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대구 교육청 공동기획] 당신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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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4-14 08:18  |  수정 2014-04-14 08:18  |  발행일 2014-04-14 제16면
[영남일보-대구 교육청 공동기획] 당신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새내기 2년차 시절 담임을 맡았던 진우(가명)는 유난히 새카만 눈에 긴 속눈썹을 가진 남학생이었다. 타 지방에서 일을 했던 진우의 아버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아이를 맡긴 채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만 진우를 만나러 대구에 오곤 했다.

그래서인지 평소 질문 많기로 유명한 진우였지만 수업 중에 가족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유독 말수가 줄어 마음을 헛헛하게 만들었다. 아직 어린 탓에 숙제할 교과서를 교실에 두고 가거나 준비물이 하나씩 비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진우의 준비물이나 숙제 도우미는 자연스럽게 내 차지가 되었고, 가끔씩 진우를 데리러 오는 할머니는 항상 내 손을 잡고 감사하다는 말을 연거푸 하셨다.

운동회 날. 그간 열심히 연습했던 꼭두각시 공연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으러 교실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손등에 찍힌 도장을 눈앞에 내밀며 달리기 등수를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등수대로 예쁜 공책을 두 손 가득 받은 아이들은 저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치열했던 경기 장면을 설명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 진우 할머니가 손에 검은 봉지를 든 채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할머니는 “오늘 많이 힘드셨죠? 별거 아니지만 이거 마시고 힘내세요”라고 하시며 주름 잡힌 손을 내미셨다. 당연히 음료수가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덥석 검정 비닐봉지를 받아들었다. 나중에 열어 본 비닐봉지 안에는 음료수 세 병과 한 귀퉁이에 하얀 봉투가 있었다. 봉투 속에는 꼬깃꼬깃 접었다 편 만원짜리 세 장이 들어 있었다. 아마 할머님의 옷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비상금이었을 것이다. 봉투 겉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생님, 흑 먼지도 날리는데 운동회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어요. 목욕비 하세요’

군데군데 글씨도 틀리고, 삐뚤빼뚤 휘어진 할머님의 편지였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따뜻함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돌려드리는 게 당연한데, 돌려드리면 괜히 할머님의 마음이 상하실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방법으로 돌려드려야 할지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이렇게 무겁고 복잡한 마음으로는 아이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없으니 차라리 돌려드리자는 결론을 내렸다. 예쁜 양말을 두 켤레 사 정성스럽게 포장을 한 뒤,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진우 할머님, 음료수가 정말 시원했습니다. 그리고 감동스러운 편지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목욕비는 다시 돌려드립니다. 목욕비치곤 너무 비싸서 열 번도 더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돈으로 진우가 보고 싶어 하는 책을 사주시면 제 마음이 더 기쁠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진우를 불러 “선생님이 할머니께 드리는 선물이니까 할머니 혼자 풀어보시라고 말씀드리렴” 하고 진우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다음 날, 진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시래요. 그런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답했다. “진우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선생님이 갑자기 힘이 불끈 솟는걸. 진우도 할머니도 선생님에게 참 좋은 사람들이란다.”
박선지 <대구 시지초등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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