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개청 100년, 1914~2014 칠곡 .3] 제국주의 향해 폭탄을 던지다…독립운동가 ‘일몽 이수택’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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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01   |  발행일 2014-08-01 제11면   |  수정 2014-11-21
빛나는 투사의 혼 강인한 독립의지 폭탄에 담아 던졌네

‘왜관개청 100년-1914~2014 칠곡’은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가 왜관으로 옮겨 개청한 1914년부터 100년 동안, 칠곡의 주요 역사와 인물을 다룬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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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애국동산에 세워져 있는 순국의사일몽이수택선생기념비.

◇ 스토리 브리핑

일몽 이수택(一夢 李壽澤, 1891~1927)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서 태어나, 약목(若木)에 있는 동락의숙(同樂義塾)과 서울 보혜학교(普惠學校)에서 공부했다. 23세 되던 1913년 일합사(一合社)를 결성해 항일운동에 나섰지만 동지들의 체포로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1919년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해 1920년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 일로 1924년 1월25일 체포되어 5월13일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6월형을 받았다. 복역 중에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1927년 6월6일에 순국했다. 현재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애국동산에 ‘순국의사일몽이수택선생기념비(殉國義士一夢李壽澤先生紀念碑)’가 세워져 있으며, 1990년에 애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1. 충열담에 감격한 소년

이수택은 설 준비로 집안 부지깽이도 바쁘던 1891년 2월7일, 왜관읍 석전리에서 판서 이원정(李元禎)의 후손이자 정환(珽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병아리 같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용모가 준수했을 뿐만 아니라 성품이 과묵하고 강직했다. 충(忠)과 열(列)에 대한 이야기만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 소년의 마음 버릇이었다. 소년 이수택은 늘 한결같았다.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로 집안 어른의 충열담에 귀를 쫑긋거렸다.

18세에 애국사상을 고취하던 약목의 동락의숙에서 수학했다. 그러다가 20세 되던 해 서울의 보혜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일제 침략정책의 압박은 날로 심해졌고 이수택은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 자신의 뜻을 위한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겠다.’

그러고는 학교를 중퇴했다. 23세 되던 1913년이었다. 이수택은 곧바로 새로운 길로 나아갔다. 안곽·이영재·명도석·황상규·김대지·윤치형·구영필 등 동지들과 함께 밀양에서 항일단체 일합사(一合社)를 결성했다. 이후 무려 5년간이나 구국활동을 전개하였지만, 1918년 명도석·김대지·구영필 등이 평양에서 체포되면서 일합사의 활동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수택은 길을 달리 잡았다. 풍기로 옮겨가 채기중 등과 함께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 대한광복단은 풍기광복단으로도 불렸는데, 이수택이 일합사를 조직했던 1913년 바로 그해 겨울, 풍기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에 의한 독립 운동단체였다. 주로 의병 장교 출신의 인물들이 중심이었고 그 밖에 유림과 계몽운동가 등 여러 계층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이수택은 군자금 모금이라는 지난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이수택 또한 독립운동에 진력하였지만 일제의 모진 무력탄압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하여 이수택은 이각(李覺)으로 이름을 바꾼 후 동지 박중화(朴重華)와 더불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국권회복을 위해선 무엇보다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이에 두 사람은 함께 만주로 건너갔다. 남만군정서(南滿軍政署, 1919년 3월 중국 봉천성 통화현 칠도구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 암살단) 회계과장으로 있던 옛날 일합사의 동지 황상규(黃尙奎)를 만나 구체적인 활동 계획을 도모했다. 그 당시 서간도의 고산자(孤山子)에 무관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입학하기 위해 먼 길을 갔지만 이미 폐교되어 사라진 뒤였다. 이수택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돌아와야 했다.


#2. 아! 의열단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멈출 이수택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길림(吉林)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주에서 활약하고 있던 한봉근·김상윤·김원봉·곽재기·이종암·윤소룡·서상락 등을 포함한 13명과 뜻을 모아, 1919년 11월10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했다. ‘의열(義烈)’이란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는 의미였다.

의열단의 조직은 신속하게 정립되었다. 우선 단장에 김원봉을 추대했다. 동시에 조직의 목표로 ‘일제의 포악과 착취에 반항하는 민족적 공동전선을 펼침으로써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을 통한 절대적 독립을 쟁취한다’를 세웠다.

또한 최고 이념으로는 ‘구축왜노(驅逐倭奴)’와 ‘광복조국’ ‘타파계급’ ‘평균지권(平均地權)’을 삼았다. 그리고 그 암살 대상을 ‘7가살(可殺)’, 즉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탐(敵探,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護劣紳, 관료나 군벌과 짜고 농민을 착취하던 대지주나 자본가)으로 정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와 각 경찰서 그리고 기타 일제 중요기관 등을 ‘5파괴’, 즉 파괴해야 할 대상 기관으로 정했다.

이어 의열단의 국내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의열단은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투탄,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 ‘이종암 사건’ 등을 전개하였고, 시종 암살과 파괴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로써 의열단은 3·1 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벌어진 한국독립운동 중에서 일제로 하여금 가장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한 조직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여기서 이수택은 주로 자금 조달과 조직 확대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1920년 3월과 5월에 일어난 밀양 및 진영의 폭탄 사건과 9월 부산경찰서 폭탄사건에도 관여했다.

그러던 중에도 이수택은 모친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모친 간병에 지극한 효성을 다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0년, 서울·밀양·진주·창원·마산 등지를 드나들었다. 이때 중국에서 폭탄을 곡물 화물에 숨겨 반입한 곽재기·이성우·윤소룡·신철휴 등 여러 동지와 거사를 준비했다. 이들은 폭탄 운반과 투척에 대한 책임 분담과 경비조달을 위해 협의해 나갔고, 매 시간 매 분초를 동분서주했다.


#3.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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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폭탄투척 사건으로 체포된 이수택이 경성지법에서 2년6월의 징역형을 받았다는 내용을 다룬 1924일 5월14일자 동아일보 기사.

그렇게 모든 거사는 신중하고 착실하게 성사되는 듯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창녕군의 진영역(進永驛)에서 동지들의 폭탄이 발각되는 바람에 조직원이 체포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수택은 당황하지 않았다. 교묘하게 폭탄을 감춰 경계망을 피해 숨었다. 운은 계속해서 따라주었다. 경남은행 구포지점장이던 이재수의 집에서 윤치영·배중세와 투쟁 모의 중 일경의 기습을 받았을 때도 용케 빠져나왔다. 그리고 12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동지 최경학(崔敬鶴)에 의해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가 결행되었다.

최경학은 직접 만든 폭탄을 밀양경찰서장이 서원들에게 훈시하는 자리에 던졌다. 폭탄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불발되었고 그나마 폭발한 나머지 하나도 힘이 약해서 기둥을 파손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에 최경학은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려 하였으나 실패, 체포되었고 이듬해 5월 대구 감옥에서 사형되었다. 연루된 다른 동지들도 투옥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로 인해 수사는 더욱 엄중해졌고, 이수택도 끝내 부산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수택은 동지들을 지키기 위해 말 못하는 장애인 행세를 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 때문에 수십 일에 걸친 악랄한 취조에도 넘어가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이수택은 다시 중국의 독립단에 국내정세를 밀통하는 한편, 국내로 들어오는 동지들의 연락과 편의를 도모하는 등 꾸준하게 활동했다. 동시에 이종암·김상윤·서상락 등과 또 다른 거사를 준비하며 뜻을 모았다. 하지만 호구조사를 나온 일경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1924년 1월25일 새벽, 무장경관에게 또다시 체포되고 말았다.

‘하아…하아….’

이수택은 숨조차 뱉어낼 수 없었다. 일경의 고문은 악랄하고도 잔인했다. 결국 늑골에 골절상을 입고 말았다. 그 상태로 일제는 재판을 강행했다. 결국 이수택은 체포된 그해 5월13일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옥중에서 병은 점점 깊어졌고 몸은 너덜너덜해져 갔다. 일어설 수조차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결국 일경은 이수택을 ‘쓸모없다’고 여겨 병보석으로 내보내주었다. 하지만 가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몸은 이미 망신창이였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있었지만 동지 구인덕의 옥사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병세는 더욱 악화됐다. 끝내 이수택은 37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1927년 6월6일의 일이었다.

이수택이 임종하던 날, 아들 달진(達鎭)은 병으로 누워있었다. 게다가 사회장(社會葬)으로 하려던 고향 인사들의 계획마저도 일경의 저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도 이수택에겐 동지들이 있었다. 이수택이 마지막으로 눈에 감고 그를 끝까지 지킨 이들이 바로 그 동지들이었다.

이후 정확하게 39년 뒤인 1966년 6월6일, ‘순국의사일몽이수택선생기념비(殉國義士一夢李壽澤先生紀念碑)’가 칠곡군 약목면 관호리 산 63번지에 세워졌다. 기념비는 2003년 10월8일 왜관읍 석전리 동산재(東山齋)로 옮겨졌고, 그해 11월12일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애국동산에 다시 새로 세워졌다. 매년 광복절에 추모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시조 시인이자 사학자이며 수많은 가곡의 작시자(作詩者)이기도 했던 노산 이은상은 이수택의 항일정신을 이렇게 읊었다.

‘겨레의 자유를 위해 조국의 제단에 생명을 바친 투사의 혼이 깃드신 곳, 만고에 끊임없이 흐르는 저 낙동강 물도 목메어 울어 예는 여기! 동포여! 이 앞에 이르거든 부디 님의 뜻 가슴에 새겨 내 나라 빛낼 것 잊지 마소서.’

글=김진규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 칠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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