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위대한 열정을 찾아서' .1] 지조와 광기의 천재 매월당 김시습-부여 무량사

  • 류혜숙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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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2-28   |  발행일 2014-02-28 제38면   |  수정 2014-02-28
시대를 앞서간 고독한 천재 못다 핀 꿈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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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무량사 전경. 왼쪽부터 극락전, 석탑, 석등.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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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과 천왕문 사이 숲에 있는 매월당의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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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는 영정각. 극락전의 좌측에 위치하며 현판이 없다.


‘봄비가 계속 내리는 이월과 삼월에/ 병든 몸 선방에서 일으켜 앉는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묻고 싶으나/ 다른 중들이 거양(擧揚)할까 두려워하네.’ 매월당 김시습의 ‘무량사에서 병으로 누워’라는 시다. 시를 쓴 며칠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추위가 가시지 않은 봄날이었다.

◆오세 신동 김시습

“선생이 무량사에 처음 온 것이 49세 때라 합디다. 돌아가신 게 59세 때지요. 돌아가실 때 화장을 하지 마라 해서 가매장을 했는데, 3년 뒤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지요. 사람들은 선생이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불교식으로 화장을 했지요.” 얼굴이 단정한 무량사 매표소 아저씨가 조곤조곤 말씀하신다. 화장된 그의 몸에서는 사리가 나왔고, 부도를 세워 모셨다.

일주문에 닿기 전, 상가를 이루고 있는 사하촌 안쪽에 그의 부도탑이 있다. 무량사 부도군 가운데 그의 것이 가장 높다. 앞에는 작은 비석이 서 있는데 ‘오세김시습지묘’라 새겨져 있다. 오세, 다섯 살 신동을 뜻한다. 신라 알지왕의 후예인 왕자 김주원의 후손으로 태어난 김시습은 여덟 달 만에 스스로 능히 글을 안다 하여 ‘시습’이라 이름 지어졌다. 세 살에 시를 짓고 다섯 살엔 신동이란 소문이 자자해 세종의 부름을 받는다. 어린 김시습의 영특함에 감탄한 세종이 그를 ‘오세’라 불렀다.

김시습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곧이어 외할머니를 잃었다. 상실로 인한 그늘은 깊었다. 후처를 맞아들인 아버지에 대해 ‘부친이 계모를 얻으셔서 세상사가 어그러지고 각박해졌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17세 무렵에는 전남 송광사에 머물며 불법을 배웠고, 이후 첫 번째 결혼을 하지만 길지 못했다. 후사도 없었다.

◆지조와 광기의 자유인으로 살다

1452년 12세의 단종이 즉위했다. 김시습의 나이 21세, 과거공부를 위해 삼각산 중흥사에 있을 때다. 그해 계유정난이 일어났고, 1455년 6월 결국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권을 찬탈 당한다.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사흘 동안 문을 닫아걸고 크게 소리 내어 운다. 그리고 읽던 책을 불사르고 미친 듯 똥통에 빠진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방랑길에 올랐다. 법명은 설잠(雪岑)이었다.

단종을 추모하며, 살아 있으나 귀머거리인 체, 소경인 체, 방성통곡하며 초야에 묻혀 살았던 사람들.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과 함께 김시습은 생육신이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죽음을 당한 사육신의 시신을 하나하나 수습해 노량진에 묻은 이가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김시습은 이후 9년 동안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유관서록’ ‘유관동록’ ‘유호남록’ 등을 썼다.

31세 즈음 김시습은 경주의 금오산(남산) 용장사로 간다. 그는 금오산실에 칩거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 소설인 ‘금오신화’를 썼다. 그 시절의 당호가 은일과 은둔의 상징인 매월당이다. 세조 이후 세상이 바뀌자 그는 세상으로 나갈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481년 봄 김시습은 돌연 머리를 기르고 환속했다. 이때 김시습은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후사도 없었다. 그리고 폐비 윤씨 사건과 함께 그의 방랑이 다시 시작된다.

‘그림자는 돌아다봤자 외로울 따름이고/ 갈림길에서 눈물을 흘렸던 것은 길이 막혔던 탓이고/ 삶이란 그날그날 주어지는 것이었고/ 살아생전의 희로애락은 물결 같은 것이었노라.’ 생애 동안 지녔던 설잠 청한자 동봉 벽산청은 췌세옹 매월당이라는 법명과 호는 그 자신이었고 또한 그림자였다.

◆꿈꾸다 죽은 늙은이

무량사는 부여의 외산면과 보령의 미산면 사이에 걸쳐있는 만수산 자락에 자리한다. 만수(萬壽)나 무량(無量)은 헤아릴 수 없는 세계, 서방 극락정토를 말한다. 신라 말에 범일국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때 크게 융성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인조 때 재건되었다. 무량사는 유리처럼 정갈하다. 극락전은 장엄하고 석탑은 강건하며 석등은 도도하다.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등 굽은 반송이 서늘하다. 경내 구석의 산신각 자리가 김시습이 머물던 토굴이었다고 전해진다.

영정각에는 김시습의 초상이 걸려 있다. 미간에 주름이 졌고 시선 둔 곳은 알 수 없다. 그는 유교의 시대 누구보다도 명민한 유학자였고 동시에 불교인이자 승려였다. 유불선을 넘나든 사상가였고, 자유로운 문장가였다. 현실에 주목했으며 늘 노동을 중시했다. 시대와 불화한 지식인이었고 좌절한 천재였으며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크게 소리 내어 우는 일이 많았다 한다.

‘나 죽은 뒤 내 무덤에 표할 적에/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준다면/ 나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할 것이니/ 품은 뜻을 천년 뒤에 알아주리.’ ‘아생’이라는 시의 뒤 구절이다. 그는 다섯 살 어린애처럼 고집불통의 자유인이었고, 평생이 그러했으며, 마침내까지 꿈꾸다 죽은 늙은이였다. 그가 무량사에서 죽은 지 6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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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을 지나 회덕 분기점에서 공주 방향으로 간다. 서공주 분기점에서 서천 공주 고속도를 따라가다 서부여IC에 내려 보령 대천해수욕장 방향으로 간다. 외산면 소재지에서 무량사 이정표를 따르면 된다. 무량사 매표소에 닿기 전 무진암 쪽으로 좌회전해 조금 들어가면 무량사 부도밭이 있다. 입장료는 어른 2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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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사 부도군. 가장 큰 것이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탑이다. 앞의 비석에는 ‘오세김시습지묘’라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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