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위대한 열정을 찾아서' .6] 김수영, 자유를 살아내다-서울 도봉구 ‘김수영 문학관’

  • 류혜숙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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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08   |  발행일 2014-08-08 제38면   |  수정 2014-08-08
풀처럼 다시 일어난 시인 그 깊은 눈빛이 말하네, 詩는 몸부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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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문학관 제1 전시실과 영상관. 시인의 연대기와 육필 원고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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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문학관. 그의 묘와 시비가 있는 서울시 도봉구에 위치하며 2013년 11월27일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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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서재. 시는 동쪽, 에세이는 북쪽, 번역은 남쪽에 앉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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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여, 침을 뱉어라’ 육필원고.

아파트들이 모여 선, 조용하고 나른한 동네다. 도로는 좁고 사람들은 드물다. 건물들 사이로 흰 바위 봉우리들이 보인다. 서쪽은 북한산, 북쪽은 도봉산이다. 도봉산의 초입 즈음에 시인의 묘가 있다고 했다. 벗들이 세운 시비 아래에, 시인은 잠들어 있다 했다. 강골한 뼈다귀처럼 허연 도봉산 봉우리가 바짝 보이는, 아파트에 둘러싸인 작은 삼거리 모퉁이에 은빛의 건물이 서있다. 김수영 문학관이다.

◆방에 틀어박혀 책상 앞에 앉아있던 소년

문 앞 정면으로 시인 김수영의 얼굴이 보인다. 단순한 선으로 형상화된 그의 얼굴에 신동엽이 말했던 ‘커다란, 사슴보다도 천배 만배 순하디 순한 눈동자’가 떠오른다. 전시실 입구 벽에는 김수영의 마지막 시 ‘풀’이 있다. 그의 육필을 확대한 것이다. 아기의 주먹 같은 글씨다. 최선을 다해 젖을 빨고, 최선을 다해 우는, 그런 아기의 주먹 같은 글씨다. 전시실은 지하실에 촛불을 켜둔 것처럼 어둡고, 전시는 그의 연대기로 시작된다.

김수영은 1921년 11월27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글자를 모를 나이 때부터 책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읽어달라고 졸랐다 한다. 6학년 때는 뇌막염 등을 앓아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동생 김수명은 ‘형은 항상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고 했다. ‘그가 집에 있을 때면 온 식구들은 모두 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지내야 했다.’

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연극에 빠진다. 그리고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 만주로 이주해 연극 활동을 계속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그는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며 연극에서 문학으로 무대를 옮긴다.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시인 김수영의 생에는 두 가지의 큰 사건이 있었다. 6·25전쟁과 4.19혁명이다.

전쟁이 터졌을 때, 시인의 나이는 서른. 그는 거제 포로 수용소의 포로 103655번이었다. ‘세계의 그 어느 사람보다도 비참한 사람이 되리라는 나의 욕망과 철학이 나에게 있었다면 그것을 만족시켜 준 것이 이 포로생활이었다고 생각한다.’ ‘살아있음에 대한 비참한 안도감’과 함께 ‘나의 시는 이때로부터 변하였다. 나의 뒤만 따라오는 시가 이제는 나의 앞을 서서 가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모두가 무서운 일이요, 꿈결같이 허무하고도 서러운 일 뿐이었다.’ 그는 1952년 겨울에 석방되었고, 서울로 향했을 그가 대구 동성로의 석류나무집에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염색한 미군복과 군화 차림이었으며, 석양이 곱던 저녁무렵이었다 한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교사로, 기자로 밥벌이를 하며 글을 썼다. ‘달나라의 장난’ ‘거미’ ‘구라중화’ ‘나의 가족’ 등이 이때의 글들이다. 닭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그는 일을 그만두고 번역과 글쓰기에 몰두했다. 이 시기의 것으로 생각되는 메모에서 그의 신조와 일과를 엿볼 수 있다. ‘일과. 글쓰기 아침 네 시간 책 읽기 아침과 오후 도합 네 시간 밥 벌기 오후 혹은 밤 네 시간.’ ‘신조. 평균된 마음을 가지라. 이러한 가운데서 하나라도 빼지 않고 잘 보아라. 이것이 역설에의 길이다.’

그리고 1960년 4월19일, 혁명이 일어났고, 시인은 ‘푸른 하늘을’ 썼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혁명은 좌절되었으나 세계는 변하였고 김수영의 세계도 변하였다.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리켜준다.’ ‘…적어도 자기의 죄에 대해서 몸부림은 쳐야 한다. 몸부림은 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민감하고 세차고 진지하게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이 지식인이다.’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었고, 시는 행동이었다.

◆자유, ‘시여, 침을 뱉어라’

1968년 4월, 김수영은 부산에서 열린 펜클럽 주최 세미나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한다. 시 쓰기는 모험의 의미를 띤 ‘자유의 이행(履行)’이며,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그러므로 금기(禁忌)에 묶인 시인의 얼굴에 침을 뱉어라! 그리고 결론에 이르러 그는 ‘온몸의 시학’을 선언한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로부터 두 달여 후인 6월15일 밤 11시10분 경, 김수영은 버스에 부딪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16일 아침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비에 ‘풀’이 새겨졌다. ‘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그는 ‘겨울옷과 여름옷을 가리지 않은 채로 어떤 때는 한복 바지에 양복저고리를 걸치고, 어떤 때는 양복바지에 한복 저고리를 걸치고’ 다방이나 술집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서는 담뱃갑 종이를 찢어 쓴 메모가 가득했다고 한다. 술에 취해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기성을 질러댔고, 그날 밤 버스에 부딪히기 전에도 취해 있었다고 한다.

밖으로 나오니 눈이 부시다. 눈앞은 흐려도, 도봉산 봉우리를 바라보며 왔으니 도봉산 봉우리를 등에 지고 가면 될 일이다. 이제 뒷골목으로 가자. 명동이든 향촌동이든, ‘뒷골목의 구질구질한 목로집에서 값싼 술을 마시면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 않는 나라는 결코 건전한 나라라고 볼 수 없으므로, 적어도 오늘은, 살아있음에 대한 비참한 안도감과 민감하고 세차고 진지한 몸부림으로 자유를 살아낸 시인의 제(祭)를 위해.’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서울역에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쌍문역에서 내린다. 2번 출구로 나가 06번 마을버스를 타면 김수영문학관 앞까지 간다. 쌍문역에서 택시를 타면 4천원 이하 거리다. 신동아 아파트 2차와 3차 사이에 문학관이 위치한다. 월요일은 휴관, 입장료는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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