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유천하-경북의 술을 찾아서 .4] 400년 역사의 김천 ‘과하주’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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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수정 2013-10-21  |  발행일 2013-05-10 제면
“금 캐던 샘에서 나오던 물로 빚었더니 한여름에도 술맛 변치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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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금릉주천’ 표석(점선)이 있다. 1882년에 세워진 이 표석에는 ‘광서 8년’이라는 청나라 연호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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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과하천 전경과 내부 모습.

“하늘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하늘엔 주성(술의 별)이 없었을 게고/ 땅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땅엔 술의 샘(주천)이 없었으리.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천약불애주 주성부재천 지약불애주 지응무주천)”

주선(酒仙) 이백(李白)은 달빛 아래서 취흥에 겨워 ‘술이 솟는 샘’을 노래했다. ‘월하독작(月下獨酢)’이다. 그런데 ‘술의 샘’은 김천에도 있었다. 이 샘의 물도 이백이 사랑한 주천의 샘물처럼 술로 빚어지면서 오랜 세월 주당들의 사랑을 받았다.


‘음식디미방’ 등
여러 고문헌에 전해질 만큼 유명…
다른 지방에서 배워 갔지만
물 차이 극복 못해

일제강점기에대량생산체계
‘과하주요! 과하주’ 열차 내 판매도
주조법 끊겼다가 1986년에 재현

맛의 비밀 간직한 샘의 명칭은
金之泉→酒泉→ 過夏泉 바뀌어
‘금 캐는 부역을 두려워한
토착민이 샘 묻었다’ 說도


“옛날에 금이 나는 샘이 있어 금천(金泉)이라 했다. 그 샘의 물로 술을 빚으면 맛이 향기롭기 때문에 주천(酒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토착민들이 금(金)을 징수하는 역사(役事)를 두려워한 나머지 샘을 묻어버려 지금은 그 장소를 알 수 없다. 김천 과하주(過夏酒)는 그 이름이 온나라에 확산되어 다른 지방 사람들이 그 (주조)방법을 금릉(金陵)사람에게 배워가지만, 그 맛이 본토의 술만 못하니 (금천의) 물이 타처(他處)보다 유별(有別)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릇 물산(物産)이란 각각 의토(宜土·재배하거나 생산하기에 적합한 땅)가 있는 것이다.”

여이명(呂以鳴·1650~1737)은 자신이 쓴 김천의 사료집인 금릉승람(金陵勝覽)에서 김천에 있는 주천의 물로 빚은 과하주(경북무형문화재 11호)를 “주천의 샘물이 아니면 그 맛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술”이라며 한껏 자랑했다. 그러나 이 샘이 주천으로 명명된 배경에는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과하주가 언제부터 빚어졌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400여년 역사를 가진 술로 나타난다. 이를 역산해 보면 대략 임진왜란이 있었던 16세기 후반이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반도를 공격해 오자, 순망치한을 우려한 명나라는 구원군을 보낸다. 이때 명나라 군대를 지휘한 이여송(李如松)이 김천을 지나다 우연히 이 샘의 물을 마셔보고는 “물 맛은 주취안(酒泉·일명 금천(金泉)으로, 간쑤성 주취안현에 있다)의 것과 같다. (김천의) 지형도 금릉(金陵·지금의 장쑤성 난징)과 흡사하다”고 평가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사실이라면, 이여송의 말 한 마디가 이 샘을 주천으로 만들었고, 금릉이라는 지명이 탄생하게 된 배경도 되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적국 일본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조선 지도층의 비길 데 없는 무능과 이여송의 군대로 인해 겪었던 백성의 고통이 오버랩되는 건 단순한 감정 탓일까.

금릉군지(金陵郡誌)는 “전란(임진왜란)을 통해 백성들은 일본군과 일부 명군(明軍)뿐 아니라 동족의 악당에 의해 삼중의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살아 남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명군 전공의 제물이 된 사람과 동족에게 희생된 사람까지 있다”고 기록해 당시의 참상을 전하고 있다. 주천에서는 금도 나왔던 모양으로, 금릉승람은 주민들은 금을 캐는 부역(賦役)이 두려워 샘을 묻어버리고 그 장소를 알 수 없게 했다고 전한다. 향기로운 술이 나왔든, 품질 좋은 금이 나왔든 주천이 서민들의 고통을 가중시켰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주천은 과하천(경북문화재자료 223호)으로 개명돼 지금도 김천시 평화남산동 고성산 자락에 있으며, 금광에서 나오는 물이 이곳으로 분출됐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다. 그러니 이 샘이라도 막혀 등골이 휘는 고생을 피했으면 하는 토착민의 간절한 소원이 후대에 전해지면서 사실처럼 각색됐을 것이란 해석도 있다.

한편 김천문화원 자료에 따르면 옛날에 고성산 금광에서 나는 차가우면서 단 맛이 도는 물로 술을 빚었더니 한여름에도 그 맛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여름을 능히 넘기는 술’, 즉 과하주(過夏酒)라 명명했다. 고려사가 간행된 1451년 이전부터 사용한 김천(金泉)이라는 지명도 금지천(金之泉)에서 유래됐다. 그러니까 금지천은 주천으로, 주천은 과하천(過夏泉)으로 이름을 달리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주천으로 불리던 시기인 1882년에 세운 ‘금릉주천(金陵酒泉)’이란 표석도 전해오고 있다.

과하주의 명성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규곤시의방(閨崑是議方·음식디미방으로 더 잘 알려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가공서), 규합총서, 증보산림경제 등에 담그는 방법이 전해지는 것으로 미뤄볼 때 과하주가 김천의 명물에서 양반가의 가양주(家釀酒)로 발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유명세를 떨치던 과하주는 일제강점기에 대량생산체제를 갖추고 대중화에 나섰던 것으로 나타난다. 1935년 조선주조협회가 주세 1천500만원 돌파를 기념해 발간한 조선주조사(朝鮮酒造史)에는 ‘김천의 수질은 양조에 적합하며, 과하주는 300여년 전부터 유명한 술로서 김천양조식회사가 1928년부터 생산한 이후부터 과하주의 수요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1930년대부터는 일본인들도 과하주를 즐겨 마신 것으로 나타난다.

김천향토사연구회 이근구 회장(95)을 비롯한 지역 원로들은 “일제강점기 열차에는 ‘과하주요! 과하주!’라 외치며 병에 담긴 과하주를 파는 판매원이 있었다”거나 “정월대보름 전후로 주조공장 일꾼들이 물지게로 하루 종일 과하천 물을 길어 나르는데, 일손이 부족해 동네사람까지 품 팔러 다녔다”는 등 과하주가 김천의 특산품으로 대량 생산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이처럼 전성기를 구가하던 과하주는 1940년대에 들어 일제가 우리의 곡식을 수탈하기 위해 곡주 생산을 중단하면서 맥이 끊겼으나, 치과의사이자 김천문화원장을 역임한 고 송재성씨가 1986년 숱한 고생 끝에 재현에 성공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과하주를 전국 4대 명주 반열에 오르게 한 과하천은 주변에 인가가 늘어남에 따라 없어졌다. 샘만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예로부터 물 좋은 고장에서 좋은 술이 난다고 했다. 삼산이수로 대표되는 김천의 맑고 깨끗한 물이 있었기에 과하주의 탄생이 가능했을 것”이라며 “지역에서 나는 찹쌀과 통밀 등을 주재료로 하는 과하주는 단순한 술의 영역을 벗어나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 숙성시켜온 ‘김천의 향기’”라고 평가했다.


■ ‘원조 과하주’ 김천만의 주조 비법


타지에선 ‘약주+소주’의 폭탄주…김천은 과하천 물 덕에 소주 섞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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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하주 주조법은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김천과하주가 완전 발효주인데 반해 다른 지역에서 만든 과하주는 장기간 보존을 위해 소주를 혼합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과하천의 샘물에 그 비밀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김천과하주는 투명한 황갈색에 곡주 특유의 향이 있다.
과하주 주조법은 자료에 따라 차이가 난다.

“봄과 여름 사이에 쌀을 빻아 진하게 죽을 쑤어 식힌 뒤 누룩가루를 넣어 밑술을 만든다. 밑술의 맛이 써지면 찹쌀로 고두밥을 만들어 밑술에 버무려 두었다가 다시 그 맛이 써지면 소주를 붓고, 7일 후에 소주를 더 붓는다.”

1809년 발간된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수록된 주조법이다. 여기에 따르면 과하주는 발효주(약주)와 증류주(소주)를 혼합한 특이한 술이다.

이에 대해 한 전문가는 “과하주는 ‘폭탄주’의 원조인 셈이다. 보존 방법으로 소주와 약주를 섞어 알콜 함량을 높였으나 그 맛은 약주에서 취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김천과하주 문화재지정 조사보고서에는 “찹쌀로 고두밥을 찐 다음 국화(황국)와 쑥을 깔아둔 볏짚 위에서 식힌다. 이후 누룩 성분이 우러난 물을 사용해 고두밥을 떡으로 만들어 한지로 밀봉한 항아리에 넣고, 15~18℃ 사이의 온도가 유지되는 양조실에서 45일 이상 발효시켜 정주를 얻는다”고 돼 있다.

그리고 1938년 발행된 주조독본(酒造讀本)은 “조선의 과하주는 주정분 13~14도로, 가장 유명한 김천과하주는 찹쌀과 분곡(밀기울을 골라낸 약주용 누룩)을 찧어 혼합해 술떡을 만들어 항아리에 넣어 밀봉하고, 한 달을 숙성시킨 후 정주를 건진다. 이 외에 소주를 첨가하는 과하주도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로 미뤄보면 김천과하주를 제외한 과하주들은 발효주와 증류주를 혼합한 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봄에 빚는 김천의 과하주는 소주를 섞지 않은 상태에서 그해 9~10월까지 두고 마셨다. 그래서 과하주라 했다”며 “이렇게 장기간 보존할 수 있었던 비결이 과하천의 샘물에 숨어 있었을 것“이라며 김천과하주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송 국장은 “과하주는 갈증을 없애주고, 적당량을 장복할 경우 신경통에도 효과가 있다. 약한 산미가 주는 부드러움이 특징인 과하주는 아스파라긴이 함유된 술의 원조라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과하주는 밝고 투명한 황갈색에 곡주 특유의 향을 더해 시각과 미각을 고루 자극하는 술이다.

김천=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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