터팬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환상의 보호막을 찢고 찬바람 부는 현실세계 속으로 걸어 나와야 함을 의미한다. 이곳은 언제나 돌아가면 따뜻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는 엄마가 있는 곳이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가 있는 결핍의 세계요, 힘겹게 노동해야 하는 수고로운 생존의 터다.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에 언 발과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성냥사세요”를 가냘프게 외치는 성냥팔이 소녀가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항상’ ‘이미’ 존재하던 언어의 세계에 태어나 그 서사의 구조 속에서 사회적 주체로 구성되어 나간다. 따라서 어린 시절 유아가 노출되는 언어의 세계는 그 아이의 정체성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다. 할머니의 무릎 위에서 듣던 “옛날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가 있는 충만한 동화 속 환상의 세계는 그 아이에게 평생 자양분을 공급해 줄 젖줄이자, 상처받아 결핍된 영혼을 채워주고 치유해 줄 침해받지 말아야 할 시원적 공간이다.

요즈음 서점에 가보면 다채로운 아동도서가 넘치지만, 아이들의 정신적 먹거리 또한 많이 오염되었고 영양가 없는 편이식품이 많은 듯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아동문학의 성격 자체가 어린 독자를 대상으로 하기에 부모, 교사, 사서와 같은 어른들의 매개를 배제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경우 아동도서는 자발적인 선별능력이 부족한 어린 독자 대신에 어른들의 손에 의해 선택되는 경우가 많기에 아이들의 즐거움보다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선택당하기 쉽다.

최근 아동문학 시장의 호황 분위기에 편승하여 일부 기성문인이 불순한 상업주의적 의도로 경계 넘나들기를 하며 어른들에게 선택받기 위한 책을 쓰는 것 또한 아동문학의 이러한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효율성만 생각하는 메마른 감성의 어른들이 선택한, 짤막짤막 발췌한 논술대비용 도서를 보면서 아이들이 뛰놀아야 할 상상의 공간이 토막나는 느낌이 든다. 입시에 대한 부모의 불안감이 보호받아야 할 천진한 아이들의 환상의 세계까지 뒤덮고 있는 느낌이다.

아이들이 주인이 되고,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들이 자유로이 빠져들어 즐겁게 놀 수 있는 그들만의 환상의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 진정한 아이들의 문학이다. 그 것은 침해받지 말아야 할 각자의 생명의 움터다. 얼어 굳어진 손으로 하나씩 켠 성냥불은 성냥팔이 소녀를 잠시나마 추위와 배고픔을 잊게 하고, 따뜻한 낙원으로 인도해 주는 환상의 횃불이 된다. 불빛 속에 나타난 따뜻한 크리마스 풍경은 이웃의 냉대와 무관심으로 굶어 죽어가는 성냥팔이 소녀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호사였다. 그 소녀가 그어댄 마지막 성냥불을 꺼뜨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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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없는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영국 시인 워즈워스의 말처럼 어느 새 어른이 되어 정신없이 산 우리에게도 이미 지나 온 유년기가 있었고, 그 시절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가 뛰놀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다. 동화 속 판타지 속에서 나는 내 속에 있는 아이와 더불어 놀며 그 동안의 생채기 난 마음을 치유받는다. 엄마 품을 떠나온 ‘어른 아이’의 구멍 숭숭 뚫린 상처의 시간에 여리고 애틋한 환상이 맴돈다. “내 손이 약손이다.” 어린 시절 엄마의 주문처럼 따뜻하게 감돈다.

안정인 <문학박사·대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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