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대결] 런치박스·가시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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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4-11   |  발행일 2014-04-11 제42면   |  수정 2014-04-11

런치박스 (장르:드라마 등급:12세 관람가)
잘못 배달된 도시락, 두 남녀의 진솔한 소통 이끌다

20140411

인도 뭄바이에 살고 있는 회계사 사잔(이르판 칸)은 곧 은퇴를 앞두고 있다. 35년간 한 직장에 몸담으며 성실하게 살아왔던 그는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낸 후 삶의 활력을 잃었다. 직장에서의 일상적인 대화는 물론, 점심식사 시간에도 그는 늘 혼자다. 무엇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집과 회사를 반복하는 기계적인 삶에 이젠 지쳤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일이 생겼다. 그날 따라 맛과 정성이 듬뿍 담긴 도시락이 배달된 것. 배달 사고였지만 도시락 주인 일라(님랏 카우르)는 자신의 도시락을 개끗이 비워준 그에게 감동을 받고 도시락에 편지까지 넣어 보낸다. “제 남편을 위해 만든 음식이었지만 맛있게 먹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시작한 도시락 편지 왕래는 차츰 두 사람에게 즐거운 일과가 되어간다.

‘런치박스’는 도시락을 매개로 새로운 삶과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두 남녀의 진솔한 이야기를 따라간다. 일단 이 영화가 소재로 삼고 있는 ‘도시락 배달’이라는 인도만의 독특한 문화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인도에서는 도시락 배달부를 ‘다바왈라’라고 부른다. 주부가 손수 만든 음식을 남편의 직장까지 배달해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뭄바이에서만 하루 평균 15만개의 도시락이 배달되지만 배달 사고는 백만 건 중 한 번꼴이라고 한다. ‘런치박스’는 바로 그 마법같은 순간을 포착한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편지라는 다소 구시대적이고 진부한 소재를 그들의 문화에 녹여내 인도사회의 구체적인 삶을 생동감 있게 살려냈다는 점이다. 카메라의 초점은 친구 하나 없이 오랫동안 외롭게 살아온 사잔과 남편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일라의 모습에 맞춰진다. 두 사람은 극 중 한번도 마주친 적 없이 오로지 편지로만 소통한다. 이는 아직도 엄혹한 신분제도가 존재하는 인도를 우회적으로 상징한다. 게다가 일라가 사는 칸디빌리는 보수적인 중류 계급 힌두교인 거주지다. 사잔은 기독교인들이 거주해 온 반드라의 랑바르 빌리지에 산다. 따라서 도시락이 잘못 배달된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평생 대화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인도의 신예 감독 리테쉬 바트라는 이 점에 주목했다. “잘못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가 줄 수 있다”는 극 중 대사처럼 희망은 가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는 점을 말이다. 뭄바이에서 자란 감독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지만 추억을 공유하는 방식이 비슷한 두 사람을 통해 1980년대를 새롭게 환기시킨다. 빛바랜 당시의 흑백 TV 드라마, 오래된 이란 카페를 좋아하는 사잔과 일라는 그 점에서 현재보다는 과거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두 사람이 과거와의 감성적인 소통을 하고 있다면, 사잔의 젊은 후임 셰이크(나와주딘 시디퀴)는 인도의 현재를 보여준다. “요즘은 대부분 e메일을 쓴다”며 편지를 읽고 있는 사잔을 신기하게 바라본 셰이크는 끊임없는 자기긍정과 삶의 통찰을 지닌 인물. 결혼을 전제로 연인과 동거 중이지만 고아에 키도 작고 얼굴색도 검은 그를 신부측 부모는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셰이크는 결혼에 성공한다. 이는 문화적 장벽을 넘어 조건보다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요즘 젊은이의 가치관과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화는 시종 무겁지 않은 진지함과 유쾌함으로 삶의 활력을 찾아가는 두 주인공을 성공적으로 담아냈다. 무엇보다 음식을 소재로 시작해 점차 인생과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외연을 넓혀 가는 독특한 문법의 영화적 만듦새는 정갈하고 깔끔하다. 리테쉬 바트라 감독 스스로도 “이 영화는 내가 만들어보지 못한 좋은 영화”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극 후반부, 사잔과의 만남을 원했던 일라는 약속장소에 나타(났지만 사잔은 그녀를 먼발치에서만 바라봤다)나지 않은 그에게 실망한다. 하지만 사잔은 ‘어제의 로또를 사는 사람은 없다. 당신은 젊다. 꿈을 꿀 수 있는 충분한 나이’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그녀가 보낸 빈 도시락에 보내고 뭄바이를 떠난다. 흥분되고 가슴 뛰는 두 사람의 조우는 없었지만 대신 영원한 추억거리는 남아있게 된 셈이다. ‘런치박스’는 그런 여운을 남기는 영화다.


가시 (장르:서스펜스·멜로 등급:청소년 관람불가)
가시가 상처를 주듯…집착이 부른 치명적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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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고 체육교사 준기(장혁)는 자신에게 거침없이 달려드는 영은(조보아)의 도발적 행동이 당황스럽다. 애교를 넘어 집착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그녀의 행동이 도를 넘어갈수록 준기 역시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대기업 회장의 숨겨놓은 딸 영은은 어려서부터 혼자 외롭게 자라왔다. 그런 그녀에게 학교에 갓 부임한 잘생긴 체육교사 준기는 영은의 로망이 되기에 충분하다. 영은은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수영시간에는 일부러 제일 높은 다이빙대에서 뛰어들어 모두를 놀라게 하고, 피구시합 중에는 그가 던진 거친 공을 받아 상처를 입는다. 역시 준기는 그녀가 생각한 대로다. 물에 빠진 자신을 멋지게 구조하는 남자다운 모습은 물론, 피구시합 중에 다친 상처를 양호실에서 직접 치료해주는 다정한 그의 모습에 영은은 흠뻑 빠져든다.

준기 역시 영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 출산을 앞둔 아내와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준기는 아직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지 못한 상태.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와 교사직도 처가 덕에 마련했다. 이처럼 삶의 무력감에 빠져있던 준기에게 영은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슴 떨리는 설렘이자, 신선한 자극이 됐다. 그런 두 사람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날, 텅빈 교정에 우연히 남게 된 두 사람은 자연스러운 접촉을 가지게 된다. 이제껏 본능적인 욕망을 힘들게 통제하던 준기는 순간 영은의 유혹에 넘어간다. 이 일을 계기로 영은은 준기의 삶에 깊이 파고 든다.

‘가시’는 언뜻 유부남 교사와 여제자라는 사회적 통념을 벗어난 아슬아슬한 관계에 주목한 듯 보인다. 하지만 본능이 이성을 지배하게 되는 중반 이후 영화는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스릴러물의 수순을 밟아간다. 순수하고 맹목적 집착이 낳은 치명적 사랑이다. 장미는 아름답지만 가시는 상처를 준다. 잠시 흔들렸고, 그 대가로 따끔한 맛을 본 준기는 이내 이성을 되찾고 영은과 거리를 두려한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모든 것을 걸고 달려드는 영은의 불완전한 사랑이 점차 광기 어린 집착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 타협이라는 접점도 존재하기 어렵게 됐다. ‘가시’는 이 과정에서 기존 스릴러물의 익숙한 구조와 형식을 차용한다. 이를 위해 준기의 아내 서연(선우선)을 부각시킨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서연은 우유부단한 남편을 대신해 영은과 맞선다. 서연은 처음 준기를 향한 영은의 감정을 학창시절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는 선생님을 향한 치기어린 동경으로 여겼다. 그렇게 마냥 귀엽게 보았지만 점차 노골적으로 변하는 영은의 도발에 그녀는 위협을 느낀다. 준기의 눈길이 닿는 사람 모두를 장애물로 여기는 영은에게 준기의 아내 서연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오히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장애물인 셈. 이들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극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태균 감독은 ‘가시’를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공포가 공존하는 다양한 감정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그 중심에 사랑이 있지만, 사랑의 감정은 늘 완전하지 못하고, 시각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그의 의지를 견지해 나갔다. 따뜻한 것도 과하면 뜨거워지듯이 사랑도 과하면 집착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잔혹한 집착이 주는 섬뜩함과 가슴 시린 애잔함을 동시에 포용한 ‘가시’는 그 점에서 익숙하지만 흥미로운 영화다. 다만 스릴러라는 장르적 매력을 살리기 위해선 좀 더 깊고 치밀하게 접근했어야 했다. 관객의 판타지를 충족시킬 만한 과감한 연출과 카메라 워킹도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이왕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염두에 두었다면 말이다. 단, 신예 조보아의 팜므파탈 연기는 인상적이다. 장혁을 압도하는 오묘한 눈빛과 밀도 높은 내면연기는 그녀의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든다.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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