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4-구미] 낙동강 물길따라<11> 한국의 실리콘밸리 구미국가산업단지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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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01   |  발행일 2014-09-01 제13면   |  수정 2021-06-15 17:53
조국 근대화의 첨병…박정희 대통령 정치적 부담에 유치 무산될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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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국가산업단지는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출발점이자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해 왔다. 구미국가산업단지는 2천만여㎡ 부지에 1·2·3·4단지가 조성돼 있으며 현재 5단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영남일보 DB>

 

<스토리 브리핑>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며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구미국가산업단지의 역사가 40년을 넘어섰다. 

내륙의 작은 도시였던 구미는 구미국가산업단지를 발판삼아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구미국가산업단지는 1974년 7천900만달러 수출을 기록한 이후 1년 만에 수출 1억달러를 돌파했고, 2005년에는 수출 300억달러를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채 반세기에 못 미치는 기간에 낙동강변의 습지가 최첨단 산업도시로 성장한 것이다. 

‘스토리의 寶庫-구미 낙동강 물길 따라’ 11편은 한국 전자산업의 출발점이자 차세대 IT산업의 중추를 꿈꾸는 구미국가산업단지에 관한 이야기다.


소금기 적은 내륙에다 물류중심
낙동강 풍부한 수자원 활용까지…
전자산업 최적의 조건 갖췄지만
박정희 대통령, 고향 이유로 반대

우리도 이젠 잘 살아야 하지 않나”
곽태석·이원만 회장 등 기업인과
지역민의 끈질긴 설득·노력 ‘큰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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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공단1동 KEC부지에는 곽태석 회장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구미 선산 출신인 곽 회장의 애향심은 남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남일보 DB
 

◆ 국가산업단지를 유치하라 

 

‘쾅~쾅~부르릉~.’

1969년이 끝나갈 즈음의 구미시 낙동강변, 훗날 국내 최대규모의 전자산업단지로 거듭날 부지의 조성공사가 한창이었다. 당시 선산군 구미읍 낙동강 일원 400만㎡ 부지를 분주히 오고가는 덤프트럭 등의 중장비 소음은 대한민국 전자산업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금오산 아래 낙동강 서안의 논밭과 습지가 국가경제발전의 한 축으로 변하는 역사의 현장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산업단지 조성이 한창인 가운데 건설 중인 공장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기업인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재일교포 기업인으로 구미 선산 출신의 곽태석 회장이었다. 곽 회장은 일본과 합작한 한국도시바(현 KEC) 공장의 건설을 진지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나 감격적입니다. 우리 고향에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지을 줄이야….” 곽 회장은 산업단지 관계자들에게 자신의 감흥을 감추지 않았다. 드디어 금의환향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곽 회장이 조성 중인 산업단지에 급히 공장을 건설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수도경찰청장을 지낸 장택상 가문의 장월상 구미농지개량조합장의 부탁 때문이었다.

“곽 회장님, 우리 고장도 이제 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장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얼마 전 장월상은 곽 회장에게 하루빨리 반도체 공장을 건설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미 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곽 회장이 국가산업단지 입지 결정 전에 공장을 건설한다면, 구미가 신규 국가산업단지로 선정될 가능성은 한층 높아질 터였다.

“좋소. 장 조합장의 생각이 그렇다면야.” 곽 회장은 장월상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곽 회장의 입장에서도 손해볼 것은 없었다. 구미의 경우 소금기가 적은 내륙지역으로 전자산업의 입지에 딱 들어맞는 곳이었다. 또한 장월상은 박정희 대통령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에 내심 그에게 거는 기대감도 있었다. 게다가 장월상은 고향 구미에 대한 애착이 크고 수완을 지닌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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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는 낙동강의 풍부한 수량 덕분에 전자산업이 입지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염분에 취약한 전자산업의 특성상 포항이나 창원 등 임해지역과는 차별화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영남일보 DB>
 

◆ 전자산업의 최적지 구미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야 하지 않겠소.” 1969년 1월3일, 구미읍사무소 회의실은 주민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선산군수 박창규와 장월상을 비롯한 50여명의 지역 유지가 국가산업단지 유치를 논의하고자 읍사무소에 모였다. “이제 우리 고향도 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날은 누구 할 것 없이 산업단지 조성에 한목소리를 냈다. 내친김에 ‘구미공업단지건설추진위원회’를 설립했고 장월상은 위원장을 맡았다.

당시의 구미는 발전을 거듭하는 타 도시에 비해 결코 변화의 속도가 빠른 편이 아니었다. 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이후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대통령의 고향 구미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68년, 구미의 인구는 2만여명으로 1차산업 종사자가 70%를 넘는 농촌지역이었다.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에 국가산업단지를 짓는 것에 대해 정치적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코오롱 창업주 이원만 회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사석에서 구미에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이 회장은 구미에 한국폴리에스텔(코오롱)을 설립, 구미산업단지의 활성화에 기여한 인물이다. 이 회장은 “구미가 각하의 고향이기 때문이 아니라 입지여건이 좋아서 공장을 짓는 것”이라며 “고향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구미공업단지건설추진위원회 설립 후, 장월상은 양택식 경북도지사와 만났다. 새로운 국가산업단지의 입지에 대한 담판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양 도지사는 당시 새로운 부지를 물색 중이었는데 구미가 유력 후보지가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다. 동해안이나 대구 인근에 신규국가산업단지가 갈 것이라는 말도 들려왔다.

“국가산업단지의 입지는 다른 곳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양 도지사는 살짝 머뭇거리며 장월상에게 답했다.

“안됩니다. 새로운 국가산업단지는 반드시 구미로 와야 합니다.” 장월상은 단호하게 양 도지사의 말을 받아쳤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 장월상은 묘안을 짜냈다.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를 갑자기 꺼낸 것이다. “각하가 직접 구미에 산업단지를 지으라고 하면 모양새가 나겠습니까? 고향이 발전하는데 각하께서 싫어하실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장월상은 끈질기게 양 도지사를 설득한 끝에 국가산업단지의 구미유치 약속을 받아냈다. 단, 부지 120만평(400만㎡)을 평당 220원에 매각한다는 조건이었다.

구미국가산업단지의 조성은 장월상 등 지역민들의 간곡한 요청과 몇몇 기업인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지만 정치적 결론은 아니었다. 사실 낙동강을 낀 구미국가산업단지는 전자산업을 일구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구미는 경부선철도와 경부고속도로를 낀 물류중심이었고, 낙동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다. 특히 염분에 취약한 전자산업의 특성상 포항이나 창원 등 임해지역과는 차별화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금오산 자락이 바람을 막아주었고, 전자산업에 치명적인 중국 황사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았다. 게다가 섬유산업이 발전한 대구의 풍부한 인적자원을 활용할 수도 있었다. 인근의 김천, 군위를 비롯한 농촌지역에서도 인력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구미국가산업단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후광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전자산업 진흥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고, 지역민들의 적극적인 유치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었다.


◆ 조국근대화의 우렁찬 고동

1970년 8월24일, 정부는 제8차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구미지역을 전자전문공단으로 만들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후 한국정밀기기센터는 상공부 등 각 부처 관료들과 구미공업단지건설추진위원회 등 단체 대표들을 아우르는 공단설립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73년에는 이미 조성된 전자공업단지와 일반단지를 합쳐 구미국가산업단지 제1단지가 조성되었다. 이후 구미국가산업단지에는 2·3·4공단이 들어섰고, 구미는 세계적인 전자산업도시로 거듭난다.



우리는 금오산 기슭의/쓸모없는 낙동강변 350만 평을
땀과 슬기 단결과 협조로써/전자공업단지를 이룩하였다.
이것은 보람찬 80년대로/행하는 하나의 디딤돌
하나의 전설/잘살기를 발돋움하는
민족의지의 표현 꿈의 실현/조국근대화의 우렁찬 고동
바꿔놓은 지도 위에/찬란한 태양이/영원히 빛나리라.


74년, 시인 박목월은 구미국가산업단지를 보며 ‘구미공단’이라는 시를 지었다. 당시 정부와 국민들이 구미국가산업단지에 걸었던 기대와 감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후일담이지만 구미국가산업단지에서 농사를 짓던 이들은 이 시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농민들은 “고향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국가발전을 위해 바친 옥답을 불모지로 인식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참고문헌=‘구미공단 40년사’
공동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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