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기도 여주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 류혜숙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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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7-04   |  발행일 2014-07-04 제38면   |  수정 2014-07-04
여기, 고해의 삶 살다간 두 여인의(명성황후·인현왕후) 혼 어려있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기도 여주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감고당. 명성황후가 간택 전까지 머물던 곳이며 폐위된 인현왕후가 5년 동안 유배된 곳이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기도 여주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감고당 안채. 명성황후가 8세 때부터 왕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머물렀고, 인현왕후가 왕비에서 물러난 후 거처한 곳이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기도 여주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명성황후 기념관 중정에 있는 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기도 여주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명성황후 생가와 을미사변으로 순국한 황후의 넋을 기리는 숭모비.


경기도 여주읍 능현리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가 있다. 그의 5대손인 민치록은 민유중의 묘 아래 묘막에서 살다 딸을 얻었다. 1851년 음력 9월25일, 이름은 자영이라 했다. 자영은 9세 무렵 아버지를 잃을 때까지 묘막의 별당에서 글공부를 하며 살았다. 총명한 아이였다고 한다. 그녀가 훗날 일본 낭인에 의해 살해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다.

◆명성황후가 태어난 집

여주의 한가운데 남한강이 흐른다. 강은 한양으로의 접근을 쉽게 했고, 풍부한 물자를 실어다 주었으며, 평야를 기름지게 했다. 이 땅에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총 9명의 왕비가 배출되었고 세종대왕과 효종이 잠들어 있다. 여주는 참으로 왕가의 땅이라 할 만하다.

명성황후가 태어난 묘막은 숙종 13년인 1687년 세워졌다. 이후 쇠락하여 안채만 남아 있었으나 1995년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 등을 복원했다. 별당 옆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비’가 있다.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는 뜻이다. 비의 뒷면에는 ‘광무 8년 갑진 오월 어느 날 손을 들어 맞잡고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경건히 쓰다’라고 새겨져 있다. 고종의 친필이라고 전하나 글의 내용과 글씨체로 보아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이 쓴 것으로 추측된다.

부지는 넓고 생가 주변으로 연못과 정자 등이 조성되어 있다. 유적지 입구에는 하마비가, 명성황후탄강구리비 옆에는 민유중의 신도비가, 생가의 앞쪽에는 을미사변으로 순국한 황후의 넋을 기리는 숭모비와 추모비가 서있다. 추모비에는 김남조 시인의 글이 새겨져 있다. “황후시여 이 나라 유구한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통분이며 치욕이 바로 이 일이나이다.”

민치록 일가가 언제까지 여주에서 살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민치록은 서울 안국동에 있었던 감고당에서 철종 9년인 1858년 9월에 사망했다. 때문에 명성황후는 7~8세까지 여기에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통분과 치욕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 아버지를 잃기 전, 황후의 인생에서 가장 맑은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가 안채에는 명성황후의 어진이 모셔져 있다. 동강 권오창 화백의 그림이다. 사진이 없기에 전해져 온 묘사로 추사한 것이다. 영국의 여행작가 이사벨라 비숍은 명성황후를 이렇게 묘사했다. ‘윤기 나는 새카만 머리와 흰 피부를 가졌고 몸매가 호리호리한 잘생긴 부인이었다.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으며 재기가 뛰어난 지성적인 인상을 주었다.’

일본 구마모토현에는 교사들로 구성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이 있다. 2004년 발족한 모임은 2005년부터 매년 10월 명성황후의 추모일마다 이곳을 찾아 황후의 어진 앞에 몸을 굽힌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선조들을 대신해 사죄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다.

◆두 여자의 방, 감고당(感古堂)

유적지의 입구 쪽에 키 큰 소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감고당이 자리한다. 감고당은 숙종이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1761년 영조는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 편액을 내렸고 이후 감고당이라 불려졌다. 원래는 서울 안국동에 있던 것을 명성황후 생가 터 복원과 함께 여주로 옮겨왔다.

인현왕후가 희빈장씨의 모함으로 폐위된 후 5년간 유폐되어 있던 곳이 감고당이다. 민치록이 감고당에서 사망한 후 자영은 고종의 비로 책봉될 때까지 감고당에서 살았다. 감고(感古)가 감고(堪苦)로 읽힌다. 때와 연유는 달랐지만 두 여인이 살았던 방에는 동질의 외로움과 쓰디 쓴 인생이 느껴진다.

책을 많이 읽고 총명했던 자영은 대화에 막힘이 없고 설득력과 카리스마를 지녔다고 전해지는데, 가까운 운현궁을 자주 드나들며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자영을 고종의 비로 추천한 이도 부대부인 민씨였다. 대원군은 아비 없고 남자 형제 없는 자영을 며느리로 간택했다. 자영의 나이 16세, 고종의 비이자 조선의 국모 명성왕후가 되었다.

◆명성황후 기념관

유적지의 가장 안쪽에 명성황후 기념관과 공연과 행사 등을 위한 문예관이 자리한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이 보인다. 하늘과 빛과 눈비를 고스란히 들이는 중정에 두 분 어진이 나란히 자리한다. 그림은 1300℃로 구은 도자기로 되어 있어 햇빛을 받아도 퇴색되거나 깨지지 않는다. 가을이면 중정을 개방한다고 한다. 가을날, 저 중정에 낙엽이라도 날아들면 그 짙은 우수를 어찌할까.

기념관에는 명성황후의 글씨와 한글서간, 옥호루와 국상의 모형, 복제된 시해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서간에는 안부를 묻는 다정다감한 글도 많지만 청탁 편지에 대한 답신에서는 ‘지금은 때가 아니니 부탁하지 말라’는 냉철한 성격도 보인다. 명성황후는 1895년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2년 후 조선은 대한제국이 되었고 왕후는 황후가 되었다. ‘일편단충(一片丹忠)’이라는 명성황후의 글씨에서 거침없는 기개가 느껴진다.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은 명성황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지식은 주로 중국에서 얻은 것이었지만 세계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자기가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세력의 허를 찌르는 데 능했다. 그녀는 일본을 반대했고 애국적이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경부고속도로 서울방향으로 가다 김천분기점에서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탄다. 여주 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 여주방향으로 5분쯤 가면 여주IC다. 톨게이트를 나가 여주IC 삼거리에서 문막, 여주방향으로 우회전, 점봉교차로에서 능현리, 명성황후 생가 방향으로 우회전해 직진하면 된다. 입장료는 어른 1천원, 중고등학생 700원, 초등학생 500원, 주차료는 대형 2천원, 소형 1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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