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과 둔마리 벽화고분

  • 류혜숙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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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4-04   |  발행일 2014-04-04 제38면   |  수정 2014-04-04
천년이 넘도록 홀로 서있는 돌부처 체념과 달관의 마음을 읽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과 둔마리 벽화고분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 노혜마을에 있는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377호로 지정되어 있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과 둔마리 벽화고분
둔마리 벽화고분.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존을 위해 내부는 폐쇄되어 있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과 둔마리 벽화고분
금귀봉 능선을 바라보며 둔마리 벽화 고분 가는 길.

마을 가운데 누에 모양의 낮은 산이 길게 뻗어있다. 좁은 마을길이 굼실굼실 올라 누에의 등을 타면 제법 멀리 시야가 훤하다. 거창읍의 동쪽 가장자리에 자리한 양평리 노혜마을. 옛날 이곳에는 노혜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주춧돌과 석등의 부재만이 남은 절터에 키 우뚝한 부처님 한 분이 서 계신다. 석조여래입상이다. 통일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천년 넘게 서 계셨다. 언뜻 오래 절터를 지키다 바위가 된 큰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갓 쓰고 선 돌부처님

나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했다. 뭘까, 이 아우라는. 묵묵하고 비장하다. 큰 키와 높고 먼 시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쓸쓸하고 처연하다. 좁은 어깨와 흐르는 듯한 여린 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얼굴은 둥글다. 눈은 반쯤 뜨고 입술은 미소를 머금은 듯하며 눈썹에서 코로 이어지는 음영이 또렷하다. 일각에 떠오르는 자비로운 표정이라고는 하지 못하겠다. 어찌 보면 여성 같고 어찌 보면 남성 같고, 근엄한 것도 같고 슬픈 것도 같다. 체념조차 체념해 득도한 것 같다 할까.

양평리 석조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보물 377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상의 높이는 전체 4m가 넘는다. 타원형으로 번지는 허벅지의 옷 주름과 차랑하게 떨어지는 옷자락은 다소 도식화된 경향을 보이지만 얇고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인 신체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연꽃 대좌는 원래 제 것이 아닌 듯 약간 부자연스럽다. 머리 위의 둥근 갓은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뒷날 어느 땐가 보태어진 것이라 한다. 부처님 앞에 말끔한 매트가 놓여 있다. 누군가 온몸을 조아려 기원했을 이 자리에 온기가 남아 있다.

수인은 생소한 것이다. 오른팔은 아래로 늘어뜨려 옷자락을 잡고 있고, 왼팔은 가슴께로 들어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집게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금룡사가 있다. 민가처럼 보이는데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작은 절집이다. 그 아래로는 노혜마을이다. 부처님의 손가락은 금룡사를 통과해 마을로 향한다.

부처님이 서 계신 주변 부지는 그리 넓은 편이 아니다. 누에 등이 넓으면 얼마나 넓겠나. 지금은 누에 등 구부러진 자리에 낮은 석축을 돋우어 평평하게 단장해 놓았고, 낙엽수와 꽃나무가 적당히 그늘을 드리우며 서있다. 아주 청초한 정취다. 이곳에 있었다는 노혜사는 단출하고 순정한 절집이 아니었을까. 마을 사람들의 가까운 이웃 같은 절집이 아니었을까. 사라진 절터에 노스님만이 오래 남아 어느 날 돌부처가 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뜨거운 태양과 차가운 빗물이 서러웠던 착한 누군가가 갓을 씌워 드린 것은 아닐까. 그렇게 대좌를 받쳐 드렸던 것은 아닐까. 부처님은 언제나 말이 없으셨지.

◆둔마리 대촌마을의 벽화 고분

사과꽃 필 즈음이나 사과 붉어질 무렵이면 좋겠다. 주변이 온통 사과밭이니. 대촌마을에 차를 세워두고 걷는다. 동네 아주머니께서 오래 쳐다보신다. ‘여기는 웬 일인겨’ 하는 듯한 표정이다. 고샅길 그늘에 바짝 움츠리고 앉아 양말 깁던 아저씨도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신다. 표정의 의미를 고분에 도착하고서야 알게 된다. 500m가 넘는 휑한 고갯길, 그늘 없는 적막 산을 터덜터덜 걸어 고갯마루를 하나 넘으면 저 앞에 커다란 주차장이 보인다. 예까지 차가 올 수 있었던 게다.

주차장에서 둔마리 고분이 보인다. 거창 금귀봉이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 꼭 하나의 무덤만이 들어설 수 있는 좁은 산등성에 고분은 자리한다. 양쪽으로는 급경사의 계곡이 깊어 성곽길처럼 다져놓은 산길을 휘어 돌고 무지개다리를 건너야 고분에 닿는다.

고분은 고려시대의 것이라 한다.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방 호족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특히 벽화가 있는 귀한 옛무덤이다. 고분이 발견된 것은 1971년이다. 무덤이 붕괴되면서 돌방과 벽화가 드러나 학계를 놀라게 했는데 이미 무덤은 도굴되어 일부가 파손된 상태였고 무덤 주인의 인골 몇 편을 제외하고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고 한다.

무덤은 이중의 벽으로 된 돌방무덤으로 2개의 방이 있다. 서쪽 돌방에는 1개의 나무관이 있었고 벽에는 여자 2명, 남자 1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동쪽 돌방은 비어 있는데 악기를 연주하는 6명의 선녀와 희미한 글자가 있다고 한다. 무속과 불교와 도교가 뒤섞인 토속적이고 현실적인 벽화로 도교적인 색채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흑색과 갈색, 녹색으로 형상화된 천녀들, 자유로운 붓놀림으로 생기 있게 부유하는 천녀들은 아주 잠시 현대의 공기 속을 날다 다시 묻혔다. 지금 고분은 보존을 위해 폐쇄되어있고 벽화는 거창 박물관에 재현되어 있다. 봉분과 석상만이 덩그러니 남은 벽화고분 앞에서 황망하고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88고속도로를 타고 거창IC로 나간다. 거창읍에서 김천으로 가는 1089번 도로로 가다 개봉네거리에서 가조방향 1084번 지방도를 따라간다. 황강 건너 조금 가면 오른쪽이 노혜마을 입구다. 여기서 계속 가조 방향으로 가면 살피재를 넘어 왼쪽에 둔마리 벽화고분 이정표가 있다. 둔마리 대촌마을에 주차하고 걸으면 500m 이상 거리. 고분 들입까지 자동차가 갈 수 있으나 길이 좀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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