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수에 사무친 원한…마을회관앞 ‘한국군증오비’에 ‘恨과 복수’ 새겨놓아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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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08   |  발행일 2014-08-08 제34면   |  수정 2014-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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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옌성 붕따우 마을에 있는 한국군증오비. 베트남전 종전 이듬해인 1976년 마을 주민에 의해 건립됐다.

‘한홍구와 함께 떠나는 베트남평화기행단’ 30명은 지난달 24~31일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이 진행하는 공정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베트남평화활동가 구수정 박사의 안내로 푸옌성 동호아현 호아히엡남사 붕따우 마을과 꽝아이성 빈선현 빈호아사 마을에 있는 한국군증오비를 답사했다. 또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즈엉사 하미 마을과 디엔안사 퐁니 퐁넛 마을에 있는 위령비 등 한국군 민간인학살지역을 탐방했다. 베트남 최고의 시인인 탄타오 시인과 반레 시인을 만나 베트남전쟁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한편,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를 만났다. 평화기행단은 이밖에 한·베평화공원, 밀라이학살 박물관, 구찌땅굴 등을 답사했다. 대구에선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비롯해 베트남 참전군인인 류진춘 경북대 명예교수, 신평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송필경 <사>베트남평화의료연대 대표이사 등이 이번 여정에 동행했다.

● 푸옌성 동호아현 호아히엡남사 붕따우 마을 한국군증오비

한국군증오비가 있는 베트남 마을에선 ‘신~라오(미안합니다)’와 ‘축스퀘~(건강하세요)’란 베트남어가 꼭 필요하다.

‘머나먼 쏭바강’의 본향 푸옌성은 베트남 중부지역에 위치한다. 전쟁 당시 한국군이 베트콩 평정 작전을 벌였던 5개성(꽝아이·꽝남·푸옌·빈딘·칸호아)가운데 유일하게 3개의 전투부대(청룡·맹호·백마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구수정 박사에 따르면 푸옌성 뚜이호아 지역은 청룡여단과 맹호부대가 주둔하다 66년 말부터 백마부대 28연대가 주둔했다고 한다.

지난달 26일, 작열하는 태양 아래 붕따우 마을을 찾았다. 마을은 평온했다. 현재 3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이 마을 한가운데에 마을회관이 있다. 마을회관 앞마당에 광개토대왕비를 연상시킬 만큼 장방형으로 된 거대한 비석이 시멘트제단 위에 우뚝하게 서 있다. 바로 ‘한국군증오비’다. 비석 윗부분에 흐릿하게 큰 글자로 ‘CAN THU’라고 쓰여 있다. 베트남어로 ‘CAN(깐)’은 ‘한(恨)’이란 의미이며, ‘THU(투)’는 ‘복수’나 ‘원수’의 ‘수(讐)’를 뜻한단다. 얼마나 원한에 사무쳤으면 이런 비석까지 세워 기억할까. 마음이 착잡하고 불편했다. 종전 이듬해 76년에 세운 이 비석 말고도 뚜이호아 시내 중심지에 또 다른 증오비가 있었다. 하지만 푸옌성 정부의 도시계획에 따라 지금은 철거됐다고 한다. 증오비의 글은 풍상에 씻겨 알아볼 수 없다. 글을 새겨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 박사는 1966년 1월2일, 청룡부대의 제퍼슨 작전 도중 저지른 학살이라고 했다. 아랫마을에서도 민간인학살이 있었는데 그건 맹호부대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구 박사는 “베트남은 70년대 말~80년대 초 베트남전역의 민간인학살지역을 조사했다. 이곳의 경우 어린 아이 부녀자, 노인 할 것 없이 한군데에 모아 놓고 총과 수류탄을 쏜 다음 집을 불태웠다. 그리고 불도저로 구덩이를 판 다음 시신을 한꺼번에 묻었다. 붕따우 마을에서 37명, 인근 토럼 마을에선 42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밝혔다.

한편 베트남 푸옌성기자협회는 이 지역에서 한국군에 의해 20여건의 집단민간인학살이 있었는데, 1천700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호아히엡남사에선 붕따우·토럼·다응우촌 등 3곳에서 120여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학살자행한 한국군인 꼭 만나 물어보고 싶어…왜 그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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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꽝아이성 빈호아사 초입에 있는 베트남민간인학살 묘소 앞에 꿇어앉아 향을 사르며 원혼을 위로하고 있다.

◆붕따우 마을 생존자들의 증언

△응웬끼뚜엔(57)

오늘 내 생애 가장 많은 한국인을 만났다. 66년 1월2일, 당시 6세였다. 그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아침에 따이한이 마을에 행군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 따이한과 접촉이 없었다. 청장년은 다 빠져나가고 아이, 여자, 노인만 남았다. 한 군인이 ‘한곳에 모여라’고 해 영문도 모른 채 모였다. 모두 37명이었다. 한국 군인들이 3시간가량 우리를 세워놓고 빙 둘러쌌다. 굉장히 지루했다. 갑자기 공포탄 소리가 들리고 우리에게 집중사격을 했다. 수류탄도 터뜨렸다. 어머니가 쓰러지면서 나를 감쌌다. 그 위에 시신이 덮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다. 어머니 말고도 가족 5명이 희생됐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지금 굉장히 힘들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묻겠다. 당신들의 정부가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고 인정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의 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

△팜딘타오(59)

토럼 마을에 살았는데 당시 10세였다. 사진처럼 기억이 또렷하다. 마을 멀리서 아버지, 숙부와 함께 들판에 있었다. 두 분은 곡괭이질을 하고 난 소꼴을 먹이고 있었다. 약 30분간 마을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불꽃이 일었다. 비명소리도 들렸다. 난 소를 눕히고 그 밑에 숨어있었다. 총소리가 잦아지자 마을로 들어갔다. 아비규환이었다. 어떤 사람이 ‘너희 가족이 다 죽었으니 얼른 도망가라’고 했다. 헬기 4대가 나타나 다시 마을에 총을 쐈다. 난 도망가다 총에 맞아 붙잡혔다. 병원으로 후송돼 몸에 박힌 총알을 빼고 붕대를 감은 다음 감옥에 갇혔다. 한국군이 ‘아버지와 삼촌이 어디 있냐’고 취조했다. 난 ‘모른다’고 했다. 한 운전병이 나에게 ‘아리랑 노래’를 가르쳐줬다. 이후 남베트남공안국에 넘겨져 10일 정도 투옥됐다 풀려났다. 아버지(팜쭝)와 나만 살아남고 가족 10명이 희생됐다. 마을 사람 42명이 죽고, 3명만 살아남았다. 우리를 학살한 한국 군인을 만나고 싶다.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꼭 한번 물어보고 싶다. 왜 그랬느냐고….


글·사진=베트남에서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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