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축구역사 산증인 이주녕옹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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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6-06   |  발행일 2014-06-06 제34면   |  수정 2014-06-06
“40년대 계성중 다닐 때 축구시합 마치면 신명학교 여학생 30여명이 집앞에서 날 보려고 진을 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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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남구 이천로에 살고 있는 이주녕씨가 축구공을 든 채 활짝 웃고 있다.

“1940년대 계성중학교에 다닐 때 축구 경기를 마치고 집에 오면 ‘아오끼’ ‘아오끼’하면서 신명학교 여학생 30~40명이 늘 우리 집 앞에서 나를 보려고 기다렸지요. 그때만 해도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허허허.”

이주녕씨(86)는 대구·경북 축구계의 산증인이자 불세출의 축구스타다.

“팬들이 줄줄 따라다니는 바람에 길에도 제대로 못 다녔어요. 축구장 골대 뒤에도 관중석에 몰려와 내가 공을 잡는 것을 보고 아우성을 지르곤 했어요.”

1928년 대구에서 출생한 이주녕씨는 희도학교를 거쳐 계성중, 대구대를 나왔다. 그는 어릴 때부터 축구신동이었다. 축구뿐만 아니라 모든 운동에 타고난 소질이 있었다. 연식정구 선수로 국가대표 선수와 결승전을 치르기도 했고, 야구선수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가 축구공을 처음 찬 때는 광복이 되던 1945년이었다. 당시 그의 포지션은 골키퍼. 계성중학교(5년제) 3학년이던 그는 그해 12월 계성중, 경북중, 대륜중, 대구상업학교, 대구농림학교, 대구공고 등 6개 팀과 김천중, 안동중 등 총 8개팀이 참가한 가운데 계성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중등부축구대회에서 다른 팀에게 한 골도 주지 않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대륜, 능인, 포항, 김천 등 총 10개팀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3·1절기념축대회에서도 9전9승 무실점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총 20경기가 열린 가운데 한 점도 내주지 않은 건 기적이었지만, 그만큼 그의 실력이 뛰어났다는 걸 입증했다. 경기의 최고 수훈갑은 단연 그의 몫이었다. 그야말로 당시 그는 한국의 ‘야신’이었다.

그는 계성학교를 졸업하던 19살 때 체육특기생으로 대구대학교 법문학부에 입학했다. 이어 대구축구팀 대표로 활약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서울에서 전국축구대회가 열렸다. 결승까지 파죽지세로 올라간 대구팀은 결승서 군산팀과 격돌했다. 하지만 상대팀 선수의 강한 태클로 허리를 다친 사이 골인이 돼버렸다. 그는 경기장 밖으로 실려 나가고 골인유무로 실랑이를 벌이다 일몰이 돼 다음날 결승전이 열렸다. 그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이 경기서 대구팀은 9-1로 승리를 거둬 우승을 했다. 그의 명성은 전설이 됐다.

하지만 축구선수로서의 성공은 6·25전쟁으로 꿈을 접어야 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트럼펫을 분 덕택에 국방부군악대에 입대해 종군했다. 이후 국방부조사대를 거쳐 전역했다. 그는 52년 대구대학교를 졸업하고 성주 성광중, 능인중, 신명여고에서 16년간 음악교사로 교직생활을 했다. 6남매의 장남이었던 그는 대구시 남구 이천동 옛 일본군 관사에 살면서 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게다가 4남매를 둔 가장으로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다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그는 대구시내에서 빅토리아 음악 감상실을 경영했다. 처음 음악 감상실은 사람들이 터져나갈 듯 많았으나 노래방, 비디오방 등이 생기면서 결국 97년에 문을 닫았다. 그간 부인은 보따리장사를 하면서 자녀를 키웠다. 생계가 힘들어지자 10년간 대구시내 레스토랑에서 청소부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음악 감상실을 경영할 때 경북축구협회 전무 겸 실무부회장을 맡았다. 당시 대구 최초로 축구 사진전을 개최하는 등 68차례나 이웃돕기행사를 벌여 수익금을 전액 기부했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틈틈이 축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대구·경북축구 80년사와 100년사를 자비로 발간했다. 또한 지역의 신문과 방송 등 언론을 통해 축구평론가로 활약했다. 이 밖에 81년 영호남친선축구대회, 직장인대항 달구벌축구대회의 산파역할을 했다.

지난달 30일, 기자가 그의 집을 찾았을 때도 그는 브라질 월드컵 대비 국가대표 평가전(대 튀니지)을 분석하고 있었다.

“튀니지가 알제리보다 못하는데도 우리가 튀니지한테 1-0으로 졌으니 16강이 걱정이에요.”

노 축구인의 축구사랑은 소년 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듯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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