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4-구미] 낙동강 물길따라<6> 김취성·취문 형제의 바르고 맑은 삶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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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7-28   |  발행일 2014-07-28 제13면   |  수정 2021-06-15 17:24
“내 아무리 도적이지만 백성 위하는 저런 군수를 어찌… 활을 거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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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취성이 후학을 가르쳤던 서산재. 구미시 고아읍 원호2리에 있는 강학지소로, 김취성은 이곳에서 다섯 아우와 함께 학문을 닦았다.


#1. 한 집안 형제 모두 후세에 모범

구미 해평의 낙봉서원에 모신 다섯 선생 중 두 사람인 김취성, 취문은 한 형제다. 이들의 후손인 선산 김문은 이를 두고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다. 취성·취문 형제의 나이 차는 열네살이다. 이들 형제는 똑같이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던 송당 박영의 문도로 학문을 닦았다. 형 취성은 평생을 후학 육성에 몰두하면서 이 지역 인재를 많이 배출했고, 아울러 학문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이에 비해 동생 취문은 문과에 오른 후 강원 감사, 부제학 등 주요 관직을 맡는 등 공직 생활을 했다. 특히 취문은 사심 없는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으면서 검박한 생활을 해 청백리로 꼽혔다.

한 집안에서 형제가 뛰어난 학자로서, 그리고 청백리의 고결한 삶을 뚜렷이 드러내어 후생들의 모범이 되고, 서원에 나란히 모셔진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그래서 구미지역은 특히 취성·취문 형제의 얘기를 인성 교육의 한 전형으로 삼아 자랑한다.



#2. 형 김취성,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하다

취성(就成)은 자가 성지(成之), 호는 진락당(眞樂堂) 또는 서산(西山)으로 성종 23년(1492) 3월에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특히 덕행이 순수했고, 책읽기를 좋아했다. 스승인 송당 박영은 “그대의 재주와 학문이 결코 옛 명현에 뒤지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 정도 학문의 성취가 드러나자, 마을 뒷산에 서산재(西山齋)를 지어 강학의 터로 삼았다. 그리하여 다섯 아우를 비롯하여 많은 후학을 가르쳤다. 그의 문하에서 숱한 인재가 나왔다.

언제나 닭이 울면 일어나 의관을 갖추었다. 강학 후 서재로 물러나와서도 책상 앞에 꼿꼿이 앉아 있곤 했다. 제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물으면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 의심 나는 부분은 분명하게 설명을 해 주며, 함께 토론하는 걸 기꺼워했다.

밤이 늦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고 도학을 밝혔다. 특히 정자(程子), 주자(朱子)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그의 학문이 깊어지고, 제자를 가르치는 성실함과 열의가 널리 알려지면서 영상 김안국, 회재 이언적이 그의 학문과 재주를 들어 조정에 여러 차례 천거했다. 조정에서는 벼슬을 내리며 불렀다. 그러나 그는 애초 벼슬할 뜻이 없었다. 당연히 벼슬을 받지 아니하고 뜻을 지켜, 옛 성현을 추모하면서 더욱 학문에 열중하였다.

성리학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학문은 민생의 근본을 깨닫는 데 있고, 이를 실천하는데 있음을 그는 특히 강조했다. 그리하여 어려운 사람과 병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의학 공부에 열중하여 많은 사람을 치료했다. 그 일에는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한 삶을 일관되게 행하다가 명종 5년(1550) 58세로 일생을 마쳤다. 참으로 깨끗하고 의로운 삶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높은 학문과 덕행을 기려 후생들이 낙봉서원(洛峰書院)과 원호리에 있는 서산(西山) 세덕사(世德祠)에 제향하였다.

#3. 아우 김취문, 사심 없고 맑은 목민관

취문은 중종 원년(1506) 원호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문지(文之), 호는 구암(久庵)이다. 형 취성과 함께 송당 선생에게 수업하였으며 중종 32년(153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교서관 정자, 형조, 예조 좌랑을 지내고, 비안현감을 지냈다. 그후 강원도 도사, 수찬 및 호조, 공조 정랑을 지냈다. 이후 전라도도사, 영천군수, 상주목사, 나주목사 등 외직을 돌다가 사성, 집의, 교리를 거쳐 호조참의와 대사간에 이르렀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여 권력을 가진 자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자주 외직을 돈 것이었다.

청렴하고 근검한 관리의 모범을 보여 임금으로부터 많은 상을 받고 모든 관리의 귀감이 되었다. 학문은 깊었고, 행실은 맑고 균형이 잡혀 있어서 널리 알려졌다. 청송부사로 있을 때, 퇴계 이황은 외아들 준에게 편지를 보내 “청송부사는 내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친구이니 너는 조심성 있게 가서 인사를 드려라. 가는 길이 비록 험하나 넓은 바다와 어진 이를 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평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바른 소리를 잘하는 성품 때문에 조정에 있을 때는 늘 불편한 사람으로 통할 정도였다. 당시 명종이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자 척신인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전횡을 일삼았다. 취문은 그런 윤원형의 부정행위를 보고만 있지 않았다. 윤원형을 물리치라는 상소를 올려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어느 날 취문은 윤원형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윤원형에게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고 따졌다. 윤원형이 언짢은 표정을 짓자 탁상을 들고는 그의 앞에 내려쳤다. “대감의 비리가 한두 가지가 아님을 내 모를 줄 아는가?” 그는 윤원형의 비리를 꼽기 시작했다.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의 윤원형의 위세로 봐서 자칫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명종 임금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전국의 관리 중에서 가장 청렴결백한 관리를 선발한 자리였다. 취문은 그때 영천군수로 있다가 뽑혀 올라왔다. 왕은 취문을 보자 친히 술잔을 따르면서 칭찬했다.

“그대가 사심이 없이 일처리를 공정하게 잘 하고, 백성들을 위해 애쓴다는 걸 잘 들었소.”

“황공하옵니다. 목민관으로서의 할 일을 다 했을 뿐입니다.”

임금은 그에게 단목(丹木)과 호초(胡椒), 백랍촉(白蠟燭) 한 쌍과 비단옷을 하사했다. 이로써 취문은 청렴결백한 관리, 곧 청백리로 선정된 것이다.

만년에는 고향에 내려와 대월재(對越齋)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명종은 이를 안타까이 여겨 친히 제문을 짓고, 많은 부의와 물품을 내려보내어 애도했다.



#4. 도둑을 감화시키다

김취문이 영천 군수로 재직할 때의 얘기다.

당시 영천과 경주 지역을 넘나들며 팔용이란 도둑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어느 날 취문은 경주지방을 순시했다. 팔용은 영천군수가 산을 지나간다는 소리에 쾌재를 불렀다. 군수의 행차이니 제법 괜찮은 물품을 많이 가져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군수 행렬을 덮치자.”

도적 떼는 좁은 산길의 양쪽에 매복하여 활을 겨누었다.

마침내 군수 일행이 다가왔다. 일행을 본 팔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군수 행렬이 왜 저리 단출하지?”

자세히 보니 취문의 행색도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 활을 쏠까요?”

부하들은 조급한 마음으로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잠시 생각을 하더니 팔용은 나직하게 말했다.

“활을 거두어라.”

부하들이 의아한 눈으로 팔용을 바라보자 팔용은 말했다.

“내 전에 영천군수가 검소하고 선량하다는 얘기를 더러 들었는데, 그 말이 빈말이 아니구나. 봐라. 저렇듯 조촐한 차림새가 그걸 말해주고 있지 않느냐? 내 아무리 무도한 도적이지만, 백성을 위하는 저런 군수를 어찌 해코지할 수 있겠느냐. 모두 조용히 철수해라.”

이를 두고 사람들은 취문의 청렴함과 백성을 위하는 선정의 덕이 도둑을 감화시켰다고 두고두고 칭송했다.



#5. 가난한 취문에게 기꺼이 딸을 주다

유공륜(兪公綸)은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혼처를 알아보다 취문에게 미혼인 둘째 아들이 있다는 소릴 듣고는 매파를 그리로 보내 의중을 떠보았다. 유공륜은 전임 판서였던 유여림의 아들로 아주 부자였다. 그러니 딸을 아쉬움 없이 풍족하게 키웠다. 번듯한 가문에 딸을 시집보내고 싶었다.

“김취문의 가문이라면 그 덕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느냐? 잘 말해서 꼭 혼사가 성사되게 해다오” 하고 유공륜은 매파에게 신신당부했다.

매파가 취문의 집을 보고 오자 유공륜은 급히 물었다.

“그래, 그 집에서는 뭐라고 하던?”

“뭐라고 하고 말고가 있나요. 하도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네요.” 매파가 입을 씰룩거렸다.

“왜, 뭐가 문제인데 그래?”

“제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가 마침 밥때라 식구들이 밥을 먹고 있었지요. 그런데 세상에, 나무 표주박에 밥을 담아 먹고 있지 뭡니까? 제대로 번듯한 그릇조차 없는 집이니, 뭐가 아쉬워서 그런 가난뱅이 집과 혼인을 합니까? 아예 그만두십시오.”

그러자 유공륜은 뜻밖에도 무릎을 치며 웃었다.

“옳거니, 그래, 그래. 온 세상 사람들이 김승지를 청렴하고 어질다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구만. 그 양반이 사돈이 된다면 우리 집안에도 광명이 들 것이 틀림없겠구나.”

유공륜은 딸을 불러 말했다.

“내 이제 네 시댁을 제대로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너는 기꺼이 김승지 집 귀신이 되어라.”

그리하여 마침내 유공륜의 딸과 취문의 아들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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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취성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진락당김선생유허비(왼쪽)와 아버지 김광좌, 취성·취문 등 6형제를 위해 세운 서산칠덕사유허비.
◆김취성·취문 형제의 낙동강변 유적지

김취성·취문 형제를 제향하고 있는 낙봉서원은 1646년(인조 24)에 건립됐다.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와 용암(龍巖) 박운(朴雲),두곡(杜谷) 고응척(高應陟)도 함께 배향하고 있다. 1787년(정조 11)에 사액되었지만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고종 8)에 훼철됐다. 그후 1933년에는 강당을, 43년에는 외삼문을, 77년에는 사당을, 89년에는 동재를, 90년에는 서재를 다시 지었다.

김취성이 강학의 터로 삼았던 서산재(西山齋)는 구미시 고아읍 원호2리에 있다. 김취성은 이곳에서 다섯 아우인 취기(就器)·취연(就硏)·취련(就鍊)·취문(就文)·취빈(就彬)과 함께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쳤다. 47년 새롭게 단장해 지금에 이르고 있고, 진락당김선생유허비(眞樂堂金先生遺墟碑)가 서산재 한편에 세워져 있다. 인근에는 제사를 지내는 서산(西山) 세덕사(世德祠)가 자리하고 있다. 세덕사는 조선 초기 이조참판을 지낸 김광좌(金匡佐)와 취성, 취문 등 그의 아들 6형제를 모시고 있다. 제단 앞에 아버지와 6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산칠덕사유허비(西山七德祠遺墟碑)가 있다.

김취문이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고향에 지은 대월재(對越齋)도 원호2리 대황산 서쪽 기슭에 있다.

대월이라는 이름은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에서 따온 이름이고, 현판의 글씨는 명필이었던 해관(海觀) 윤용구(尹用求)가 썼다고 한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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