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북 봉화 고택 기행

  • 류혜숙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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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4-18   |  발행일 2014-04-18 제38면   |  수정 2014-04-18
절개와 의리 속으로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북 봉화 고택 기행
닭실마을의 청암정. 충재 권벌이 1526년에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지은 것이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북 봉화 고택 기행
바래미마을의 만회고택. 3·1운동 직후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 청원서가 이 집에서 작성되었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북 봉화 고택 기행
야옹 선생이 만들었다는 연못 너머 왼쪽이 야옹정, 솟을대문의 지붕에 가려진 쪽이 옥천전씨 종가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북 봉화 고택 기행
구천리 구산서당. 옆에는 서당의 부속 건물인 까치구멍집도 있다.

오지. 도로가 나고 기차가 달려도, 언제나 봉화를 수식하는 말이다. 인구밀도가 전국에서 가장 낮은 곳도 봉화를 가리킨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그러했다는데, 그럼에도 선비의 수는 가장 많았다 한다. 전국의 정자는 760여개, 그중 봉화에 자리하는 103개의 정자가 그것을 방증한다. 봉화 선비의 주체성은 절개와 의리로 표현된다. 오지의 자성(資性)은 청정이다. 땅과 사람은 닮아 있다.

◆유곡리 닭실마을 청암정

이곳 사람들은 안동에 퇴계 이황이 있고 영주에 삼봉 정도전이 있다면 봉화에는 충재 권벌이 있다고 말한다. 우직하고 충직한 직신으로 기억되는 영남의 사림, 충재 권벌. 그는 중종 때의 문신으로 예조참판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옳다고 생각한 것을 말함에 거침이 없었던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두 번의 사화를 겪었고 두 번 모두 파직을 당했다. 1519년 기묘사화가 그 첫 번째다. 그로 인해 그는 낙향하여 10년 이상 칩거했는데, 그가 자리 잡은 곳이 어머니의 산소가 있는 유곡리 닭실마을이다.

문수산 자락 끝에 자리한 닭실마을은 금빛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권벌의 5대조 때 터를 잡았고, 선생 이후 번창한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500년 가까이 지켜온 종가에는 지금도 그의 후손이 살고 있다. 종가 옆에는 1526년 봄에 선생이 독서당으로 지은 ‘충재’와 거북처럼 생긴 바위에 올려 지은 ‘청암정’이 있다. 정자에는 매암 조식이 쓴 ‘청암정’ 현판과 미수 허목이 쓴 ‘청암수석’ 현판이 걸려 있다. 허목은 청암정을 참으로 보고 싶어 했다는데 결국 보지 못한 채 죽기 사흘 전 저 현판을 썼다 한다. 그토록 아름다운 청암정은, 바위는 정자를 돋우고 연못은 바위에 숨을 불어넣으며 수목은 연못을 옹위하고 있다.

담으로 둘러진 하나의 공간 안에 독서당과 청암정이 함께 자리한다. 처음 이 공간으로 들어서면 독서당은 그다지 주목되지 않는다. 다만 작은 옆 모습만이 보인다. 정자에 오르면 그제야 낮은 자리에 꼿꼿하게 앉은 독서당 ‘충재’가 정면으로 육박한다. 절제되고 고집스러운 세 칸 기와집이다. 충재 선생은 13년 뒤 복직되어 1545년 우찬성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바로 그해,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선생은 다시 파직되었고,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삭주로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마을의 들머리 길, 개나리가 핀 기찻길 가에 서면 닭실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남의 4대 길지 중 하나라는 땅이다. 일본이 봉화의 춘양목을 수탈하기 위해 철길을 놓을 때, 그들은 곧은길 대신 마을 앞을 휘돌아나가는 길을 택했다. 지네의 형상을 한 철길로 닭실마을의 정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그 힘의 결과는 알지 못하나 땅이 품고 있는 기억은 오늘로 이어진다. 자신이 세운 뜻과 가치에 흔들림이 없었던 옛 정치가의 정신에 대한 기억.

◆바다 밑의 마을, 해저리 바래미마을

도로를 달리던 몸이 쓰윽 하강한다. 오랜 옛날 바다였다는 마을, 해저1리 바래미마을로의 진입이다. 이곳은 조선 숙종 때 관찰사를 지낸 팔오헌 김성구 선생이 들어온 이후 의성김씨 집성촌으로 번성했다. 특히 이 마을은 독립유공자를 14명이나 배출한 애국 투사들의 마을이자 독립운동의 역사 마을로 이름 높다.

마을의 중앙에는 팔오헌 선생이 강학하던 학록서당이 자리한다. 그 왼쪽에 도로와 마주보는 쪽을 아랫마을, 오른쪽을 윗마을이라 부른다. 아랫마을에는 남호구택과 영규헌, 개암종택 등이 있다. 남호구택은 일제 때 남호 김뢰식 선생이 살던 곳이다. 명망 높은 부호였던 선생은 전 재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으로 보냈다.

윗마을에는 조선 순조 때의 문신인 만회 김건수 선생이 살았던 만회고택이 있다. 1919년 3·1운동 직후 만회고택에는 심산 김창숙 선생을 중심으로 한 유림이 모였다. 그리고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가 바로 이 집에서 작성되었다. 또한 1925년 2차 유림단의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논의한 곳도 이 집이다. 최근에는 독립투사들이 주고받은 편지 500여통이 발견되기도 했다.

유림단 사건이 발각되면서 모금에 앞장선 바래미마을 사람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고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지금 마을은 너무나 고요하다. 곧고 정제된 골목길이 고요를 한없게 한다. 바다 깊은 곳에서 진동하는 화산 같은 고요다.

◆대를 이은 절의, 구천리 야옹정

휴계 전의철.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절의신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손들에게 아주 모질고 완고한 유언을 남겼다. 벼슬하지 말 것, 매년 단종의 능인 장릉을 찾아 참배할 것. 이러한 유훈을 받든 이가 그의 손자인 야옹 전응방 선생이다.

구천리의 야트막한 산 아래 야옹정이 서있다. 정자 앞에는 야옹 선생이 만들었다는 연못이 있다. 수리 보수하여 원형은 잃었다 한다. 정자의 편액은 퇴계 이황의 친필이다. 야옹 선생은 이곳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퇴계 선생과 교류하며 지냈다 한다. 벼슬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매년 단종의 능을 찾아 도포자락에 흙을 담아 능 위에 뿌리며 참배했다고 한다. 대를 이어 절의를 지킨 야인의 삶. 스스로 당연한 삶이었을 것이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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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고택과 정자는 하루 만에 모두 볼 수 없다. 닭실마을, 바래미마을, 야옹정은 영주나 안동에서 봉화읍으로 향할 때 가장 쉽고 짧은 동선을 그리는 하루 코스다. 시간이 된다면 바래미마을 근처의 구만서원이나 닭실마을 근처의 석천계곡과 석천정사도 들러볼 수 있다. 야옹정과 나란히 자리한 옥천전씨 종택도 볼 만하고,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겨’로 저명한 고(故) 전우익 선생의 생가도 야옹정 뒤에 있다. 쇠락했으나 의미는 있을 것이다. 또 구천리 마을 입구 언덕에 자리한 구산서당과 그 부속건물인 까치구멍집도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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