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성석제 영주선비를 이야기하다 .2] 퇴계와 대장장이 배순, 그리고 소수서원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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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02   |  발행일 2014-09-02 제13면   |  수정 2014-09-02
배순 “까막눈이라 성현의 말씀을 말소리로라도 듣고 싶어…”
퇴계 “참으로 아름답구나… 나의 友學弟子가 되어주길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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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소수서원의 소나무는 서원에서 글을 읽는 선비들을 사모하기라도 하듯 줄기가 담장 안쪽으로 굽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의 ‘소수(紹修)’는 ‘끊어진 학맥(유학)을 되살려 닦는다’는 의미다.

#1.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대장장이

퇴계는 강학당에서 들려오는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명명하고 현판을 붙인 직방재(直方齋) 앞에서 담 너머로 소슬한 바람을 불어 보내는 소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을 이겨내는 강인한 기질로 ‘세한송(歲寒松)’으로 불리고 선비의 품성을 보여준다고 하여 ‘학자수(學者樹)’라고 불리는 소나무, 특히 서원 담장 바깥에 심긴 소나무는 붉고 미끈한 줄기와 욕심 없이 염결(廉潔)한 모양의 잎이 무척 고고하고 아름다웠다. ‘나무(木)의 귀족(公)’으로 이름이 만들어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소수서원의 소나무들은 서원 안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을 사모하기라도 하듯 줄기가 담장 안쪽으로 굽어 있는 게 남달랐다. 특히 소나무처럼 햇빛을 많이 필요로 하는 나무(陽樹)는 가지가 햇빛이 비치는 남쪽으로 굽는 것이 상례인데도 그랬다. 그런데 그 소나무 사이로 웬 수염투성이의 사내가 고개를 빼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옷차림이 더럽지는 않지만 상투를 틀었을 뿐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무명옷을 입은 행색으로 보아 양반의 후예이거나 학문에 관심을 가질 선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사내의 표정에는 강학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퇴계의 제자들이 처음 서원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처럼 뭔가를 배우고 알고 싶다는 열정이 들어 있었다. 퇴계 스스로가 공부와 호학(好學)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인물이었으므로 그런 감정을 가진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퇴계는 일신재에 있는, 여러 가지 일(諸任)을 맡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그 사내에게 보내 자신의 앞으로 데려오게 했다.

“어디 사는 누구시오?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

비록 상대가 신분이 낮은 백성으로 보이고 나이도 자신에 비해 한참 아래임이 분명함에도 퇴계는 언제나 그렇듯 하대를 하지 않고 물었다. 남자는 조선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학자이자 스승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퇴계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커다란 덩치를 둘러싼 옷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떨리고 있었다.

“스승님,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고 있는 배순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서원에 소요되는 쇠붙이 물품을 만들어 오게 한 적이 몇 번 있는데, 한 번은 풀무질이 부족해서 그런지 쇠가 그리 단단하지 않다고 하면서 물건 값의 절반만 받았습니다. 솔직하고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퇴계의 수제자이면서 서원의 초심자를 지도하는 직임을 맡고 있는 조목(趙穆)이 대신 말했다. 퇴계는 대장장이에게 사는 곳을 물었다.

“죽계계곡 위쪽에 있는 시골 동네입니다. 없는 재주로 쇠붙이를 만들어 팔며 입에 풀칠을 하고 있습니다. 천한 몸으로 주제를 잊은 채 감히 여러 선비들께서 공부하시는 것을 담 너머로 엿보았으니 죽을죄를 졌습니다.”


#2. 퇴계와 사제의 인연을 맺다

퇴계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선비들이 공부를 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오. 그대가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고 망치질을 할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경을 하는 게 어디 죽을죄인가? 들판에서 농부들이 김을 매거나 추수를 하며 격양가를 부르는 것을 과객이 즐겨 하며 듣는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이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선비들의 책 읽는 소리를 듣고 있었소?”

배순은 퇴계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평소에 사람이 무슨 이유로 나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알고 싶었는데 까막눈이라 책을 읽을 수가 없어서 공자, 맹자 같은 성현의 말씀을 말소리로라도 들으면 혹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지나는 길에 서원을 기웃거리게 된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성현의 말씀에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하였소. 그대는 비록 글을 몰랐지만 진정한 사람의 도리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고 세상을 밝히는 윤리에 대해 궁금해하니 공부와 학문을 입신양명의 수단으로나 생각하는 인간들보다 훨씬 사람됨이 의롭다 할 것이오. 공자께서도 유교무류(有敎無類)라 하여 배움에는 신분의 높낮이가 없다 하셨소. 또한 박학무방(博學無方)이라, 장소와 방위를 가리지 않고 어딜 가든 널리 배우는 것이 실로 마땅하오. 당장이라도 그대가 이곳에 들어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겠소. 내가 직접 가르칠 테니 나의 우학제자(友學弟子)가 되어주기를 바라오.”

배순은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미 밖에 나와 서 있던 정탁, 권문해 등의 여러 제자들이 시키는 대로 땅바닥에서 스승에게 최초의 절을 올림으로써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었다. 이리하여 평민 대장장이 배순은 훗날 퇴계 제자들의 이름을 모은 퇴계문도록(退溪門徒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퇴계의 제자 가운데 남사고, 김륭, 금난수, 정사성, 장현광, 권두문, 류치명, 김성일과 그의 네 형제 등 정관계와 학계, 당대의 명사를 망라하는 인물들이 소수서원에서 공부를 했다. 소수서원은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에서 첫 입원생으로 세 사람을 받은 이후 고종 25년(1888) 마지막 입원생이 입학할 때까지 총 4천여 명이나 되는 인재를 배출했다.


#3. 나라에서 으뜸 가는 서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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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강론하던 강학당. 인재의 요람이었던 소수서원은 개원 후 340여년 동안 4천여명의 유생을 배출했다.

명종 4년(1549) 새로 풍기군수가 되어 부임한 퇴계 이황이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인 백운동서원에 임금이 직접 쓴 편액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이듬해에 임금이 친필로 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과 노비, 전답, 서적 등이 하사되었다. ‘소수(紹修)’란 ‘끊어진 학맥(유학)을 되살려 닦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로써 소수서원은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 ‘나라에서 으뜸 가는 서원(首書院)’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백운동서원은 원래 중국 송나라의 주희가 남강태수로 있을 때 제자들을 모아 가르친 남강(南康, 현재의 주장시 싱쯔현)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설립한 것이었다. 퇴계 또한 주희를 본받아 풍기군수로 부임했을 때 백운동서원의 명칭을 소수서원으로 바꾸고 교육과정과 규모를 대폭 확충해 명실상부한 국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거듭나게 했던 것이었다.

1542년 주세붕이 문성공 안향의 위패를 봉안한 사묘를 숙수사 옛터에 건립하자 이듬해 한양의 순흥안씨 대종가에서 초상화(국보 111호)를 옮겨 봉안했다. 한 해 뒤에는 안향의 후손이자 죽계별곡의 저자인 문정공(文貞公) 안축(1287~1348), 그의 동생인 문경공(文敬公) 안보(1302~57)가 문성공의 좌우로 배향되었다. 문성공(文成公) 안향처럼 시호에 ‘문(文)’ 자가 들어가는 게 문관 또는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였다. 공자는 문선왕(文宣王)이며 주희는 주문공(朱文公), 주세붕은 문민공(文敏公), 이황은 문순공(文純公)이다. 소수서원의 영정각(도동각)에 초상이 모셔져 있는 여섯 인물은 주문공, 문성공, 문민공 외에 문익공(文翼公) 이덕형, 문충공(文忠公) 이원익, 문정공(文正公) 허목 등이다.

서원은 원래 선례후학(先禮後學)이라 하여 먼저 존경받는 선현을 제향하고, 그다음에 학문을 진흥하고 인재를 기르는(興學養士) 교육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 기능을 하는 것이 강학당이며 제사 기능을 하는 곳이 사당이었다.

나라에서는 소수서원의 입학 정원을 정하여 매년 삼십 명 이내로 뽑되 지역의 제한 없이 골고루 가르치게 했다. 때로는 지원자가 넘쳐서 입학 정원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후대의 풍기군수인 이준(李埈)이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이준은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전해지는 배순의 전기에서 배순이 집에서 벌을 기르고 있었는데, 함부로 벌을 죽이지 아니하려고 꿀을 딸 때에는 조금만 채취하였다고 썼다. 퇴계가 세상을 뜨자 몹시 애통해하며 무쇠로 초상을 주조하고 삼 년 동안 조석으로 경건하게 제사를 올렸다고도 했다. 배순은 궁벽한 시골에 살면서도 어질고 신의가 있고 스승과 나라의 은혜를 알며 집안을 다스림에 엄격하고 예절을 지켰다.

교육의 이유가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 사는 도리를 가르치고 배우며 후세에 전하는 스승과 제자가 있었기에 조선은 단일 왕조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도록 존속할 수 있었다.

그가 죽던 날 맑은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까마귀가 무리 지어 뜰에 모이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참된 충성 참된 효도 오직 배순뿐’이라는 시를 곽진이 썼다.

글=성석제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 : 박석홍 전 소수박물관장
공동기획 : 영주시


이야기따라 그곳&
배순 죽자 주민들 정려각 세우고 그의 姓을 따 ‘배점 마을’로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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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지만 퇴계와 사제의 인연을 맺고 예를 다한 배순에게 나라에서는 정려(旌閭)를 내렸다. 1615년 당시 풍기군수의 요청에 의해서다. 34년 뒤인 1649년에는 그의 손자 배종이 정려비<사진>까지 세웠다.

비석은 현재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에 가면 볼 수 있다. 지금의 비석은 1755년(영조 31) 배순의 7대 외손 임만유가 ‘충신’이란 말을 넣어 고쳐 세웠다. 배순이 죽자 주민들은 정려각을 세우고 그의 성(姓)인 ‘배(裵)’를 따서 마을 이름을 ‘배점’이라 불렀다. 정려비는 경북 유형문화재 제27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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