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보다 남인수를 더 잘 아는 팬 권혁규씨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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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1-15   |  발행일 2013-11-15 제35면   |  수정 2013-11-15
용돈 생기는 족족 중고 SP판 대거 매입
음원파일 1300개 보관…스크랩북 30권
며느리·손자 등 온가족 데리고 고사도
남인수보다 남인수를 더 잘 아는 팬 권혁규씨
남인수를 제2의 아버지로 기릴 정도로 남인수 마니아인 권혁규씨. 며느리까지 대동하고 진주의 남인수 묘소를 찾아 고사를 지낼 정도의 옛가요 전도사. 옛가요의 신명 덕분에 생업인 철공업을 누구보다 더 성실하게 지켜나갈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대구시 북구 노원동 세경정밀기어 권혁규 대표(68).

25년간 쇠를 만지며 살고 있는 그만큼 남인수 사랑에 푹 빠진 사람도 드물 것이다.

경북 영덕 지품면 출신인 그는 1960년대 중반에 먹고살기 위해 대구로 온다.

시내 레코드 점에서 ‘청춘고백’을 듣는 순간 빠져나갈 수 없는 ‘남인수 짝사랑’이 시작된다. 집안 사촌 형님이 부산일보 기자였는데 그의 목청도 남인수 스타일이었다.

용돈을 받으면 신천동 푸른다리 밑에 노점상 고물점 SP판 중고를 대거 매입을 한다.

95년에 남인수 팬클럽을 결성한다. 회원은 모두 친구였다. 가끔 진주시 화촌동 새미골 남인수 묘소도 찾았다. 2011년 산 너머 본가 근처로 이장됐다. 그는 남인수가 62년 6월26일 오후 3시에 죽었다고 말했다.

회원이 늘지 않은 탓에 결성된지 1년여만에 팬클럽은 흐지부지 된다.

그런 도중에 2002년 생긴 전국 규모의 남인수 팬클럽에 가입을 한다. 본부는 서울에 있었고 오프라인 회원만 700여명. 봄에는 진주, 가을에는 전국 각처를 돌면서 만났다. 회원은 거의 남인수 노래만 부른다.

“남인수는 광복 전에 800여곡, 광복 후에 200여곡, 모두 1천여곡을 불렀는데 저는 결혼청첩장, 해같은 내마음, 물방아 사랑, 청노새 탄식 등 200여곡을 부를 줄 압니다. 청노새탄식은 참 희귀한 노래입니다.”

권 대표가 남인수의 음악성에 대해 분석해준다.

“우리 가요사에서 가장 미성일 겁니다. 최저음에서 3옥타브까지 폭넓은 음폭을 갖고 있어요. 가만히 들어보세요. 기막힌 바이브레이션은 잔잔하게 울리다가 어느 순간 아주 태풍 같은 기세로 유장하게 넘어갑니다. 카랑카랑하면서 매우 기교적입니다. 비행기로 말하면 저속 항진하다가 갑자기 수직 상승하는 형국이랄까요.”

그는 단순히 남인수 노래를 감상하고 부르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의 음반과 악보, 관련 기사 및 자료를 학자처럼 체계화시켜 나갔다.

“원래 SP판은 훗날 나온 일반 턴테이블에 올려선 들을 수가 없습니다. 78회전 유성기판에서나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현대 음향기계로 복원할까 고민하던 중 일본 파이오니아(모델명 PLA450B) 78회전 턴테이블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음질을 추출한 뒤 컴퓨터에 입력해서 파일로 만들면 거의 원음에 가까운 소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남인수 음원은 거의 갖고 있다. 노래방에서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추억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을 녹음해 CD를 만들기도 했다.

팬클럽과 무관하게 남인수 관련 음원 파일만 1천300개를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 전체 노래 파일 중 80%는 남인수 노래다. 나머지 옛가요 가수의 작품이다. 그는 요즘 노래에 정이 안 간단다. 80년대 이전 조용필, 남진, 나훈아 등의 노래도 부르지 않는다.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만 대상이다.

현재 유정천리 멤버 겸 대구 남인수 팬클럽 행사추진위원장으로 있다. 또한 남인수전승보전회 고문으로 있다. 전국에 남인수 팬은 얼추 500여명.

남인수를 친일파 운운하는 데도 분통을 터트린다. 남인수 가요제 반대 운동이 일어날 때 전단을 뿌리고 반대하는 현수막도 걸었다.

“남인수처럼 한두 곡 일본 노래 안 부른 가수가 누가 있습니까. 유명하면 다 일본 노래를 부르게 했어요. 그렇지만 그런 곡은 민초도 듣지 않았어요. 남인수한테 친일 운운하면 얻는 게 보다 잃는 게 몇십 배 더 많아요.”

하나 밖에 없는 남인수 십자수 사진, 18세 때 사진, 57년 나비넥타이 맨 사진 등 20여종을 갖고 있다.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인 비용도 적잖게 들어갔다. 남인수 가요제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 전승보전회 음향 장비도 사비로 구입했다. 지난 6월2일에는 며느리 손자 등 전 식구가 총출동해 묘소에서 고사를 지냈다. 가족이 이해해줘서 기분이 좋다.

“남인수는 저의 또 다른 아버지라고 믿습니다.”

아버지도 1917년생이고 남인수는 1918년 생이다.

그는 전승회의 기록고문으로 지금까지 남인수 관련 자료를 30권의 스크랩북으로 만들었다. 53년 남인수가 ‘이별의 부산정거장’ 취입 당시 녹음장비 사진도 갖고 있다. 철공소 안의 쇠도 금방 남인수 노래를 부를 것 같은 표정이다. 주인을 닮는 모양이다. 016-833-2029
이춘호기자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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