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4]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9> 영일만과 용덕곶

  •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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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16   |  발행일 2014-09-16 제13면   |  수정 2021-06-15 16:44
마주보이는 호미곶과 여의주를 다투는 어룡상투(魚龍相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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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물류항만기지인 포항 영일만항이 들어선 용덕곶(왼쪽 붉은 점선안)은 지형상 호미곶(오른쪽 붉은 점선 안)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옛 사람들은 양곶의 형상을 풍수학적으로 어룡상투(魚龍相鬪)의 형국으로 보았고, 이 때문에 용덕곶과 호미곶 일대를 ‘어룡사’ ‘어룡불’ 또는 ‘어링이불’이라고 불렀다. 특히 이곳에는 ‘어룡사에 대나무가 나면 가히 수만명이 살 곳이다’라는 예언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실제 이곳이 포스코 부지로 선정되면서 ‘대나무 같은 굴뚝’이 치솟아, 수십만명이 모여 살게 돼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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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북구 흥해읍 용한리 용덕곶은 영일만이 시작되는 상징적인 장소다. 영일만을 끼고 동남 방향으로 돌출해 있는 용덕곶은 물고기가 뛰어올라 하늘로 올라간다는 ‘어약승천(魚躍昇天)’의 형상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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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덕곶에는 현재 포항 영일만항이 들어서 동해안 물류항만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1.영일만의 시작 용덕곶

해안 풍광이 수려한 동해를 따라 남으로 내려오다 보면 칠포해수욕장을 지나 동해안 물류항만기지가 들어선 자리가 있다. 예전에 이른바 용덕곶(龍德串)으로 불리던 지역이다. 영일만이 시작되는 상징적인 곳으로, 조선 명종조의 예언가인 남사고가 ‘동해산수비록(東海山水秘錄)’에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지형이라고 기록한 바 있는 호미곶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지점이다.

동해를 향해 돌출한 이 두 곶 사이에 내륙을 향해 넓고 둥글게 형성된 바다가 포항 영일만이다. 영일만은 해돋이, 또는 해맞이바다란 뜻으로 고려 초기부터 공식적으로 쓰였던 명칭이다. 지금의 포항시가 자리한 영일만은 단층운동으로 형성된 형산강지구대가 북동단에 위치해 있고, 동북방향으로 뻗은 태백산맥과 호미곶에서 경주 토함산을 잇는 남서방향의 산계가 지역의 남부에 길게 걸쳐져 있다.

이 두 산계 사이에 울주군에서 발원하여 경주와 안강을 거치며 남동방향으로 63㎞ 남짓 흐르는 형산강이 포항 주변에 넓은 충적지를 펼쳐두고 있다. 이렇게 포항의 연일읍과 오천읍을 가르며 영일만으로 흘러드는 형산강 어귀에는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송도해수욕장과 포스코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영일만의 중심지대지만 옛날에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드넓은 백사장이었던 이 지역을 이 지방 주민들은 ‘어룡사(漁龍沙)’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일만을 끼고 동남으로 돌출한 용덕곶이 어약승천(魚躍昇天)의 형상을 하고 있고, 역시 영일만을 감싸며 동해바다로 튀어나와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양을 닮은 호미곶이 마주 어우러져 마치 물고기와 용이 서로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형국인 어룡상투(魚龍相鬪)와 비슷하다고 해서 어룡사란 지명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이 지역사람들에게 ‘어룡불’이나 혹은 ‘어링이불’로 불리거나 ‘오링이불’이나 또는 ‘얼링이불’이었던 이 명칭은 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 ‘근오지(斤烏支)벌’ 또는 ‘오량지(烏良支)벌’이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이어 신라 중엽에 이르러서 ‘임정벌’이라고 고쳐 부르게 된 것은 신라 경덕왕 16년에 ‘근오지현’을 ‘임정현(臨汀縣)’으로 고쳐 부른 데 연유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고려시대에 와서는 연일벌, 형산벌로도 불렸다고 한다.
 

 

#2.창해역사의 전설이 깃든 곳

옛 지명인 어룡사는 넓은 의미에서 동해면 약전리로부터 형산강과 두호동에 이르기까지의 약 20리의 백사장을 포함하는 지역을 말한다. 또 좁은 의미에선 형산강의 하류를 중심축으로 포항제철이 있는 남쪽지대와 송도해수욕장이 위치한 북쪽 전역을 일컫는다. 이 어룡사에 관한 민담은 여러 개가 있지만 그중 상징성이 있는 두 가지를 풀어본다.

오랜 옛날, 왜국에 전설적인 힘을 타고난 역사(力士)가 한 사람 있었다. 치솟는 용력을 참을 길 없던 역사는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승부를 겨루었고, 내로라하는 장수가 모두 그의 끝 모르는 힘에 눌려 굴복하고 말았다. 일본에서 더 이상 상대를 찾지 못한 역사는 배를 타고 북쪽으로 건너왔다. 그 후로 역시 힘센 상대가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달려가서 대결을 청했고, 모두 그의 앞에서 허망하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이처럼 상대를 찾아 세상을 떠돌던 일본 역사는 어느덧 동해가 바라보이는 운제산 대각봉에 이르렀다. 눈앞에 펼쳐진 창망대해를 감상하고 있을 때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한 역사가 서 있었는데 키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몸집은 바위처럼 굳건했다. 두 눈은 화등잔처럼 빛났으며 팔다리는 거대한 구리기둥 같았다. 스스로를 창해역사로 칭한 남자는 한눈에도 하늘이 내린 장수가 틀림 없었다.

서로를 보는 순간 두 역사는 상대가 천하에 둘도 없는, 막상막하의 실력을 가진 장수라는 것을 알았다. 두 역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곧장 어우러져 한 판 승부를 가리게 되었다. 두 역사 모두 천고의 힘을 타고난지라 그 대결은 가히 경천동지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온 힘을 쏟아 서로 치고 박고 던지니 운제산이 뿌리째 흔들렸고, 바람과 흙먼지로 천지가 뿌옇게 흐려졌다.

얼마나 싸웠을까. 마침내 먼저 기력이 다한 일본 역사는 창해역사에게 패배를 자인하고 군신의 예를 취한 뒤 자신을 수하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으며 창해역사는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울러 후일 전하는 바에 따르면 대결 당시 일본 역사가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서 손을 짚은 땅이 움푹 꺼져 바닷물이 몰려들어와 호수가 형성되었고, 그게 현재의 영일만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3.이성지의 예언, 현실이 되다

둘째 민담으로, 조선 초기에 점복가이며 풍수가로 이름난 이성지(李性智)란 인물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천문과 지리를 배웠고, 주역과 음양학, 복서를 공부하여 명망을 얻은 덕에 나이 마흔이 되지 않아 조정의 관상감(觀象監)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영남의 지세도 봐둘 겸 당시 연일현감으로 있던 매부를 만날 예정으로 경상도로 오게 되었다. 동해를 따라 내려오다가 먼저 들른 곳은 흥해군이었다. 조정의 관상감으로 있던 그를 맞이한 흥해군수는 융숭히 대접을 하던 중에 고을 수령된 자의 관심으로 흥해의 풍수가 어떤지를 넌지시 물어보았다. 여정 도중에 동해의 명산인 비학산 정상에 올라 흥해 분지의 풍수와 지세를 관찰한 바 있던 이성지는 기다렸다는 듯 답을 내놓았다.

“흥해는 수만년 동안 호수였던 지역이 동쪽 지형이 열려서 평야로 바뀐 곳이므로 가뭄에는 별 걱정이 없겠으나 반면에 해풍과 습기가 많은 까닭에 괴질이 적지 않을 것이오. 따라서 이 풍습해에 따른 괴질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집집마다 회나무를 많이 심어야 할 것이오. 그 까닭은 다른 나무에 비해 회나무가 습기를 빨아들이는 힘이 몇 배나 되므로 땅속의 습기를 제거하는 데에 최선의 방책이 되기 때문이오.”

이성지의 풍수해석에 의한 풍토병과 그에 따른 비책을 들은 흥해군수는 명확한 진단에 깜짝 놀라서 거듭 경탄과 찬사를 표시하였다고 한다.

이틀간 대접을 받고 길을 떠난 이성지는 곧 연일현에 당도했고, 매부인 연일현감은 성대히 잔치를 베풀어 그를 환대했다. 이 자리에는 지역의 학자며 유림도 관심을 갖고 모여들었다. 조정의 관상감이자 이름난 풍수가가 방문한다는 소식과 함께 흥해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함께 어울려 술잔을 나누는 틈틈이 시와 학문을 논하고, 날이 새면 사찰구경과 등산을 하는 등 풍류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어느 날 일행은 강과 바다구경도 할 겸 어룡불을 찾게 되었다. 그들은 어부들이 잡아온 선어를 안주 삼아 술판을 벌였다. 다들 거나하게 취기가 올랐을 때 한 나이 많은 선비가 어룡불의 지세가 어떠한지 물었다. 마을 향반 출신의 지관으로, 이성지의 실력이 어떤지 알아볼 속셈을 품었던 것이다. 이성지가 취기 어린 눈길로 좌우지형세를 살핀 다음에 말했다.

“북방의 화(火)의 기운과 동방의 수(水)의 기운이 강하게 부딪히는 곳으로, 결코 범상한 지역이 아니오. 불과 물이 부딪혀 상쟁(相爭)하니 지금처럼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모래사장으로 남아 있는 것이오. 만일 서편의 운제산이 십리만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상쟁을 막았더라면 수십만명의 주민이 살 수 있는 큰 도읍지가 되었을 것이오. 그러나 앞으로 세월이 흘러 서방의 금(金)의 기운과 남방의 목(木)의 기운이 여기로 밀려들어 조화를 이루면 반드시 큰 도시가 탄생할 것이오.”

하지만 지관을 비롯한 누구도 그의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주변 풍경이 너무 삭막하고 황량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알아챈 이성지가 자신의 예언을 짧게 시로 읊었다.

竹生魚龍沙 어룡사에 대나무가 나면
可活萬人地 수만명이 살 땅이 되고
西器東天來 서양문명이 동쪽으로 올 때
回望無沙場 돌아보니 모래밭이 없어졌더라

수백년이 지나도록 아무 징조가 없던 이 예언은 수십여년 전, 어룡사에 포스코가 들어서면서 마침내 현실로 드러났다. 조선과 철강산업에서 일본을 능가하는 것을 뜻하는 일본 역사를 이긴 창해역사의 전설이나 대나무처럼 큰 굴뚝을 가진 도시가 생길 것이라는 이성지의 오랜 예언은, 이제 먼 미래를 꿈꾸는 포항의 역사가 된 셈이다.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공동기획 : 포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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