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小京 조문국 어떤 국가?

  • 마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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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13   |  발행일 2014-08-13 제11면   |  수정 2014-08-13
금 생산지·군사력 막강
여타 소국과 명백히 달라
신라의 小京 조문국 어떤 국가?
의성군 금성면 대리 2호분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신라 최장 왕조를 형성했던 김씨 세력의 표지적 묘제인 적석목곽분.
신라의 小京 조문국 어떤 국가?
의성군 금성면 탑리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관. <의성군 제공>

고대왕국인 조문국의 기원은 기원전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사로국(신라의 전신)에 정벌 당한 뒤, 757년 신라에 의해 문소군(聞韶郡)으로 격하돼 상주(尙州)로 편입되기 전까지 1천400여년간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우면서 세력을 형성했다.

이를 증명하는 단적인 사례가 토기다. 학계가 ‘의성양식토기’로 이름 붙인 특이한 형태의 이 토기는 의성군 금성면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군위, 서쪽에선 상주·예천, 북쪽에선 안동·영주·봉화·청송을 넘어 단양·제천 일부지역에서 발견됐다. 당시 교통 여건상 낙동강 물길을 따라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토기를 통해 조문국의 문화적 역량과 위세를 가늠할 수 있다.

조문국은 당시 의성을 중심으로 인근 안동·예천·상주 일대가 금 생산지였다는 점에서 군사력 또한 막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를 장악할 경우 경제력은 물론, 이를 지키기 위한 강력한 힘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향토사학계는 조문국이 신라 최장의 왕조인 김씨 세력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사실에 초점을 맞추며 “신라의 통치권에 흡수된 여타의 소국과 명백히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신라가 지방통치를 위해 국가로서 조직의 틀을 갖추던 당시, 의성지역(조문국)에 소경(小京·국왕이 사는 왕경보다 작은 서울이라는 의미)을 설치하는 등 타 지역에 비해 관리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는 사실에서도 조문국이 신라에 어떤 의미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신라와 김씨 세력이 조문국 정벌에 심혈을 기울인 데는 교통요충지라는 단순한 전략적 가치를 넘어선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지질조사에서도 신라의 찬란한 황금문화를 뒷받침하는 금광이 경주 주변에는 없었던 반면 금성면을 중심으로 안동, 예천, 상주 등지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즉 신라의 김씨 세력에 있어 조문국은 오랜 기간 왕실 장악을 가능하도록 한 힘의 근원이자, 경제력을 제공한 든든한 후원지였다.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이 지역은 경북북부 내륙이나 낙동강 중상류 지역에서 경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조문국 사적지 정상에 올라 주위 풍경을 살펴보면 한눈에 교통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1960년대부터 7차례에 거친 문화재 시·발굴과정에서 조문국이 가지는 가치는 충분히 검증되고 있다. 가장 최근인 2007년 실시된 조문국사적지 내 고분(대리리 2호분)에서 발견된 3기를 비롯해 금성면 탑리·대리리 등지에서 김씨의 표지적 묘제인 적석목곽분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김씨 세력의 조문국에 대한 장악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대목이다. 따라서 조문국의 복속은 김씨 왕조는 물론, 신라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의성=마창훈기자 topgun@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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