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개청 100년, 1914~2014 칠곡 .8] 글로써 항쟁하다 길에서 목숨을 내려놓은 ‘혜사 강원형’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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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05   |  발행일 2014-09-05 제11면   |  수정 2014-11-21
끊임없는 구국상소와 투서항쟁… 붓으로 일제의 칼과 맞서다

‘왜관개청 100년-1914~2014 칠곡’은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가 왜관으로 옮겨 개청한 1914년부터 100년 동안, 칠곡의 주요 역사와 인물을 다룬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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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군 지천면 신리에 있는 강원형 애국지사 기념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강원형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65년 10월에 세웠다.

◇ 스토리 브리핑

혜사 강원형(蕙社 姜遠馨, 1862~1914)은 칠곡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백하 강의영(白下 姜宜英)의 아들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성윤(聖允)이다. 1890년(고종 27)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제수받았고 그 후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5년 1월 동지들과 일본 공사관에 공개장을 보내어 불법을 지적하고 규탄하였다. 또한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3도 유생연명소를 올렸고, 잇단 위국활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45일 만에 출옥하였다. 이후 강제합병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던 중 1914년 객지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대한 공로로 칠곡군 지천면 신리에 기념비를 세웠으며, 1980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 총명하고 명민한 소년

여러 어른이 모인 사랑이 훈훈했다. 더위는 더위였고, 온기는 온기였다. 그것이 핏줄의 힘이었다. 그 자리에 어린 사내아이가 끼어있었다. 또랑또랑한 눈망울이 시원했다. 그런 아이를 지켜보던 한 어른이 짐짓 장난처럼 아이에게 물었다.

“어디 ‘여름일과’로 운을 뽑을 터이니 시를 만들어 보겠느냐?”

“예.”

곧이어 아이의 오막오막한 입에서 낭랑하니 시 한 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有日大野風光烟世界(유일대야풍광연세계)/ 高山雲氣雨精神之(고산운기우정신지)/ 句滿座莫不嗟歎(구만좌막불차탄)

큰 들의 풍광은 연기세계요, 높은 산 구름 기세는 비의 정신이라 (…)



아이의 나이 고작 열 살이었다. 둘러앉아 있던 어른들이 감탄하기에 충분했다. 아이의 이름, 바로 강원형이었다.

“허어, 원형이가 인물이로세.”

“우리 집안에 자랑이 되겠구나.”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명민했던 강원형은 1890년(고종 27), 27세 되던 해에 명경과에 일찌거니 급제했다. 이후 종9품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제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2. 직언과 충언을 아끼지 않은 신하

강원형은 개혁적인 사람으로 성장했다.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이 시작되기도 전에 노비해방을 주장했을 만큼 진취적이기도 했다. 갑오경장은 재래의 문물제도를 버리고 근대적인 서양의 법식(法式)을 본받아 새 국가체제를 확립하려던 정책으로, 정치·사회개혁의 대표적인 사항에 문벌(門閥)과 신분계급의 타파, 노비제도의 폐지, 조혼 금지 그리고 부녀자의 재가 허용 등이 들어있었다.

그런 그가 늘 탄식해 마지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어지러이 돌아가는 정치판이었다.

“환관과 척신이 마구 설쳐대는 것과 문란한 풍습에 있어서는 더욱더 통탄스러우니, 정치의 묵은 폐단은 마땅히 갈아버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35세 되던 1896년, 불행이 또 다른 불행을 찾아 세상을 더듬거리며 나아갔다. 왕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감행한 것이다. 국가적 수치였다. 아관파천이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공사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을 이른다. 한 나라의 왕과 왕세자가 자국의 왕궁에 있지 못하고 타국의 공관에 피신해 그 나라 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그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그러자 강원형은 왕의 환궁을 간절히 원한 나머지 서울까지 직접 올라가 상소하였다.

“삼가 아뢰옵나이다. 첫째, 미신을 믿지 말고 속히 환궁하여 국체를 완전히 하소서. 둘째, 구제도를 시대에 적합한 학식으로 확립하소서. 셋째, 충량한 인물을 선택하여 관(官)의 법도가 문란해짐을 막으소서. 넷째, 전답을 측량하여 은결(隱結, 조선 시대에 탈세를 목적으로 전세(田稅)의 부과 대상에서 부정·불법으로 누락시킨 토지)의 폐를 막아 민생을 안정케 하소서. 다섯째, 사치를 금하고 경비를 절약하여 재정을 안정하게 하소서.”

그러나 이는 즉시 시행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감시하고 이단시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3. 몸을 아끼지 않은 독립운동가

붓에서 검정 물방울 하나가 또옥, 떨어졌다.

“500년의 종묘사직을….”

물방울이 찰싹 달라붙은 채로 말라버리자 종이가 울었다. 강원형도 따라 울고 싶었다. 하지만 강원형은 다시 붓을 들어 종이에 힘을 실었다.

“500년의 종묘사직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는 듯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바로 ‘13도유생연명소(十三道儒生聯名疏)’였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전국의 유생들이 입을 모아 상소를 올렸는데 그를 주도한 이가 바로 강원형이었다.

나아가 강원형은 각국 공관에도 글을 보냈다.

“대저 자주라는 것은 자국의 주권을 자주(自主)함이요, 독립이란 것은 자국의 기초를 독립하는 것이라. 이제 일본이 우리나라에 자주의 권과 독립의 기초를 자연 부식하여 침해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정치적인 권한뿐만 아니라 철도·항만·산림 등의 권한마저 탈취해가는 일제를 향해 언어도단이라고 크게 부르짖었다. 이후에도 강원형은 수십 번이나 일제 공관을 향해 날로 노골화해가는 침략수법을 통렬히 비난했다. 또 즉각적으로 중단하지 않으면 어떠한 형이라도 달게 받고 행동으로 저지하겠다는 강경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그렇게 4차례에 걸친 투서항쟁과 6차례에 걸친 구국상소를 보내는 등 애국이념의 헌신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05년 11월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되었을 때도 그의 웅변은 계속되었다.

“이제 이 협약은 바로 일국의 길이 망하는 기틀이라. 황상께서 불가(不可)라 하시었고 정부의 주무인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불가라 하였고, 국민도 다 불가라 하였는데 안에서 ‘가(可)’라고 쓴 여러 대신을 어찌 가히 폐하의 신하요 정부의 대관이라 이르겠는가. 조인으로서 말한다면 이미 폐하의 윤허하지 않으신 바인데, 감히 가부와 조인을 한다는 것이 이미 극히 이치에 어긋나며, 설혹 억지 허락이 있었다 할지라도 민심이 좇지 않을 것인즉 가히 마음대로 행하지 못할 것이라. 하물며 강제이니 제 어찌 감히 성립하였다 일컬어서 세계에서 널리 선포하려 하리오.”

일제에겐 몸으로 직접 부딪쳐오는 독립운동도 버겁기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강원형처럼 끊임없이 글로 도발해오는 경우도 골치가 아팠다. 하여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강원형은 경무청에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45일 만에 출옥하였다.


#4. 길에서 목숨을 내려놓은 사내

날씨에는 규칙이 없었다. 초가을 아침부터 날카롭게 벼려진 햇살이 채 익지도 않은 감을 죄다 터뜨리기도 했고, 이른 여름날 밤에 짜각짜각 소리를 내며 떨어진 차가운 돌비에 채마밭이 몽창 뚫리기도 했고, 늦봄 새벽에 반쯤 탄 재가 눈처럼 쌓여 지붕을 내려앉게도 했고, 한겨울 낮 돌연히 붉고 미지근해진 바닷물에 배가 포구에 묶이기도 했다. 막내아들이 강원형을 찾아온 밤도 심장에 열이 찬 듯 더운 가을밤이었다.

“아버님, 이제 집으로 돌아오시지요. 아버님이 계시지 않은 집안이 어렵습니다.”

막내가 간곡히 청했다. 1910년 상경해 귀향하지 않은 지 벌써 4년째였다. 국운이 회복되지 않으면 곧 죽어 종조(宗祖) 곁에 머무는 것이 자신의 뜻이라며 잠자리와 끼니까지 잊은 세월이었다. 하지만 강원형은 태연하고 추연한 어조로 막내에게 일렀다.

“집안일은 네 형이 있으니 족히 말할 것이 없으나, 국가의 존망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 원수와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생존하느니보다 차라리 죽어서 지하에 돌아가 선왕을 배알할 뿐이로다.”

하니 막내가 울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그가 죽은 몸으로 집으로 돌아갈 적, 그를 알던 사람들이 한강 가에까지 나와 울면서 그를 보냈다. 수많은 이가 자결로 보국(報國)하고자 할 때, 끝까지 살아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다가 쓸쓸히 죽은 그의 삶에 대한 인사였다.

글=김진규 <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 칠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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