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에세이] 섣달 초입에서

  • 입력 2012-12-03   |  발행일 2012-12-03 제29면   |  수정 2012-12-03
20121203

힘들고도 버거웠던 여름이 지나 가을에 들어섰나 싶더니만 벌써 달력이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무더위야 여름이면 누구나 겪는 신고(辛苦)이지만, 지난 여름에는 육신의 고통 때문에 한층 더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고추를 말리는 이글거리는 햇빛이 숙지근해지면서 긴 여름 끝에 시작되는 가을이 요새는 무척 짧아졌다. 매해 가을 찾아오던 가슴앓이도 올해는 앓을 틈새기가 없을 정도로 지난 가을은 그렇게 훌쩍 가버렸다.

이즈막에 맞는 섣달의 느낌은 옛날과 사뭇 다르다. 시간에 얽힌 물리적인 비밀은 내 알 바 아니지만 나이가 들면서 세월은 화살이 되고, 이제는 날개까지 단 모양이다. 오래전 선고께서 신관이 많이 안 좋으실 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살아 온 세월들이 어제만 같은데, 네가 이렇게나 컸구나.” 장성한 자식을 보아서 흡족하시다는 말씀인지, 아니면 당신이 살아갈 나날이 줄어드는 것이 애석하다는 것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지금에야 깨닫는다. 두 가지 모두였음을. 그리고 앞의 것은 좋지만, 뒤의 것은 피하고 싶으셨다는 것도. 장자도 죽어서 묘당에 모셔지는 영광을 얻기보다는 비록 진흙 속에 꼬리를 끌더라도 살고 싶다고 했다는데, 우리 김지이지들이야 변명이 필요없다.

올해도 마지막 달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한 해가 넘어간다는 의미도 있고, 머지않아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예고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밤은 웬일일까. 평소에는 ‘잠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으면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터인데…’ 하던 내가 누운 자리에 불편함을 느끼다니. 눈을 감고 있으나, 정신 줄은 팽팽하기만 하다. 밤은 깊고 삭신은 무거운데, 평소에 나를 놓아주지 않던 히프노스가 오늘밤에는 아예 상거(相距)를 둘 모양이다.

除夜作 (섣달그믐에 짓다)

高適 (702∼765)

旅館寒燈獨不眠(객창의 차가운 등불 아래 홀로 잠 못 이루는데)
客心何事轉凄然(나그네 마음은 무슨 일로 이리도 처연할까)
故鄕今夜思千里(고향에서는 오늘 밤 천리 밖의 나를 생각이나 할까)
霜明朝又一年(서리 빛 살쩍도 내일이면 또 한 살 더할 테지)

토번(吐藩) 정벌이라는 대업을 안고 시안(西安)을 떠나 수만 리 먼 변방에서 객고를 겪는 당대의 인물이나, 10대 초반에 고향과 부모의 슬하를 떠나 수십 년을 객지에서 나대고 있는 향원(鄕愿)이나 나이 들어 세모에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야 다를 리가 없을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생가의 감나무는 올해도 배고픈 까치들에게 내어줄 몇 개의 홍시를 가지 끝에 덩그마니 장만해 두었을 테지. 아니면 큰 마을의 한가운데 있는 바닥 높은 집 마당에서 홀로 옛 주인의 아들이 마을로 들어오는 넓은 신작로에 나타나기를 지켜보고 있을까?

20121203
크로노스는 앞으로 나를 위해 천구를 몇 바퀴나 더, 그리고 얼마나 빨리 돌릴까. 젊어서는 더디게 굴린다고 더러더러 타박을 했는데, 그가 나의 계피학발(鷄皮鶴髮)과 서로 앞을 뺏기지 않으려 경주하는 모양을 보면 이제는 내가 앙갚음을 당하는 모양이다. 그런 크로노스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꼭 같이 냉정하고 무자비하지만, 아울러 어느 누구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기댈 데는 카이로스밖에 없다. 길이로 잴 수 없는, 그리고 진정한 의미를 지닌 시간, 그것이 카이로스이다.

인간은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상한 동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너진 갱도에서도 수십 일을 버틸 수 있고, 부모형제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목도해야 하는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크로노스를 어떤 카이로스로 채울까? 나이 들어 꽃을 가꾸는 옛 선비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栽花(꽃을 심으며) 曺好益(1545∼1609)
栽花人笑晩 (뒤늦게 꽃을 심는다고 사람들이 웃지만)
六十遠期難(나이 육십, 먼 훗날 기약하기 어려워도)
得到稀年後(칠십이 되고 나면)
猶將十度看(꽃이 핀 것을 열 번은 보고말고)


일러스트/그래픽디자인팀

박종한<대구가톨릭의대 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