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수습 막으려 불도저로 밀고…간신히 수습해 가매장한 시신 또 깔아뭉개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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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08   |  발행일 2014-08-08 제35면   |  수정 2014-08-08
●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즈엉사 하미 마을 민간인학살 위령비
시신수습 막으려 불도저로 밀고…간신히 수습해 가매장한 시신 또 깔아뭉개
하미 마을 위령비 뒤편 비문이 연꽃 그림으로 덮여있다. 신평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비감한 표정으로 연꽃을 바라보고 있다.


꽝남성은 베트남 중부지역에 위치한다. 하미 마을 학살은 1968년 캄란만에 주둔하고 있던 청룡부대가 2월25일 다낭과 호이안 일대에서 작전을 펼치다 비무장 민간인 135명을 희생시키고 매장한 사건이다.

이 마을에는 미군부대가 먼저 진입해 마을 사람과 시설을 분산시켰다. 미군에 의해 전략촌(민간인을 베트콩과 분리시키기 위해 따로 모아 수용한 마을)으로 이동됐다 다시 하미 마을에 정착한 주민에게 한국 군인은 빵과 쌀을 자주 나눠줬다. 그래서 한국군과 하미 마을 주민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난해 84세의 일기로 사망한 팜티호아 할머니의 증언기록에 따르면 학살 당일 오전에도 한국군이 평소와 다름없이 주민을 모았다고 한다. 그녀는 빵을 주겠거니 생각하며 딸아이를 데리고 갔다고 했다. 하지만 한 장교가 지루한 일장 연설을 하다 갑자기 지시를 내리자 자동연발소총을 발사, 30여가구 135명의 민간인을 2시간 만에 학살했다고 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어린 아이와 노인, 여성이었다. 그해 태어난, 이름도 없는 아기도 3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하미 마을 생존주민은 한국군에게 3번 학살당했다고 주장한다. 뒤엉킨 시신을 수습하려는데 불도저가 와서 다시 시신을 밀어버렸고, 간신히 12구를 수습해 가매장했는데 그것마저 불도저로 깔아 뭉갰단다. 구 박사는 “이날 죽은 아이들의 시신은 모두 사탕을 물고 있을 정도로 무방비상태였다”고 했다.

당시 38세였던 팜티호아씨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으나 오른쪽 다리와 왼쪽 발목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의족으로 평생을 생활했다. 그녀에겐 2남1녀가 있었는데, 5세이던 딸은 온몸에 중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으나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8세이던 큰 아들은 다낭에서 머슴살이를 한 덕분에 생존했다. 전후 큰 아들 팜록씨(62)는 논일을 하다 지뢰를 밟아 눈을 다치는 바람에 실명했다.

팜티호아씨가 지난해 사망했을 때 베트남평화의료연대(대표이사 송필경)에서 500만원의 성금을 거둬 장례식을 치를 수 있도록 지원했다. 팜 할머니는 살아있을 때 큰 아들에게 “내가 죽어 한국인 친구들이 찾아오면 잘 대해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시신수습 막으려 불도저로 밀고…간신히 수습해 가매장한 시신 또 깔아뭉개
하미 마을 민간인 학살 생존자 팜록씨. 전후 지뢰를 밟아 눈을 잃었다.

평화기행단은 이날 팜 할머니의 집에 가서 향을 사르고 절을 했다. 팜록씨와도 가벼운 포옹을 하며 위로했다. 팜 할머니와 10년 이상 소중한 인연을 이어왔던 송필경 생각하는 치과 대표가 영정에 절을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달 29일 오후,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씨 속에 하미 마을 위령비를 찾았다. 간선도로에서 1㎞ 마을 안 샛길로 들어가자 2층 청기와로 된 동남아 건축양식의 큰 비각이 나타났다. 비각은 나지막한 담으로 둘러싸였고,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주민의 도움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커다란 황동향로 뒤에 비석이 서 있었다. 비석에는 성별, 나이별, 사망시기별로 망자(135명)의 이름이 각인돼 있었다.

이 위령비는 2000년 12월, 한국의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3천500만원을 모아 세우기로 하고 착공한 것이다. 이전엔 마을주민이 위령비를 세울 여력이 안돼 막대기만 꽂아놓았다. 하지만 위령비의 완공을 앞둔 이듬해 1월, 참전전우복지회가 비석 뒤 비문의 내용을 문제 삼아 글을 지워줄 것을 요구하며 준공연기를 요청했다. 베트남중앙정부도 비문을 없애거나 수정하라고 주민을 압박했다.

비문에는 ‘1968년 이른 봄 음력 1월26일, 한국의 청룡부대 군인들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고장을 찾아 미친 듯이 양민을 학살했다. 피가 이 지역을 물들이고, 모래와 피가 뒤엉켜 섞이고(중략) 과거의 전장이었던 이곳에 이제 고통은 줄어들고 있고 한국인이 다시 이곳을 찾아 한스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사죄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하지만 정성을 다해 구슬땀을 흘려가며 위령비 공사를 했던 주민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주민은 결코 비문을 지울 수 없다며 버텼다. 결국 제4차 주민회의에서 ‘만약 비문의 내용을 한 글자라도 고치려 한다면 위령비 대신 한국군증오비를 세우겠다. 고치는 대신 차라리 비문을 덮겠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현재 위령비 뒤편에는 비문 대신 연꽃그림이 그려진 대리석으로 덧씌워져 있다.평화기행단은 위령비와 묘소에 분향과 헌화를 하며 원혼을 위로했다. 비가 그치고 황혼이 물든 서쪽 하늘에 햇살이 비쳤다. 햇살 사이로 용의 모습을 닮은 구름이 보이더니 금방 사라져버렸다.

글·사진=베트남에서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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