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 하다 .12] 전국적인 유명세를 치른 김천의 농기구

  • 임훈 박현주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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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7-24   |  발행일 2014-07-24 제11면   |  수정 2014-11-21
김천사람 손기술로 탄생한 족답식 탈곡기, 광복 후 ‘富農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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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종합기계 강만석 상무가 족답식 탈곡기의 사용방법을 재현하고 있다. 다리 힘으로 원통을 돌려 탈곡하는 족답식 탈곡기는 광복 이후 당시 부농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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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김천 모암동의 진영철공 직원들이 철공소 앞에 족답식 탈곡기를 두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진영종합기계 제공>


김천은 일제강점기 이후 지역 제조업의 ‘맹아(萌芽)’를 싹틔운 고장이다. 1945년 광복과 6·25전쟁 이후까지 김천은 영남내륙의 대표적 산업도시였다. 부산, 대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초적 수준이었지만 나름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김천의 제조업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영세한 수준을 면치 못했지만, 몇몇 제품들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주요생산품으로는 한일농기사와 진영철공 등에서 생산한 농기구가 있었고, 한일갈포 및 김천갈포에서는 갈포벽지 등을 생산했다. 이외에도 자물쇠, 가죽가공 등 다양한 분야의 제조업이 발달했다. 그중에서도 김천의 농기구 제조업은 전국의 수요를 감당할 정도로 꽤 큰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하다’ 12편은 김천에서 만들었던 농기구에 대해 다뤘다. 농기구 제작에 평생의 열정을 바친 이들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최대 농산물 집산지·전국적인 유통망
부품 조달 공업도시 대구도 인근에…
농기구제조업 발달 천혜의 입지조건
한때 ‘족답식’ 공장 20곳 달했지만
얼마 못가 동력탈곡기 등장으로 쇠퇴

◆농기구 생산의 최적지 김천

1945년, 광복 직후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일제는 36년간 조선의 강토를 수탈했고, 민초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불끈 쥔 두 주먹뿐이었다. 일제가 병참기지로 세운 산업시설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북한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남한지역의 산업수준은 걸음마 단계였고, 거의 모든 제조업은 사람의 손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의 80% 이상은 농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연히 농업관련 산업이 발전하기 쉬운 조건이었다. 특히 농업관련 제조업이 김천에서 발달했는데, 탈곡기 등의 농기계가 대표적인 생산품이었다.

김천은 농기구제조업이 발달할 천혜의 입지를 갖추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 남부권이었지만 경기·전라도와 경남 김해평야를 비롯한 주요 곡창지역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또한 김천은 영호남과 충청권의 교차점인 데다 각종 농산물의 집산지였다. 김천장의 유통망 역시 전국을 아우르고 있었다. 게다가 공업이 발달한 대구가 가까이에 있어 주요 부품을 구하기가 쉬웠다. 농기구 제조업이 발달할 천혜의 조건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시대상도 농기구제조업의 발전에 한몫했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는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남한에서만 1953년까지 완만한 형태의 농지개혁이 추진되었고, 농지의 상당부분이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농지개혁은 이익의 대부분을 소작료로 지불해야 했던 농민들의 입장에서 혁명적 조치였다. 농민들에게는 열심히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생겼고, 이는 곧 농기구 제조업의 발전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6·25전쟁 당시 남한주민들이 북한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가 농지개혁 때문이라는 향토사학자들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족답식(足踏式) 탈곡기를 아십니까

일제강점기 때부터 영농기계화가 추진되기는 했지만 눈에 띄는 수준은 아니었다. 잡초를 뽑아 없애는 제초기와 곡식을 빻는 제분기 등을 대장간에서 생산하는 것이 전부였다.

광복이 되면서 김천 모암동 일대의 철공소에서는 다리 힘으로 원통을 돌려 탈곡하는 족답식 탈곡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누가 최초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집이 성공하고 나니 다른 집에서도 탈곡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광복 후에만 7~8곳의 김천지역 철공소에서 족답식 탈곡기를 생산했다.

족답식 탈곡기는 전체적으로 둥근 원통 모양이다. 발로 원통 아래의 가로발판을 밟으면, 원통이 회전하는 방식이었다. 탈곡기가 돌아가며 내는 바람소리 때문에 ‘호롱구’로도 불린다. 많은 양의 곡식을 한꺼번에 탈곡할 수 있는 족답식탈곡기는 당시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족답식 탈곡기는 온전히 김천사람들의 손기술에 의해 탄생했다. 족답식 탈곡기는 참나무로 만들었는데 손이 많이 가는 작업과정을 거쳤다. 질긴 참나무를 선별해 제단한 다음, 사람 손으로 낱알을 훑는 철사를 참나무 판에 박아넣었다. 금속부품의 가공 역시 철공소에서 이뤄졌다. 대장장이로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기에 웬만한 작업은 모두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래도 제작이 곤란한 부품들은 공업수준이 더 높았던 대구에서 구입했다. 대구에서 주문한 주물 부품 위에 조립·가공과정을 거친 족답식 탈곡기를 얹어 제품을 완성했다.

이후 김천의 족답식 탈곡기가 점점 유명해지고 판매량이 늘면서 관련기업들은 큰돈을 벌어들였다. 6·25전쟁 이후 김천에는 족답식 탈곡기를 생산하는 공장만 20군데에 이르렀다. 전국의 농기구 도매상들은 족답식 탈곡기를 사들이기 위해 김천으로 모여들었다. 김천의 탈곡기공장들은 눈코 뜰 새 없이 생산에 박차를 가했지만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선금을 받고서도 물건을 제때 납품하지 못해 돈을 되돌려줘야 할 정도로 호시절을 누렸다. 안타깝게도 족답식 탈곡기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56년부터 동력 탈곡기가 보급되면서 종래의 족답식 탈곡기 제조업체들은 쇠퇴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김천 농기구의 전통을 잇다

“빨리 빨리 일하그레이. 주문 많이 밀린 거 모르나.”

1945년 김천시 모암동의 한 철공소. 앳된 모습이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풍모의 한 청년이 직원들을 다그치고 있다. 최선필이라는 이름의 이 청년은 어린시절 아버지를 여읜 후부터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수많은 동생을 건사하려면 누구보다 악착같이 일해야 했다. 청년은 특유의 성실함과 손재주로 주변의 인정을 받았고, 결국 직원 여섯명을 거느린 어엿한 사장님이 되었다. ‘진영철공소’라 적힌 간판도 떡하니 공장 앞에 내걸었다. 비록 초가지붕 아래의 작은 철공소였지만, 생산현장의 활기만큼은 김천의 어느 철공소도 따라오지 못했다.

진영철공은 현재 진영종합기계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50년대까지 수많은 농기계 제조업체가 김천에 있었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현재 100m 이상의 먼 거리에서도 농약살포가 가능한 광역농약살포기를 생산, 국내시장의 50%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창업주 최선필의 아들인 2대 최준홍 사장(60)과 손자인 최훈민 부사장(31)이 가업을 성공적으로 잇고 있다.

창업 후 70년의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데는 창업주 최선필과 직원들의 돈독한 관계가 한몫했다. 옛 직원들은 창업주인 최씨를 친형처럼 따랐다고 한다. 불과 10년 전까지 진영종합기계의 생산직 사원 상당수는 머리가 희끗한 노인들이었다. 창업주인 최 사장이 직원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준홍 진영종합기계 사장은 “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많은 분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기능으로 제품생산에 도움을 주셨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진영종합기계는 변화의 흐름에 잘 적응한 향토기업으로도 유명하다. 족답식 탈곡기 이후에도 기술개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덕분이다. 80년대 중반까지 전자동식 탈곡기를 생산하며 김천 농기구의 명성을 이어갔다.

콤바인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85년에도 진영종합기계는 변화의 흐름을 잘 간파했다. 일본의 선진기술을 도입해 광역농약살포기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성공을 거두었다. 현재 진영종합기계는 농기계에 대한 다양한 연구·개발을 시도하며 김천 농기구의 명성과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흔치는 않지만 김천의 족답식 탈곡기를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농가가 아직 존재하는데, 주로 콩을 타작하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진영종합기계 강만석 상무(59)는 “시골집에서 우리 상표가 적힌 농기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지금 회사가 보관하는 족답식 탈곡기 역시 농가에서 다시 사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진영종합기계 최훈민 부사장·강만석 상무

▨참고문헌=‘김천상공회의소 105년史’‘김천시사’
공동기획: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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