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 백반정식집 이야기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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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15   |  발행일 2014-08-15 제41면   |  수정 2014-08-15
고슬고슬한 밥…깔끔한 국물 맛…넉넉한 반찬 인심 ‘백반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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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탕, 아귀탕, 도루묵찌개 등 그날그날 장을 봐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주메뉴와 반찬을 고향 엄마밥상처럼 차려내는 대구시 중구 인교동 태화식당의 한없이 조촐한 대구탕 백반정식.
세상사 단순·소박함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빈티지 오디오 마니아도 온갖 진귀한 오디오를 넘나들다가 끝내 손바닥만한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경우가 많다.

식도락가가 미식가로 진화하고, 그 미식가가 오대양 육대주를 돌면서 온갖 산해진미에 통달해도 혓바닥은 만족 못하고 뭔가를 더 갈구한다. 혀가 평화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이 또한 미식가의 굴종이 아닐 수 없다. 혀가 더 맛있는 걸 찾으면 세계 최고 셰프도 그 입맛을 만족시킬 수 없다. 나그네식객은 결국 더 맛있는 게 아니라 ‘더 맛없는 길’로 접어든다.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이 만나는 접점에서 제대로 된 음식이 탄생된다. 바로 ‘집밥’이 아닐까. 그 집밥이 제대로 된 식당에 안착하면 그게 바로 ‘백반정식’이다. 고장마다 그곳만의 백반정식이 있다. 전북 전주는 전주비빔밥으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전주식 백반정식을 한 상 받아봐야 한다. 요즘은 8천원 안팎에도 20가지 이상 곁반찬이 형성된다.

식도락 여행의 첫 단추는 바로 이 지역별 백반정식을 찾아나서는 일이다. 이 정식은 제주의 깊은 바위틈에 숨어 있는 다금바리처럼 여느 낚시질엔 좀처럼 낚이지 않는다.


◆ 프랜차이즈에 잡아먹히는 백반정식집

식재료는 모두 자신만의 색과 맛과 향기, 영양소와 영양분, 열량을 갖고 있다. 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식재료를 하나로 뭉쳐줄 수 있는 융화력을 갖고 있다. 그 융화력이 본연의 맛에 이르도록 하는 건 결국 불과 식재료의 혼합비율, 그리고 간과 향신료와 양념이다.

지역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척추 음식’이 있다.

한 나라에도 척추 음식이 있다. 한국은 당연히 한식(韓食)일 것이다. 한식도 팔도마다 그 자태가 다르다. 100년 이상 특정 지역에서 베스트셀러푸드가 되면 그게 ‘전통음식’이 되고, 일정 기간 반짝 사랑을 받고 있으면 ‘향토음식’에 포함된다. 그런데 갈수록 우리의 입은 ‘트렌디 푸드(Trendy food)’로 분류될 수 있는 각종 대박 난 프랜차이즈 메뉴에 목을 맨다. 이번 여름 부산에서 태어난 ‘설빙’이 단위 시간당 가장 많은 손님을 끌어모은 메뉴로 기록된다. 지난해 4월 부산시 수영구 남천동의 떡카페 ‘시루’에서 처음 선보인 설빙은 인절미설빙 등이 선풍을 일으키면서 ‘한국디저트카페 신드롬’의 주인공이 된다. 이즈음 대구 유명 백반정식은 어디에 다 숨어 있을까.

현재 대한민국의 한식은 크게 백반정식과 한정식으로 양분된다.

한정식도 전라도 같은 한상차림파와 코스식 한정식파로 분류된다. 백반정식파의 손맛은 6·25전쟁 직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백반집 아줌마로부터 비롯된다. 이 아줌마 중 상당수는 한때 특정 언저리에서 ‘주모(酒母)’급으로 행세를 했다. 그 시절, 그래도 남존여비문화가 엄존했을 당시엔 지근거리에 시댁 식구가 포진해 있어 대놓고 눈 밖에 난 지아비의 행신에 대해 바가지를 긁기 뭣했다. 그냥 ‘은장도 버전’으로, ‘모름지기 참아야 하느니라’ 버전으로 응어리진 맘을 삭혀야만 했다. 풍류랍시고 나부댔던 지아비들의 한량놀음은 술과 음식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던 ‘주막형 선술집’을 중심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 선술집엔 그 어떤 기질의 남정네도 단번에 촛농처럼 녹여버리는 주모가 ‘부적’처럼 앉아 있다. 평소 먹고 싶은 반찬도 그 주모는 단번에 해결해준다. 소 팔고 남은 돈이 얼마인지 그 주모는 단번에 알아버린다. 어물전에서 사 온 고등어도 술안주로 둔갑해버린다. 낮부터 시작된 낮술행진은 근처 지인이 송사리 떼처럼 몰려들면 더욱 기고만장해진다. 길 경우에는 1주일도 서슴지 않았다. 속이 탄 아내는 아이를 술집에 보내 지아비를 귀가토록 종용한다. 주종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안주가 올라온다. 주모는 못하는 음식도 못 부르는 노래도 없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대령해야만 한다. 하지만 주모문화는 ‘핵가족문화’에 잡아먹혀 버린다. 시댁에서 독립한 아내는 평소 독수리 같던 남편을 졸지에 ‘참새’의 행색으로 반죽해버린다. 손님이 들지 않는 선술집, 그 시절 그 주모는 다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바로 ‘백반정식집’이다. 여긴 대표메뉴가 없다. 주면 주는대로 먹어야 된다. 그게 매력이다.


◆ 태화식당 할매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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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몇 개 남지 않은 대구의 마지막 백반집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태화식당. 분홍 티셔츠 차림의 금호 할매는 주단골인 실버세대를 마치 남편처럼, 시댁어른처럼, 친구처럼 살갑게 맞이해준다.

대구시 중구 인교동 오토바이 골목 중간에 있는 태화식당.

날렵하고 모던한, 노출 콘크리트조 레스토랑 문화에 젖어 있는 네티즌에겐 다소 충격적일 정도로 낡고 불편하고 누추한 공간으로 다가설 것이다. 그런데 50대 이상 장·노년층에는 ‘기립박수’감이다. ‘대구 백반의 명맥을 잇는 마지막 식당’으로 사랑받는다. 풍류절정의 문풍(文風)을 날리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국의 사각지역 먹거리를 찾아다니는 풍류식객 겸 수필가인 구활씨가 이 집을 소개했다. 이후 기자도 단골이다. 대구 서민밥상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미식가가 오면 어김없이 데려간다. 다들 세 번 놀란다. 직원 한 명 없이 할매 혼자서 모든 걸 다 해결한다는 것에 놀라고, 문을 열고 단 한 번도 리모델링하지 않아 낡을 대로 낡은 실내 정경에 또 한 번 놀라고, 마지막엔 깔끔하기 이를 데 없는 국물 맛과 마치 사위 대하듯 마구 내주는 옹골차고 손맛 가득한 곁반찬의 행렬에 놀란다.

금호 할매는 이름을 싫어한다. 몇 번 물어도 대답을 안 한다. 영천시 금호가 고향이라서 그냥 ‘금호 할매’라 한다. 지역 백반집 중에선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다. 이와 쌍벽을 이루는 대구식 한정식 전문점은 34년 역사의 중구 삼덕동 청맥식당(한정식)이다. 경주 출신인 김정숙 사장도 ‘욕쟁이 할매’로 불린다. 이 집은 다른 집에선 보기 힘든 팥잎 요리로 유명하다. 이 밖에 원대동 자갈마당식당(복어), 수성보건소 골목 안 가덕식당(콩나물비빔밥), 중구 대봉동 청산식당(청국장), 동구 신천동 거창식당(어탕국수), 고령식당(된장찌개), 동대구역전시장 안 할매식당(동태탕) 등도 주인 손맛이 담긴 밥상이다.


인교동 오토바이골목 중간 ‘태화식당’
대구 백반의 명맥 잇는 마지막 가게
주인 할머니 혼자 요리·서빙·설거지
사위 대하듯 후하게 내주는 반찬행렬
50대 이상 장·노년층 식도락가 줄 서


금호 할매는 너무나 억척스럽다. 일이 곧 쉼이고 놀이다. 50여년 쉬는 날도 없고 그 흔한 영화도, 그 흔한 해수욕장 같은 데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현재 자리로 오기 전에는 현재 덕영치과 입구 대로변에 있었는데 그때는 직원이 5명이나 있었다. 줄 서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대박집이었다. 생선찌개·매운탕·낙지볶음으로 소문이 났다. 12년여 전 여기로 이사를 와서는 경기도 예전 같지 않아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요리에서부터 서빙·설거지까지 도맡고 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귀찮아 집에 가지 않고 식당 한편에 방석을 깔고 잔다. 일어나면 서문시장과 칠성시장에서 그날 사용할 대구, 아귀, 도루묵 등 제철생선을 장만해 온다. 손이 저울이다. 대충 주물럭거렸는데 식감은 맘껏 부푼다.

기분이 좋으면 꼭 단풍을 손에 쥔 여고생처럼 배시시 웃으며 독백톤으로 ‘인생사 다 그런 것 아니냐’는 푸념식 신세타령이 이어진다. 단골도 다 비슷한 인생의 강을 건너고 있어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다. 태화에는 주인도 없고 손님도 없다. 다 손님이고 다 주인이다. 그래서 신경림의 시 ‘농무’의 한 대목처럼 더없이 정겹다. 할 말만 하고 요리할 땐 한없이 무뚝뚝해 욕쟁이 할매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전국에 적잖은 욕쟁이 할매가 있다. 대표 격은 신분을 감춘 박정희 대통령에게 꼭 박정희처럼 생겼다고 인정 어린 욕을 한 전북 전주 콩나물국밥 명가 삼백집의 이봉순 할매, 전남 순천 별량시장 삼거리에 있는 욕보할매집의 이정남 할매, 문경새재 초입 할매집의 황학순 할매, 울산시 대안동 신흥다리 근처 울산 욕쟁이 할매, 서울 성북구청 후문 돈암성당 옆 우렁밥으로 유명한 신신식당의 욕쟁이 할매, 안동시 용상동 복개시장 끝 지점에서 매일 군복만 입고 있는 안동 군복 할매 등이다.

‘항상 기운이 없어 보이는 저 금호 할매가 세상을 떠나면 어느 집에서 저런 맛을 찾을 수 있을까’ 다들 금호 할매를 걱정한다. 숱한 기자가 취재를 하고 싶어 했지만 모두 불발이었다. 기자도 물먹었다. 생각해보니 취재 자체가 ‘언폐(言弊)’였다. 파워블로거가 사진을 찍으려 하면 정색하면서 ‘사람 얼굴 함부로 찍지 마라’고 경고한다. 허락받지 않았지만 태화의 눅눅한 얘기를 적고 싶었다. 금호 할매도 이해할 것이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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