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히든싱어 김광석편’ 출연제의를 거절한 이유는…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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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2-07   |  발행일 2014-02-07 제35면   |  수정 2014-02-07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의 주인공, ‘제2의 김광석’으로 주목받는 향토가수 박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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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쿠스틱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일약 ‘제2의 김광석’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지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박창근씨. 3개의 정규 싱글 음반을 낸 그는 김광석 신드롬이 전업 뮤지션의 봄날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요즘 ‘제2의 김광석’이 꽤나 유명세를 타고 있다.
 대구에서 가장 김광석다운 뮤지션은 누굴까. 다들 박창근(42)을 첫손에 꼽는다. 풍자적이고 도도한 유목민적 풍모를 지닌 내면의 근성까지 꼭 김광석을 빼닮았다. 팬클럽과 연대를 하면서도 일상은 자못 ‘은둔적’이다. 덕분에 ‘어쿠스틱 뮤지컬’의 신기원을 연 ‘바람이 불어오는 곳’의 주인공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요즘 ‘김광석 바람’이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그래서 그 바람을 우려하면서 성찰한다.
 “김광석이 더 유명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난한 뮤지션이 먹고살 수 있는 세상 만드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김광석 특수를 누리는 뮤지션’이란 말은 절대 듣고 싶지 않다. 그는 히든싱어 출연 제의를 거부했다. 김광석은 김광석이고, 박창근은 박창근이다.

김광석 뮤지컬로 유명해졌는데
뮤지컬로 나만의 음악 잠시 보류
유명해지는 데엔 별로 관심 없어

‘인간 김광석’은
철학적이면서 현실적인 뮤지션
음악적으로도 많은 이에 영향력

히든싱어 출연 거절은
‘김광석 특수를 누리는 가수’
‘모창가수’로 인식되기 싫어

김광석 신드롬에 대해
한산한 벽화길 북적대는 걸 보니
뮤지컬·방송 힘 크다는 걸 느껴
‘김광석 붐’으로만 끝나지 않고
가난한 가수들 신명이 나도록
소극장 공연 활성화로 이어져야

◆운동권 같지 않은 운동권 가수

김민기 정태춘 김광석 노찾사 안치환 한돌 시인과 촌장 산울림 들국화 사랑과 평화 등을 좋아했다. 특히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기존의 노래와 너무 달랐다.

박창근의 음색은 판소리 서편제 계열. 그는 늘 여성스러우면서도 강렬한 허스키를 원했다. ‘박학기류의 미성’이지만 그것도 싫었다. 집에서는 장남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길 원했다. 미술도 좋아했지만 아버지 때문에 건드리지 못했다. 아버지 사업이 망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음악은 비상을 한다. 투쟁 현장의 노래패와 맞물려 있었다. 그는 정서적으로 투쟁적이지 않고 좀 얌전하다. 되레 노찾사 노래가 좋다.

“투쟁가는 현실적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말이 더 추상적이었다. 선동적이고 군가적이었다. 뮤지션의 길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노래 중에 ‘이런 생각 한번 어때요’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나의 삶과 너의 삶이 맞물려 있고 인간의 불행 또한 다른 생명체의 불행을 먹고 살죠 진정한 평화를 원하세요 전쟁 없는 땅을 원하세요 주어진 만큼만 누리고 허락된 것만큼만 갖는 것…’ 미국의 반전 포크싱어인 밥 딜런처럼 반항적이면서도 미국 출신의 자연주의 학자인 스콧 니어링적인 삶을 동경한다.



◆뮤지컬과의 만남

2012년 11월 김광석을 위한 첫 뮤지컬이 대구에서 론칭된다.

이에 앞서 7년전 김광석을 위한 영화 ‘그날들’ 제작이 은밀하게 추진됐다. 현재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의 제작자이기도 한 이금구 LP스토리 대표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이 대표는 2005년 박창근의 제2집 음반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기회를’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는다. ‘김광석의 부활’이라고 믿었다. 박창근을 자기 영화의 주연배우로 발탁하려고 시나리오를 보냈다.

그런데 박창근에게는 그 시나리오가 별로였다.

“솔직히 무명가수가 영화판에 뛰어든다는 게 나 스스로도 인정이 되지 않았다. 단숨에 거부했다.”

이 대표가 그를 붙잡기 위해 삼고초려했다. 결국 영화 건은 무산된다. 대신 이 대표는 영화에서 뮤지컬 제작으로 급선회한다.

이 대표는 박창근에게 연기보다 노래에 치중토록 배려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렇게 해서 이금구 대표, 박창근, 홍보마케팅을 책임지는 문화기획자 권미강씨가 의기투합한다. 대구에서 총 44회 공연이 있었다. 이때 히든싱어에 출연해 인기를 얻은 뮤지컬 배우 최승열씨가 가세를 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소극장 뮤지컬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냉정한 평가가 내려졌다. 평론가와 관계자는 이 작품은 대구에서만 먹히지, 대형 뮤지컬이 득세하는 서울에선 먹히지 않을 거라고 전망했다. 박창근도 그렇게 생각했다. 김광석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고 믿었다.

서울 공연을 위해 작품을 새로 뜯어고쳤다.

지난해 3~7월 서울 대학로에 있는 아트센터K에서 올린 서울공연 시즌1은 모두 68회 공연이 됐고, 중반 이후 연일 매진 행진이었다. 잠시 대구로 내려와 영남대 천마아트센터에서 공연이 이어졌다. 이어 11월부터 올해 1월26일까지 서울 대학로 눈빛극장에서 시즌2(총 92회)가 올려졌다. 오는 24일 대구 중구 동성로 CT소극장에서 박창근의 뮤지컬 관련 토크쇼가 열린다.



-김광석 뮤지컬 때문에 몸값이 좀 올라갔겠다.

“솔직히 내가 유명해지든 안 유명해지든 별로 관심이 없다. 대신 뮤지컬 때문에 내 음악 생활이 잠시 보류가 되었다.”



-히든싱어에는 왜 출연을 하지 않았나.

“뮤지컬을 한창 하고 있는데 히든싱어 팀이 우리 쪽 제작자에게 김광석편을 만드니 주연배우를 좀 출연시켜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런데 제작진은 일차적으로 거부를 했다. 나름 인지도를 갖고 있는 ‘박창근’이 모창가수로 어필되면 나 자신은 물론 공연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될 거란 분석이 깔려 있었다. 나는 그렇게 정리되고 최승열은 개인적인 선택에 맡겨져 출연을 했다. 히든싱어가 대박을 치는 바람에 우리 뮤지컬도 대박이 났다.”



-김광석 신드롬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우리가 대구에서 처음 뮤지컬을 올렸을 때 공연장 바로 옆 김광석 벽화길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 벽화길을 만들었나 싶었다. 그런데 뮤지컬 세편이 동시에 뜨고, 히든싱어 김광석편까지 가세하자 한적하던 벽화길이 일순간 북적대기 시작했다. 김광석이 참 굉장하고 방송의 위력이 실로 대단하다는 걸 절감했다. 나는 군대 이등병 시절 김광석의 자살 소식을 접했다. 그의 노래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빠지지는 않았다. 뮤지컬 때문에 1년 이상 ‘이풍세’라는 인물에 빠져 살았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이풍세는 김광석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냥 김광석을 좋아하고 사모한 후배 가수다.”



-극 중에서 부른 김광석 대표곡은.

“김광석은 죽기까지 64곡 정도를 불렀던 것 같고 뮤지컬에선 모두 20곡을 불렀다. 서른 즈음에,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등 몇몇 히트곡은 자신이 작곡한 게 아니다. 김광석은 정말 리메이크 귀재인 것 같다.”



-김광석 붐이 음악적이 아니고 상업적으로 추락할 조짐도 보인다.

“뮤지컬과 관련해 여러 번 인터뷰했다. 난 그때마다 김광석에 초점을 두지 않았다. 소극장 공연문화, 통기타 문화 활성화에 집중하고 싶었다. 김광석은 어떤 면에서 기타 하나 들고 어떻게 냉정한 현실 속에서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와 해답을 동시에 준 가수라고 믿는다. 그는 정말 철학적인 뮤지션이다. 그러면서도 매우 현실적이다. 가수 한동준 박학기 등을 통해서 안 사실이지만 김광석은 당시 통기타 가수로는 가장 많은 개런티를 받았고, 그걸 잘 갈무리해서 30억원대의 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말 부럽고 경이롭다.”



-모두 김광석이 될 수 없는 것 같다.

“김광석이었기 때문에 잘 되었다고 본다. 음악적으로 많은 이에게 영향을 줬다. 내 수준이 관객에게 어필할 수 없는 수준이라면 도태되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언제나 그런 자세로 살고 있다. 음악에 올인하는 프로 못지않게 생계를 챙기면서 음악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 직장인 밴드 같은 존재가 어쩌면 우리보다 더 대단한 존재라고 본다.”



-김광석 마니아에게 하고 싶은 말은.

“김광석이 종착역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업 뮤지션이 종착역이어야 된다고 믿는다. 김광석 신드롬을 소극장·클럽의 라이브공연 활성화로 끌고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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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근은 대학시절 영남권 대학 축제판 주름잡아…동대구역 앞 등서 자선 거리공연도

영주에서 태어났다. 대구 영신고를 나와 대구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대학생 포크그룹 ‘우리 여기에’를 결성, 영남권 대학교 축제판 등을 주름잡는다. 1997년~2005년 주말이면 동대구역 앞 등에서 자선 버스킹(거리공연)에 나선다. 99년 1집 음반 ‘안티미토스’를 출시하지만 배신감 느낄 정도로 대구·경북에선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서울·인천에서 반응이 와서 생애 첫 초청 공연을 거기서 할 수 있었다. 2002년 록밴드 ‘가객’을 결성하고 밴드 1집 음반 ‘아야’를 낸다. 서울로 올라갔다가 2004년 대구로 내려온다. 2005년 2집 음반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기회를’은 그해 한국대중음악상 상반기 비평가추천 음반에 선정된다. EBS ‘공감’의 안치환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한다. 2011년 3집 음반 ‘무지개 내린 날개 위의 순간’을 낸다. 음반의 모든 곡은 그가 직접 작사·작곡을 했다. 지역에선 드물게 공연만으로 밥먹고 사는 뮤지션으로 자리 잡았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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