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사랑 몸소 실천’ 구미치과의원 도영주 원장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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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29   |  발행일 2014-08-29 제36면   |  수정 2015-01-30
평일엔 치과의사, 주말엔 국토순례자…아내는 날 ‘도정호(고산자 김정호에 비유한 별명)’라 부른다
20140829
구미치과의원 도영주 원장이 대구 앞산 야간산행에 앞서 카메라를 보며 활짝 웃고 있다.

2004년부터 우리땅 걷기돌입
부산서 출발 동해안 길 걸어
각별 애정 낙동강 두번 종주
석등…석상…돌다리…돌탑
여행길에서 카메라에 담기도
개성공단 내 의료지원팀 활약
평양·금강산 등 구석구석 방문
北 삼지연 루트 백두산 등반땐
백두산정계비 터 특종 촬영
사진은 한국 중학 교과서 실려
3년전부터 한국의 등대 심취
지금까지 전국 30여곳 답사

구미치과의원 도영주 원장(51)의 별명은 ‘도정호’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 김정호’를 빗대 그의 아내 박시애씨가 붙여준 별명이다. 도 원장만큼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샅샅이 톺아본 사람도 드물다. 그의 여행답사 블로그 ‘이 땅에서 잘 놀기’에 들어가면 수긍이 간다.

도 원장은 1987년 경북대 치과대 본과 4학년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연애시절에도 틈만 나면 배낭을 둘러메고 아내와 함께 무작정 길을 떠났다. 91년 치과병원을 개업하고 1년 뒤부터 낚시와 골프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것 같아 2~3년 하다 말았다. 그런 가운데도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스쳐간 곳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역사나 지리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그가 본격적으로 국토사랑에 빠진 건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을 만나면서부터다. 신 이사장과 함께 2004년부터 올레길, 둘레길, 등산 할 것 없이 틈만 나면 국토순례에 동행했다. 낙동강을 사랑해 종주도 두 번이나 했다. 또 하나의 낙동강 발원지라고 일컫는 태백산 너들샘에서부터 부산 을숙도 하구 모래톱인 진우도, 백합등, 도요등까지 두 번 종주했다. 낙동강 옆에 오솔길이 열차터널밖에 없어 800m나 되는 승부터널을 왕복해 걷기도 했다. 부산에서 출발해 울진군 북면 고포리까지 휴전선 이남지역 동해안도 걸었다. 그는 이 바닷길을 히말라야의 차마고도를 빗대 한국의 ‘차마고도 바닷길’로 부른다.

“병원에 의사가 저 혼자라 평일에는 병원을 비울 수 없습니다. 주로 주말이나 휴일을 이용해 답사를 하지요.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입니다. 허허허.”

도 원장은 답사를 자주 다니면서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석조문화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변형되기 쉬운 목재에 비해 돌은 변하지 않는 게 매력이지요. 고려와 조선 임진왜란 이전에 일부를 제외하곤 고대목조문화재는 남아있는 게 얼마 안 돼요. 그에 비해 석조문화재는 엄청 많습니다.”

그는 석등, 석상, 돌탑, 승탑, 돌다리, 당간지주, 석장승, 전탑, 석빙고 등 한국의 석조문화재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지정문화재로 등재된 전국 300여개의 불상 가운데 200여개의 불상과 100여개의 석등을 모두 촬영해 기록할 만큼 돌에 빠졌다.

“90%는 쉽게 찾아내는데 나머지 10%를 찾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크기는 물론 색감에 경외심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경주 남산 약수계곡에 있는 목 없는 마애입불상도 뇌리에 남는 불상입니다.”

2007년 도 원장은 신 이사장과 함께 중국 랴오닝성 단둥을 거쳐 백두산 천지 답사를 했다. 일행은 연길을 거쳐 백두산 북쪽 루트로 갔으나 그는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과 함께 따로 10시간이 넘도록 밤새 차를 타고 장백조선족자치현으로 가서 동쪽 루트로 백두산정상에 올랐다. 추가로 200만원이 더 들었으나 중국에 와서 백두산의 한쪽 면만 본다는 게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이튿날 다시 일행과 합세해 북쪽 천문봉을 올랐다. 2008년 가을에는 북한의 삼지연 루트를 통해 백두산 장군봉을 밟았다. 백두산 등정코스를 다 가본 셈이다. 북한 쪽으로 가던 중엔 특종사진도 촬영했다.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가다 백두역에 다다를 즈음 앞서 갔던 케이블카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백두역 초소 옆 주차장에 차가 멈췄습니다. 화장실에 간다고 안내원한테 말한 뒤 쫓아가서 백두산정계비 터를 찍었습니다. 육각형 검은 돌에 흰 페인트칠을 한 정계비였습니다.”

그가 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여행을 하기 전 세밀히 자료를 챙긴 덕분이었다. 백두산정계비가 백두역 부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천운이 따랐던 셈이다. 후에 이 사진은 한국의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평양, 개성, 금강산 등 북한지역을 17번이나 방문했다. 개성공단 내 치과병원 의료지원팀의 일원이었기에 가능했다. 개성에 근무할 동안 고려박물관을 방문해 금지구역에 있던 석탑을 찍으려다 북한 군인이 지키는 바람에 실패했다. 다시 박물관을 방문해 석탑을 찍다 군인에게 들켰다.

“군인이 호루라기를 불고 깃발을 흔들더군요. 안내원에게 들켰으나 카메라에 찍힌 것들을 다 보여줬지요. 부도탑과 미륵불 등 돌만 찍은 걸 보더니 웃으며 보내주더군요.”

도 원장은 봄, 여름, 겨울을 이용해 금강산만 네 번이나 갔다. 그가 가을에 금강산을 가지 않은 건 가을의 금강산을 가면 더 이상 갈 생각이 안 들 것 같아서다. 그는 금강산의 속살인 내금강까지 다 봤다. 거기에 있던 각종 불상과 장안사의 승탑도 찍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사망 때에는 북한 내 수해물자모니터링 요원으로 평양에 있었다. 10명의 한국국적자 가운데 대구 출신으론 그가 유일했다. 도 원장은 TV를 보다 김 위원장의 사망 사실을 알고 호텔 창문을 통해 평양에서 조기가 게양되는 사진을 처음으로 찍었다.

“북한에서의 모든 일정이 취소되고 바로 출국조치 됐습니다. 그런데 베이징으로 가던 비행기가 압록강까지 갔다 되돌아왔어요. 순간 억류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어요. 회항해서 평성에 착륙하고 난 뒤 순안공항에서 다른 비행기를 바꿔 타고 다시 베이징으로 향했지요. 아마 우리가 처음 탔던 비행기가 새 비행기라서 그랬을 것이라 추측했습니다. 새로 탄 비행기는 낡고 작은 비행기였으니까요.”

그는 3년 전부터 어둠 속에서 빛을 밝혀 길을 안내해주는 등대에 빠져 한국의 등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30여개의 유인등대를 답사했다.

“등대를 찾기 위해선 먼저 섬에 가야 합니다. 마라도, 독도, 결렬비열도 등 수많은 섬을 찾았습니다. 12시간이나 배를 타기도 했지요. 조그만 낚싯배를 타고 가다 4시간 동안 풍랑을 만나 죽을 뻔한 경험도 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팽목항 인근도 사고가 일어나기 전 아내와 가봤어요. 아내가 사고가 일어난 뒤 팽목항에서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지요.”

그는 10년 이상 두 달에 한 번 구미 가톨릭근로자회관에서 외국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무료진료를 하고 있는 따뜻한 사람이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도예종 열사가 작은 할아버지이고, 통일운동가 도혁택 선생이 선친이기도 하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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