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식의 산] 스스로 몸을 낮췄지만 기품은 빼어나다 (경남 거창군·해발 965m)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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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1-17   |  발행일 2014-01-17 제39면   |  수정 2014-01-17
정상에서 바라보는 은빛 산들의 파노라마 ‘압권’
길잡이
미폭-(20분)-슬랩 전망대-(30분)-돌탑 전망대-(20분)-정상-(20분)-서문가바위-(20분)-지재미 쉼터 갈림길-(30분)-996m봉 갈림길-(40분)-지재미 쉼터-(20분)-문바위-(15분)-자연휴양림 주차장
20140117
현성산 정상에 서면 모산인 금원산은 물론 덕유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파란 하늘과 설산(雪山)이 만나는 장쾌한 풍광에 입이 쩍 벌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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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오르는 눈길에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허리춤까지 빠질 수 있다.


>>길잡이


미폭-(20분)-슬랩 전망대-(30분)-돌탑 전망대-(20분)-정상-(20분)-서문가바위-(20분)-지재미 쉼터 갈림길-(30분)-996m봉 갈림길-(40분)-지재미 쉼터-(20분)-문바위-(15분)-자연휴양림 주차장

고속도로를 따라 거창 휴게소를 지날 무렵, 정면으로 시야에 들어차는 가야산 정상부에 눈이 쌓였다. 이틀 전에 눈곱만큼의 눈이 내렸는데 저렇게 쌓인 걸 보면 이번 산행에도 눈 좀 밟을 수 있겠다는 기분 좋은 예감으로 거창으로 차를 몬다. 평야처럼 너른 거창들판은 산바람 들바람이 실랑이를 벌이며 아침녘 마당을 쓸 듯 휩쓸고 다닌다. 거창읍에서 어느 방향이든 조금만 벗어나면 사방으로 준봉이 에워싸고 있는 산 부자 고장이다. 부잣집 곡간에서 곶감 하나 훔쳐내듯 소문나지 않은 산 하나를 훔치려 든다. 이번에 훔쳐낼 산은 같은 산줄기의 금원산(해발 1천353m), 기백산(해발 1천332m)의 높이에 눌려 스스로 몸을 낮추었지만 그 기품은 주변의 산을 압도하고도 남을 현성산이다. 금원산에서 보자면 모산은 덕유산이고, 현성산에서 보자면 모산은 금원산이다.

그래서 차를 세운 곳도 금원산자연휴양림 주차장이다.

차에서 내려 장비를 챙기는데 계곡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아직 여미지도 못한 목덜미며 허리춤을 마구 들쑤신다. 잠시 잠깐 만에 손가락이 곱아 마비되는 듯하다. 출발부터 심상치 않다. 습관처럼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코털이 얼지는 않는다. 예상컨대 영하 7℃쯤이다. 영하 10℃ 이하면 들숨을 쉴 때 코털이 얼었다가 내쉴 때 녹았다가를 반복하는 그 오묘한 느낌이 드는데, 다행히 바람만 아니면 큰 추위는 없을 것 같다.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100여m 내려오면 ‘미폭(米瀑)’이라는 폭포가 있다. 흘러내리는 폭포수가 마치 쌀이 흘러내리는 형상과 같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예전에 상류에 동암사라는 절에서 쌀 씻은 뜨물이 흘러내렸다고 해서 ‘쌀 이는 폭포’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미폭 오른쪽에 무덤 옆으로 리본이 주렁주렁 걸렸다. 소나무 숲 사이로 들어서는데 연습도 없이 곧바로 가파른 오르막이다. 이번에는 예고도 없이 연이은 계단길이다. 10여분을 숨을 헐떡이며 오르니 벤치가 놓인 군불 지핀 아랫목 같은 아늑한 공간이 나온다. 지레 겁을 먹고 꽁꽁 싸맨 옷가지를 한 겹씩 벗고 다시 길을 잇는다. 철 난간이다가 철 계단을 반복해 10분 정도 더 오르면 오른쪽으로 난간을 두른 전망대가 나온다. 정면으로는 거대한 슬랩(비스듬히 누운 큰 바위벽)이 버티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거창의 들녘이 시원스레 조망되는 곳이다.

난간에 바짝 붙어 서서 사진을 찍으려다 허방을 짚은 듯 몸이 휘청거려 물러선다. 햇살이 달아오르고 바람이 잦아들 법도 한데 여전히 앙탈을 부린다. 편히 앉아 쉬어가려다 바람에 등 떠밀린다. 숲 사이로 그늘진 오르막이다. 수직으로 긴 계단을 한 번 오르고서야 볕이 잘 드는 능선에 올라선다. 바위를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도록 길이 나있는데 바위틈 사이로 작은 돌탑이 세워져 있다. 길에서 잠시 벗어나 돌탑 쪽으로 올라서니 마주한 금원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몇 분이면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정상이 바로 코앞이다. 또 바위 덕분에 바람을 따돌릴 수 있어 쉬어가기에 기막힌 공간이다.

간식을 나누며 배낭 옆 주머니에 꽂아둔 물병을 꺼내든다. 마개부분에 살얼음이 꼈다. 목젖까지 얼얼한 물 한 모금에 정신이 버쩍 든다. 바람을 피해 몸을 숨겼지만 살얼음이 낀 물병에 손이 가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래, 피하지 말고 이 시간을, 공간을 즐기자.

한기가 들 즈음에 기막힌 장소를 버리고 다시 길을 나선다. 바위를 오른쪽으로 돌아 나와 작은 안부에 내려섰다가 마지막 가파른 오르막길에 붙는다. 이제야 몸이 풀렸는지 가파른 오르막이지만 초입에서 버겁게 내뱉던 호흡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코앞에 보이던 정상은 가파르기도 하지만 눈과 얼음이 뒤섞인 구간이라 속도가 느려진다. 20여분 만에 정상 아래 섰지만 마지막 고빗사위가 기다리고 있다. 바위 위에 올라서야 하는데 나뭇가지에 매놓은 로프를 잡고 기어오르듯 해야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서니 먼저 입이 쩍 벌어진다. 가까이 금원산은 물론이고 그 뒤로 덕유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찬다. 뒤로는 가야산, 단지봉, 수도산, 우두산 등 거창의 산들이 거침없이 펼쳐져있다.

정상석에는 현성산으로 적은 한자표기와 ‘거무시’라고 적은 한글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성스럽고 높음을 뜻하는 ‘감’의 한문 표기를 검을 현(玄)으로 해서 현성산이 됐다는 것이다. 감뫼-검산-거무성-거무시로 변천한 것을 ‘검은 성’으로 해석해 현성산으로 썼다는 설도 있다.

난간에 기대어 섰어도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바람이 몰아쳐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정상에서 내려와 안부에 닿으면 ‘현성산 정상 22m, 문바위 1.5㎞, 서문가바위, 금원산 4.9㎞’로 적은 이정표가 있다. 대부분 이 지점에서 금원산자연휴양림, 문바위 쪽으로 하산을 하고 금원산 방향은 몇 없다. 일행은 금원산 방향으로 계속 진행한다.

서문가 바위로 향하는 길은 북사면이라 쌓인 눈이 얼어붙어 빙판을 이루고 있다. 조심스레 안부로 내려섰다가 바윗길을 좌우로 돌아 지나거나 바위를 넘어 지나는 구간도 만난다. 20여분 만에 오른쪽으로 바위봉우리를 지나는데 ‘서문가바위’다. 서문가바위는 이자성(二字姓)인 서문씨(西門氏)가 나왔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다. 서문가바위를 지나면 976m봉우리 갈림길에 ‘금원산 3.9㎞, 현성산 1.0㎞, 수승대 6.5㎞’라고 적힌 이정표가 서있다.

오른쪽으로는 필봉을 지나 수승대로 향하는 길이고, 진행은 사면을 따라 직진 방향이다. 경사가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면 왼쪽으로 리본이 주렁주렁 걸린 지능선을 만난다.

눈길에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은 모두 여기에서 왼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하산하면 지재미 쉼터로 내려가게 된다. 금원산 쪽으로는 두어 명의 발자국만이 하얀 설원에 희미하게 찍혀있다. 아직 여유로운 시각이라 조금 더 진행하기로 하고 996m봉우리로 향한다. 몇 명이 지나지 않아 다져지지 않은 길이라 무릎까지 빠지는가 하면 바람에 몰린 곳은 허리춤까지 빠진다. 오른쪽으로 덕유산을 보면서 걷지만 숲에 가려 한곳도 시원하게 틔는 곳은 없다. 996m봉우리를 지나 조금 내려서면 ‘문바위 2.5㎞, 휴양림 3.2㎞, 금원산 2.7㎞’라고 쓴 이정표가 서있다. 여기서 진행을 멈추고 왼쪽 지능선을 따라 내려선다. 10여분 정도는 가파른 내리막이다가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는데 안부를 만나면 오른쪽으로 길이 나있다. 안부에서 잠시 내려서면 임도를 만난다.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 예사롭지 않은 무덤 몇 기를 만난다. 묘비에는 ‘서문씨(西門氏) 시조 묘’라고 적혀있다. 이제야 주능선에서 만난 서문가바위와 이곳 시조 묘가 연관성이 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부터는 임도를 따라 문바위를 지나 얼음축제가 한창인 금원산자연휴양림 주차장까지는 20분이면 닿는다.

새해 들어 매서운 바람으로 신고식을 톡톡히 한 산행이었다. 또 하나의 고민에 빠졌다. 이번 주말에는 어딜 갈까.

대구시산악연맹 이사 apeloi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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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30호인 가섭암지마애삼존불상 앞에서 한 등산객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현성산☞

◇…현성산은 모산인 금원산과 기백산 등 주변의 높은 산에 가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들머리가 되는 금원산 자연휴양림 주차장 입구 미폭으로 올라 정상까지 오른 다음 하산지점이 여러 곳 있어 역량에 맞게 코스를 잡기에 편리하다. 정상까지는 비교적 정비가 잘 된 탐방로를 따르지만 이후 이정표 대신 표식리본만 있는 갈림길도 있으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짧은 코스는 약 6㎞, 소개한 코스는 약 8㎞로 4시간 남짓 소요된다.

가는길☞

◇…88고속도로 거창IC를 빠져나와 우회전으로 3번 국도를 따라 약 9㎞를 가면 마리면소재지 내 마리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우회전으로 37번 국도를 따라 무주 방향으로 약 4㎞를 가 장풍삼거리에 이르면 좌측으로 금원산자연휴양림 이정표가 있다. 위천면소재지까지 간 다음 좌회전으로 약 5분 거리에 금원산자연휴양림 매표소가 나온다. 들머리인 미폭 앞에는 주차공간이 없으므로 자연휴양림 내에 차를 세우면 하산 시 편리하다.

내비게이션: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금원산길 412(금원산자연휴양림)

볼거리☞

△가섭암지마애삼존불상=경남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금원산자연휴양림 내에 있는 마애삼존불상(보물 제530호)은 본존불상 높이 150㎝, 대좌 높이 65㎝이며, 좌우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천연석굴의 암벽을 보주형(寶珠形)으로 얕게 파고 삼존불을 저부조(低浮彫)로 조각했다. 마애삼존불상은 삼국시대 불상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적인 도식화가 반영된 고려불상으로 특히 우리나라 석굴사원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문화재다.

△문바위=문바위는 옛 가섭암의 일주문에 해당하여 가섭암, 문바위로 불린다. 국내에서 단일 바위로는 제일 큰 바위로 오랜 세월을 보내며 이름도 수없이 바뀌었다. 고려 말 충신인 달암 이원달 선생이 망국의 한을 달랬던 바위라 하여 ‘순절암’이라고도 부른다. 바위 정면에는 ‘달암 이선생 순절동(達岩 李先生 殉節洞)’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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