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가슴에 묻어만 두었던 배우의 꿈, 황혼서 꺼내다

  • 이효설,황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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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3-28 07:33  |  수정 2013-03-28 07:33  |  발행일 2013-03-28 제18면
대구 실버스타연극단 맹활약…60∼80대 여성으로 구성
학교·요양원 찾아 공연 펼쳐 “이 나이에 박수받아 너무 좋아”
평생 가슴에 묻어만 두었던 배우의 꿈, 황혼서 꺼내다
대구노인보호기관 실버스타연극단의 단원들이 26일 낮 대구청소년문화의집 연습실에서 연극 연습을 하던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황인무기자 him7942@yeongnam.com

26일 낮 12시30분. 대구시 남구 대명동 대구청소년문화의집 3층 연습실에 들어서자 ‘6070’ 여성들이 서로 고함치듯 연기를 하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한 70대 여성이 시어머니 역할로 분해 며느리 역의 또 다른 할머니를 목청껏 다그치는 장면이다. 옆에 서 있던 연극인 강사가 “누님, 그렇게 책 읽듯 하지 마시고, 진짜처럼 더 화내 보세요”라고 주문하자, 그 할머니는 이번엔 상대역을 흘겨보더니 삿대질까지 하며 구수한 욕까지 애드립을 해 보였다.

강사는 빙그레 웃으며 “연기가 진짜 실감나네!”라고 손뼉을 쳤다. 연기를 마친 할머니는 대본을 접으며 “아이고, 뻥뻥 소리치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하며 크게 웃음 지었다.

이곳에서 몇 년째 할머니들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는 대구시립극단 배우 천정락씨는 “고령 여성들은 한 번 연극을 배우면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거의 없고, 매우 적극적”이라며 “4~5년씩 배운 실버들은 누가 연기를 더 잘하나 경쟁도 하고, 연습도 잘 해 온다”고 귀띔했다.

실버 여성들이 뒤늦게 연극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대구’라는 보수적인 지역에서 살며 ‘경상도 남자’의 뒤치다꺼리, 자식 뒷바라지에 자신을 돌보지 않던 여성들이 황혼의 나이에 아마추어 연극 배우로 활동하며 삶의 즐거움을 새롭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여성들은 대구노인보호기관의 실버스타연극단 단원들이다. 순수 봉사단체인 이 연극단은 60대에서 80대 여성 25명으로 구성돼 있다. 2009년 설립된 후 현재까지 매주 1회 모여 연극 연습을 하고 있다. 연습이 완성되면 초·중학교와 요양원을 찾아 공연을 펼쳐 왔다. 지난해엔 포항시 주최로 열린 한 행사에서 1천명이 넘는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실버스타연극단의 연극은 ‘노인학대’를 주제로 하고 있다. 세대갈등이나 고부 간 갈등 등이 주로 등장하는 소재다. 할머니들은 연극을 통해 소박맞는 불쌍한 며느리도 되었다, 부모 괄시하는 못된 자식도 되었다 한다.

단원인 권정희 할머니(67)는 요즘 준비하는 연극에서 ‘욕쟁이 할머니’ 역할을 맡았다. 평생 욕이라곤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엔 주저했다. 대본을 읽으려면 입안이 바짝 마르고 목소리도 안 나왔단다. 하지만 할머니는 살면서 억울했던 사연을 하나씩 되새김질하며 감정을 잡았고, 어느날 욕설이 터져 나왔다.

권 할머니는 “요새는 다른 여자들이 내 보고 ‘욕이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노’하며 궁금해한다”며 “밥만 짓고 사느라 몰랐는데, 배우 선생님이 내 목청이 그렇게 크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권 할머니는 시집와 수십년 동안 시어머니를 모시며 수발을 들었다.

이 연극단 덕에 연기자의 꿈을 이룬 실버단원도 있다. 결혼하고 30대 시절, 홀로 연기학원 찾아다녔다는 정정자씨(64). 정씨는 “젊어서 배우를 하고 싶었지만, 장애 있는 자식도 있고 해서 그냥 포기했어. 그래도 이 나이에 누구 앞에서 연기하고 박수 받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라며 들뜬 음성을 감추지 못했다.

연극을 하며 역지사지도 알게 됐다는 실버 단원들. 박종순씨(62)는 고부갈등을 연기하며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자식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이나 행동에 대해 나름대로 원칙을 세운 경우다. 자식들에게 섭섭한 것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연극을 처음 배울 때는 어려움도 컸다. 누구 앞에서 혼자 말하는 것도 너무 힘이 들었던 것. 한 실버 단원은 “단원들 전부 일어서서 대본 읽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혼자 일어서서 소리내서 읽지도 못하겠더라”며 “나서서 한다는 게 얼마나 부끄럽던지”라고 털어놨다. 다른 실버단원들은 30분짜리 대본을 모두 외우는 것이나 무대에서 자세가 엉거주춤해지는데 이걸 고치는 일이 힘들다고 했다. 남성 단원이 없어 맨날 남자 역할만 맡는다며 할아버지 단원도 모집해 달라는 볼멘소리를 하는 할머니들도 적잖다.

실버 단원들은 요즘 연극 ‘황혼의 부르스’와 ‘사랑으로’를 맹연습 중이다. 공연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연습이 끝나는 대로 어디든 달려갈 준비가 돼 있단다. “노인들의 애로와 갈등을 담은 작품인 만큼, 젊은이들도 우리 연극을 많이 봐줬으면 좋겠어요. 늙은 사람 마음도 젊은 사람이 좀 알아줬으면….” 할머니들은 실버스타연극단의 연극에 많은 관심을 가져줄 것을 부탁했다. (053)471-7065

이효설기자 hoba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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