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 하다 .19] 옛 김천역에서 시작된 김천장시의 번영

  • 임훈 박현주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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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11   |  발행일 2014-09-11 제11면   |  수정 2014-11-21
‘김산’서 ‘김천’으로 고을 이름 바꾼 ‘김천驛의 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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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남산동 김천초등학교 운동장에는 김천역을 거쳐간 찰방들의 선정을 기념하는 ‘찰방 선정비’ 4기가 세워져 있다. ‘김천도역지’의 기록에 의하면 김천역은 현재 김천초등학교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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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의 찰방 선정비는 교통의 요지로서 김천역의 지위를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김천역은 역촌(驛村)의 형성과 문물의 집산을 촉진시켜 김천장을 전국 최대 규모의 장시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김천역 주변 사람·물산 모이며 번성
김천장 성장 등 지역 경제 발전 견인
김천역 찰방, 군수와 대등한 관계
한때 찰방이 거느린 인원 600여명
화물운송 등 자체 수익사업도 펼쳐


조선시대의 ‘역(驛)’과 ‘장시(場市)’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였다. 역은 관리들에게 숙소와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순기능 이외에 전시(戰時) 정보 및 왕명의 전달통로로 활용되었다. 현대의 기차역과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공간이다.

특히 규모가 큰 찰방역(察訪驛·종6품의 찰방이 관리하는 큰 역)의 경우 상업 발전과 연계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 최대의 장시 중 한 곳이던 김천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천역은 영남에서도 매우 큰 규모의 역이었다. 조선 개국때까지 경산(성주의 옛 이름)역의 속역에 불과했던 김천역은 세종대에 김천도역(金泉道驛)으로 승격되었고 17개 속역을 거느린 큰 역으로 개편된다. 김천역은 1894년 갑오경장 때 우정국이 신설되면서 역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김천 경제발전의 한 축을 담당했다. ‘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하다’ 19편은 한때 조선 5대 장시로 불렸던 김천장의 성장배경이었던 김천역에 관한 이야기다.

◆독립적 지위를 유지한 조선시대의 역

역사에 기록된 역의 시작은 삼국시대 신라 소지왕 때다. 초창기의 역은 전쟁의 위험이 큰 변방에 설치했다. 도성에 파발을 날리거나 봉수를 피워올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역제(驛制)’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국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조선시대의 역은 조정의 여러 부처 중 병조(현재의 국방부)에 소속됐다. 이 때문에 종6품의 김천역 찰방은 종4품의 김산군수와 상명하복의 관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하며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김천시내를 가로지르는 직지천을 경계로 김산군 관아가 있던 김천시 교동은 행정의 중심이었다. 병조 산하의 김천역 주변은 김산군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역은 준군사시설로 간주되었기에 지방수령의 간섭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김천역에는 관아의 군사와 별도로 역졸이 주둔했다. 당시 조정에서 긴급한 사안이 생기면 군수나 현감에게 군사를 빌리지 않고, 역졸을 징발했다. 역졸은 비밀스러운 임무에도 투입되었는데, 지방수령을 감찰하는 암행어사 출두 때 따라나오는 군사가 역졸이다. 이외에도 역졸은 죄인을 압송하는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김천역 찰방이 거느린 인원만 600여명이었다. 대부분은 역 소속의 역노비로, 이들은 말똥을 치우거나 말고삐를 잡는 등의 허드렛일과 역둔전 경작을 담당했다. 역노비는 공노비 중에서도 신분이 가장 낮았지만 역에 독립적인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독자적 관할을 가졌음에도 역의 운영은 만만치 않았다. 조선팔도의 거의 모든 고을에 역이 설치돼 있었지만, 재원 부족으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역에 소속된 역둔전이 있었지만 운영비의 일부를 충당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역마다 사사로이 운영비를 버는 일은 관례가 됐다. 김천역에서도 지역 유지나 상인들의 화물을 날라다주는 일종의 수익사업이 이뤄졌다. ‘약물내기’로 불리는 김천시 양금동 유기상인들이 김천역의 말 수레를 자주 이용했다. 보부상들이 무거운 유기등짐을 기피했기에 감천의 나룻배를 이용하거나 김천역의 말 수레를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김천역은 운영비에 보태기 위해 방앗간까지 운영했다. 김천시 성내동 김천교육지원청 인근에 김천역이 운영하던 방앗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은 현재 ‘뒷방마’라는 지명으로도 불리는데 ‘뒷방마’는 ‘뒷방 늙은이’에서 ‘늙은이’ 대신 ‘말(馬)’을 넣은 이름이다. 달리지 못하는 김천역의 늙은 말들을 방앗간으로 보내 연자방아를 돌린 것에서 유래한다. 역 소속의 말은 군견처럼 계급도 있었고, 나라의 재산이기에 함부로 잡아먹을 수 없었다.

◆김천장의 성장에 불을 당긴 김천역

김천장의 급속한 성장은 김천역에서 비롯됐다. 통상 역이 있는 고을에는 큰 장이 들어섰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역·장시의 발전과 쇠락은 궤를 같이했다. 철도와 지하철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의 역세권처럼 옛 역이 들어선 자리에는 사람과 물산이 모여들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세금의 상당부분은 현물로 징수했다. 세금으로 거둬들인 현물의 대부분은 관아가 아닌 역의 창고에 보관했다. 하지만 현물 상당수를 쥐가 파먹거나 부패해 서울로 보낼 물품의 양이 줄어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모든 책임은 역장이 져야 했기에 부족분은 역에서 직접 구입해 메워야 했다. 이런 이유로 김천역 주변에는 역을 상대로 쌀과 삼베 등의 물품을 취급하는 상인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반대로 세금으로 징수한 현물의 수량이 넘쳐날 때도 있었다. 이때는 역에서 내놓은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역 입장에서는 남은 물품을 오래 보관해봤자 자리만 차지하거나 변질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이를 내다팔아 운영비에 보태는 편이 훨씬 나았다. 이후 김천역이 활성화되자 역 주변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역의 달구지를 수리하는 대장장이는 물론, 말을 치료하는 마의(馬醫)까지 온갖 사람들이 김천역 주변에 터전을 꾸리게 된 것이다.

‘김천(金泉)’이라는 지명 역시 김천역에서 비롯됐다. 김천의 옛 지명 중 하나가 ‘김산(金山)’인데, 김천역 주변의 인구가 불고 상권이 성장하면서 ‘김산’이라는 이름을 흡수해 버렸다.

김천역 주변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자 왕성한 상업활동이 함께 이뤄졌다. 이러한 김천역 주변의 상업발전은 화폐의 유통시기와도 겹친다. 상평통보가 보편화된 18세기 후반부터 김천장의 팽창은 가속화된다.

◆‘찰방 선정비’로 남은 김천역의 역사

김천장은 김천역의 말을 이용한 육운(陸運)에다 배를 이용한 감천의 수운(水運)능력까지 더해지자 나날이 발전했다. 김천역과 감천변 사이의 용두동 일대 백사장은 영남 내륙 최대의 시장으로 거듭났다.

이는 김천이 수운을 이용할 수 있는 낙동강 지류 최서단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운의 이용은 장시와 도시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배의 속도는 느리지만 무겁거나 부피가 큰 물건을 쉽게 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소금과 남해안의 어물들이 낙동강과 감천을 통해 김천장으로 유입됐다. 남해안에서 왜관까지 큰 배를 타고 올라오면 중간 크기의 배로 짐을 옮겨실은 뒤 선산까지 왔다. 선산에서 나룻배로 짐을 나른 뒤 김천까지 올라왔다. 나룻배의 바닥은 평평하게 만들어 수심 50㎝에서도 배를 띄울 수 있었다.

김천장은 내륙이면서도 어물의 공급 중간기지 역할을 했다. 소금과 조기 등의 어물을 싣고 올라온 나룻배는 김천장이 들어선 감천의 백사장에 짐을 풀었다. 어물들은 소금간을 하거나 말린 후 상주, 문경을 비롯해 충북 영동, 전북 무주 등지로 판매했다. 단 북부 영남지역은 동해안에서 넘어오는 보부상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김천장 상인들의 영역 밖이었다. 실제로 1920년대 일제가 정리한 김천장의 물동량 중 어물이 두 번째를 차지할 정도였지만, 장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말을 이용해 물산을 나르던 김천역의 전통은 개인이 운영하는 마방(馬房)으로 이어졌지만, 1905년 일제에 의해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기세가 한풀 꺾였다. 1945년 광복 이후 도로교통이 활성화되면서 마방은 자취를 감추었고, 김천장의 영화로운 시절도 종말을 고한다.

김천의 번성을 이끌었던 김천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아직 남아있다. 김천시 남산동 김천초등학교 운동장에는 김천역 찰방들의 선정을 기념하는 ‘찰방 선정비’ 4기가 남아있다. 찰방 선정비는 찰방이 이임하거나 퇴직한 후 세웠는데, 역모나 비리에 연루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찰방에게 선정비를 세워 주었다고 전해진다.

글=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참고문헌=디지털김천문화대전
공동기획: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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