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위대한 열정을 찾아서' .5] 그녀, 나혜석이라는 불꽃-수원 행궁동과 인계동의 나혜석 길

  • 류혜숙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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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7-18   |  발행일 2014-07-18 제38면   |  수정 2014-07-18
“아내이기 전에, 어머니이기 전에 난 ‘사람’ 나혜석이었다” 불꽃 여인의 외침 귓전을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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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인계동 ‘나혜석 거리’. 중앙에 그림도구를 든 단발머리의 그녀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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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동 나혜석 거리 입구에는 그녀의 얼굴과 연표 등을 새긴 기둥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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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동 나혜석 거리 입구 기둥에 새겨져 있는 나혜석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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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동 아트센터 외벽에 3천장의 타일로 그려진 나혜석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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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옛길. 나혜석의 생가와 삼일여학교가 있던 길이다.

높은 빌딩숲 속을 한 여성이 걸어가고 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순간, 섬광과 같은, 벼락과 같은, 천둥과 같은, 날카로운 그녀의 외침이 대기를 베었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오냐, 사람이다.(소설 ‘경희’ 중)’. 누구의 무엇도 아닌, 사람으로 살고자 했던 그녀. 나혜석이다.

◆그녀, 신여성 나혜석

수원의 화성행궁 옆에 성안 마을인 행궁동이 있다. 마을의 중심에는 ‘행궁마을커뮤니티아트센터’가 자리한다. 건물의 커다란 벽에는 한 여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3천장의 타일그림이 모여 이루어진 얼굴,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정월(晶月) 나혜석이다.

아트센터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길에 ‘나혜석 옛길’이 있다. 나혜석의 생가와 그녀가 다녔던 삼일여학교가 있던 길이다. 생가는 사라지고, 표식만 남은 터에는 그녀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나혜석은 1896년 4월28일 경기도 수원 장안구 신풍동에서 부유한 상류층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총명했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1910년 삼일여학교를 졸업한 나혜석은 서울의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로 진학, 1913년 수석으로 졸업한다. 그리고 일본의 5대 미술대학 중 하나인 동경사립여자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1914년 매일신보는 이 과감하고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여학생의 기사를 수차례 실었다. 그녀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세간의 주목을 받는 시대의 스타였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결혼을 강요하며 학비 지원을 끊는다. 그러자 나혜석은 굽히지 않고 스스로 학비를 벌었다.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몇 명의 첩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나혜석보다 겨우 한 살이 많았다.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보았던 나혜석은 정조관념과 축첩제도, 그리고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에 커다란 의문을 품고 있었다.

1914년 12월, 나혜석은 유학생들의 잡지인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오직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현모양처의 이상이 여성을 노예로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1917년에는 여자유학생들의 친목회를 조직하고 잡지 ‘여자계’를 발간, 2호에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근대적이고 이상적인 여성을 그린 소설 ‘경희’는 최초의 본격 페미니즘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1918년 그녀는 졸업했다. 수백 명의 졸업생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화가로, 부인으로, 어미로, 다시 화가로

나혜석은 귀국하여 함흥과 서울에서 미술교사로 일했다. 1919년에는 독립운동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때 나혜석을 위해 단숨에 달려온 이가 외교관이자 변호사였던 김우영이다. 두 사람은 1920년 결혼한다. 나혜석의 첫사랑은 도쿄 유학 중 만났던 시인 최승구였다. 그가 1916년 폐병으로 사망하자 나혜석은 오래, 깊이 절망했다. 김우영은 그녀가 첫사랑의 상처를 잊을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며 무한한 사랑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김우영과의 결혼에 네 가지 조건을 요구한다. 일생 동안 지금과 같이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줄 것, 그리고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김우영은 이 요구를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1921년, 나혜석은 서울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수천 명의 사람이 몰려들었고 수십 장의 그림이 팔렸다. 그러나 곧 이은 임신과 출산으로 그녀는 극도의 고통을 겪게 되고 작업은 정체된다. 1923년 잡지 ‘동명’에 발표한 ‘어미 된 감상기’에서 나혜석은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까지 표현한다. 모성애라는 신화의 파괴였다. 그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비로소 모성을 알게 된다. 몇 년 뒤 그녀는 이렇게 썼다. ‘모성애란 본능이 아니라 보살피고 기르면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작업은 더뎠지만 나혜석은 붓을 놓지 않았다. 매년 작품을 선보였고 늘 상을 탔다. 그리고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작품 ‘천후궁’이 특선을 받는다. 여류화가로서는 최초였다.

◆철저하게 무너져 마침내 파멸하는 용기, 사람 나혜석

수원시청이 있는 인계동에는 ‘나혜석 거리’가 있다. 양쪽에는 카페와 식당이 빼곡하다. 가로 벽에는 듬성듬성 나혜석의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리고 길 중앙에 캔버스와 화구박스를 든 단발머리의 나혜석이 막 한 발을 내디디려는 듯 서있다.

1927년 나혜석은 남편과 함께 세계 여행을 떠났다. 여행은 그녀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고 서구의 여성운동을 견문할 기회가 되었다. 파리에서는 8개월간 머물며 그림을 배웠다. 단발머리의 나혜석은 파리에서의 그녀다. 그곳에서, 나혜석은 천도교 지도자 최린을 만난다. 그와의 연애로 결국 나혜석의 결혼은 파국을 맞는다.

1931년, 빈 몸으로 쫓겨난 그녀는 그림에 몰두했다. 또한 여행기 ‘구미유기’를 통해 인간평등에 기초한 참정권,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등 여성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다. 그리고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한다. 결혼에서 이혼까지, 부부의 치부마저 깡그리 드러낸 적나라한 수기였다. 나혜석은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사회의 이중성을 통렬히 비판했다. 책임을 약속했으나 깨끗하게 배반한 최린에 대해서도 응징에 나섰다. 정조유린에 대한 위자료 청구소송을 공식적으로 낸 것이다. 엄청난 파장이 일었고 세상은 뒤집혔다. 분노한 이들은 잡지를 불태웠다. 대중의 반감은 분노와 증오로 번졌다. 그녀의 사회적 삶은 몰살되었다.

1949년 3월, 대한민국 관보에 한 여성 행려병자의 부고가 실린다. 석 달 전, 서울의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한 그녀에게는 헌옷 한 벌과 이름 석 자가 전부였다. 나혜석.

나혜석 거리의 끝에는 한복을 입은 그녀가 다소곳이 앉아 있다. 그녀는 말한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나혜석. 딸이었고 부인이었고 어머니였다. 화가였고 문필가였으며 여성 운동가였고 독립 운동가였다. 그녀는 언제나 최초라는 수식을 단 선각자였고, 양보하지 않았고 타협하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이 되는 데 자유로웠던 사람이었다. 오늘, 높은 빌딩숲 속을 그녀가 걸어가고 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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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행궁의 화령전 앞에 나혜석 기념표석이 있다. 화령전과 행궁동 아트센터 중간의 골목길에 ‘나혜석 옛길’이 있다. ‘나혜석 거리’는 인계동의 시청 근처에 있다. 두 곳 모두 수원역에서 택시로 5천원 내외 거리다.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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