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4]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8> 포항의 세 충비 단량·순량·갑연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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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26   |  발행일 2014-08-26 제13면   |  수정 2021-06-15 16:42
노비의 신분을 뛰어넘은 충절, 의리, 그리고 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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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광남서원의 뜰 한편에는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단량비 2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왼쪽에 위치한 비는 정조 때 황보씨 가문의 후손들이 세운 단량비이고, 오른쪽의 비각 내부에 있는 단량비는 후손들이 새롭게 세운 것이다. 2개의 비석에는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영남일보 DB>

 

◇ 스토리 브리핑

포항에는 충절을 지킨 ‘충비(忠婢)’ 단량, 순량, 갑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조선시대의 엄격한 신분제하에서 노비로 살아야 했지만, 이들이 지킨 충절과 의리는 신분제의 한계를 뛰어넘어 많은 이들의 존경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구룡포의 단량은 역적으로 몰린 가문의 자손을 돌보아 주었고, 곡강천의 순량은 모시던 주인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따라 죽었다. 

연일읍의 갑연 또한 주인을 구하려 자신의 목숨을 버린 충절의 상징이다. 

‘2014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 8편은 양반 못지않은 절개를 지켰지만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세 명의 충비에 관한 이야기다.



#1. 구룡포의 충비 단량

내일모레면 호패 찰 나이가 된 황보단은 놀란 눈으로 앞에 앉은 중년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할머니로 믿고 따랐던 여인이 실은 조부가 부리던 가비(家婢)라는 얘기에 그저 망연자실할 따름이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소인을 할머니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또 그동안 행했던 잘못이나 불손함이 있었다면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스스로를 노비 단량(丹良)이라며 신분을 밝힌 여인이 털어놓은 이야기엔 놀랍고도 참혹한 역사적 비밀이 숨어 있었다.

계유정난, 그러니까 수양대군이 왕위를 노려 난을 일으켰던 단종 1년(1453) 10월에 당시 영의정을 지내던 황보인(皇甫仁)은 좌의정 김종서와 함께 어린 단종을 보필하다가 수양대군의 칼날에 무참히 살해되었다. 또한 왕명이란 전갈을 받고 한밤중에 궁궐에 모여든 수십 명의 대신 역시 수양대군 군사들의 손에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황보인의 차남 흠은 곧 황보 가문에 멸문의 화가 닥쳐올 것임을 알았다. 달아날 길은 없었다. 도성을 에워싼 성문은 이미 수양대군의 군사들이 장악하고, 오가는 사람들을 엄중히 검색하고 있을 게 자명했다. 다급한 궁리 끝에 흠은 노비 단량을 불렀다. 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심지가 깊고 충절을 지닌 노비였다.

“물동이에 넣으면 될 듯합니다.”

아들 단을 몰래 도성 밖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말에 단량이 순간적으로 궁리해낸 방안이었다. 황보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르는 먼 길에 사용하도록 금붙이 몇 개를 물동이 안에 넣어준 사람은 흠의 처였다.

새벽녘, 물을 길으러 가는 아녀자처럼 행색을 꾸민 그녀는 파루소리가 들리자 곧장 아기를 숨긴 물동이를 이고 경비가 삼엄한 성문을 통과해 도성을 빠져나왔고, 멀고 먼 팔백 리 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경상도의 북쪽 봉화의 닥실마을이었다. 황보인의 친척이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 역시 마음 놓고 머물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언제 한양에서 첩보를 받은 수양대군의 군사들이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집주인인 윤당과 의논 끝에 그녀는 단을 데리고 홀로 피신길에 나섰다.

그렇게 무작정 물설고 낯선 지방을 걸인처럼 떠돌길 수개월, 마침내 아기를 업은 단량이 도착한 곳은 동해안의 한적한 바닷가, 대보면 짚신골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단을 소년이 된 지금까지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워냈던 것이다. 참으로 충직하고 의로운 여인이었다.

후일, 충비 단량의 충절과 희생으로 멸문지화를 피한 황보 가문은 4대째 숨어 살다가 숙종대에 와서 역적 누명이 풀렸고, 황보인과 두 아들인 황보석, 황보흠은 관적을 회복했다. 또한 황보인의 손자 황보단을 살려서 키워준 단량의 고마움과 뜻을 기려서 비석을 세웠다. 지금 비석은 구룡포의 광남서원(廣南書院)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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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비 순량의 비석은 포항시 북구 칠포해수욕장으로 흘러드는 곡강천 하류의 한 야산 암벽에 조각되어 있다. 순량의 암벽 비석은 인조 8년(1630) 순량의 미담을 전해들은 흥해군수 조성에 의해 제막됐다. <영남일보 DB>
 

#2. 곡강천과 충비 순량 

 

유서 쓰기를 마친 처녀는 원망하듯 마당 끝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애써 입술을 깨물었지만 눈물이 방울지어 흘러내렸다. 그녀로선 어쩔 방도가 없었다. 관아에 끌려가게 되면 자신은 물론 가문에 커다란 누를 끼치게 될 터였다. 그렇다고 혼자 도망칠 수도 없었다. 자탄에 빠진 그녀의 머리에 한 양반 사내의 가증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낮에 그녀는 풍광이 아름다운 흥해 곡강 어귀에 봄나들이 겸 빨래를 나갔다. 얼마 지나서 강가에 한 양반 사내가 나타났다. 작은 체수에 갓을 쓴 모습이 왠지 천박하고 음탕해 뵈는 사내였다. 몇 번 말을 걸어도 모른 체했더니 자신의 알량한 지식을 뽐내기나 하듯 시를 한 곡조 읊는 게 아닌가.

‘너는 삼척검도 아니면서 몇 장부의 애간장을 끊었느냐’는 다분히 희롱조의 시였다. 노는 짓거리가 한심해 보여 그녀는 ‘나는 중국 형남(荊南)의 화씨벽(和氏壁) 같은 보배로 우연히 곡강두(曲江頭)에 유랑하지만 어찌 계림의 썩은 선비와 같이하리’라는 뜻의 시를 읊었다. 그게 불찰이라면 불찰이었다.

양반 사내는 흥해군수와 친구 사이로 며칠간 유람차 와 있었다. 일개 평민 아녀자에게 무안을 당한 것에 모욕감을 느낀 사내는 곧장 흥해군수에게 이 일을 알렸고, 친구의 수모를 자신의 일로 받아들인 흥해군수는 대로하여 처녀를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미리 이를 엿듣게 된 안면 있는 사령 하나가 달려와 어서 도망치라며 그녀에게 일러주고 갔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도는 없었다. 몸을 일으킨 처녀는 몸종을 찾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를 보살핀 충직하고 심성 착한 몸종으로 이름이 순량(順良)이었다. 유서를 건넨 그녀는 순량의 만류를 뿌리치고 곡강으로 달려갔고, 북미질부성 아래의 참포관소(塹浦官沼) 깊은 물에 몸을 던졌다. 뒤를 쫓아간 순량 역시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 사연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30여 년이 흐른 후인 인조 8년(1630)이었다. 사연을 듣게 된 신임 흥해군수 조성(趙)은 이씨 처녀와 충비 순량이 투신한 절벽 바위에 비를 세우도록 하고 손수 비문을 지었다. 그것은 종의 신분으로 주인을 따라 순사한 순량의 충절을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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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북구 흥해읍 영일민속박물관에는 주인을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충비 갑연을 기리는 비석이 전시되어 있다. 이 비석은 원래 포항시 북구 용흥동 연화재 고개에 방치되어 있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영남일보 DB>
 

#3. 연일읍의 충비 갑연 

 

조선 말기인 순조 30년(1830). 동해와 가까우면서 형산강 포구를 낀 어시장이 형성되어 물산이 풍부한 연일현(延日縣: 지금의 포항 연일읍)에는 몰락한 양반집 출신으로 용모가 아름답고 정결한 성품을 지닌 송씨 여인이 살고 있었다. 박복한 탓인지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하여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달리 먹고살 길이 없던 여인은 살림집을 여관으로 꾸며 호구지책으로 삼았다. 다행히 그녀에겐 시집올 때 데려온 갑연(甲連)이란 젊은 몸종이 있었다. 심성이 충직하고 바지런해서 어렵고 힘든 일을 마다않고 해주는 덕에 그럭저럭 여관을 운영해 갈 수 있었다.

어느 날, 여관으로 덩치 큰 사내가 찾아들었다. 인근 포구의 상인들을 윽박질러 자릿세를 뜯거나 술을 먹고 패악을 부리는 걸 업으로 삼는 탓에 ‘각다귀’란 못된 별명까지 얻은 작자였다. 험악한 생김새만큼이나 성정이 모질고 사나운 데다가 따르는 패거리까지 있어 고을 아전들도 어쩌지 못하는 천하에 몹쓸 불량배였다.

상황을 살펴본 작자는 송 여인의 뒤를 보아줄 관리나 일가친척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송 여인은 물론 여관집까지 통째로 삼키려는 흑심을 품었다. 작자는 무시로 여관을 들락거리며 음담패설과 욕설에 나중엔 강제로 욕심을 채우려 들었다. 하지만 작자에게 봉욕을 당할까 두려워 누구도 선뜻 말리려 나서는 이가 없었다.

홀로 수치심과 울분을 견디던 송 여인은 결국 장터 앞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를 안 몸종 갑연이 “주인께서 돌아가시면 저는 어찌 혼자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울부짖으며 송 여인을 따라 강물에 뛰어들었다.

갑연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물에 빠졌던 송 여인이 떠올랐고, 뱃사공들의 도움으로 겨우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주인을 구하느라 기력이 다한 갑연은 급류에 휩쓸려 안타까운 죽음을 맞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과 포구의 상인들은 모두 송 여인의 절개와 주인을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갑연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당시 암행어사로 경상도를 순행하다가 이 사연을 알게 된 박기수는 조정에 상계를 올려서 순조의 정표(旌表) 명을 받고, 충비 갑연의 충정을 기려 직접 비문을 썼다.

‘하늘은 벌써부터 너를 홀로 두지 않았거늘 어찌 너만 혼자 죽게 하겠는가. 죽어서 그 마을에 정표하고 그 강가에 비(碑)를 세우니 누가 너를 비(婢)로 말하리오.’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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