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7] 문경 장수황씨 종가 ‘호산춘’

  • 김봉규
  • |
  • 입력 2014-09-18   |  발행일 2014-09-18 제18면   |  수정 2014-09-18
하나 남은 ‘春酒’의 자부심…청와대 주문에도 “직접 가져가시오”
20140918
장수황씨 종택 사랑채
20140918
문경 장수황씨 종가의 가양주로 전해 내려온 ‘호산춘’. 18도 발효주다. ‘호산춘(湖山春)’ 글씨는 서예가인 황규욱 종손의 작품이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대상리는 한두리마을로도 불리었다. ‘학덕 높은 선비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도촌(道村) 또는 대도촌(大道村)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큰도촌’이라 하다가 ‘한도리’로 변하고, 다시 ‘한두리’로 바뀌어 불리게 된 것이다.

대하1리에 ‘도촌유거(道村幽居)’라는 전서체 편액이 사랑채 처마에 걸린 고택이 있다. 마당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탱자나무라는, 400여년 전 이 고택이 건립될 때 심었다는 탱자나무 고목 두 그루가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마치 한 그루인 것처럼 보인다. 창건된 지 400여년이 지난 이 고택이 장수황씨 한두리파(사정공파) 종택이다.

사정공(司正公) 황정(黃珽)은 영의정 자리에서만 18년을 지낸, 조선의 최고 명재상으로 꼽히는 방촌 황희(1363~1452)의 증손자다. 황희는 영의정을 포함해 정승 자리에만 24년이나 있으면서 명군(名君) 세종을 도와 보기 드문 국가융성의 시대를 열었던 명재상이다.

황정이 한두리에 터를 잡고 정착한 입향조(入鄕祖)이고, 현재의 사정공파 종택은 황정의 고손자인 칠봉(七峰) 황시간(1558~1642)이 처음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황시간은 서애 류성룡과 한강 정구의 제자로, 삼가현감을 지낸 후 낙향해 후학을 양성하며 향촌 발전을 위해 열정을 쏟는 삶을 살았다.

이 장수황씨 종택은 황희의 영정을 모시며 기리는 사당인 숙청사(肅淸祠)를 비롯해 사랑채와 안채, 고방채, 문간채, 우물 등으로 이뤄져 있다. 장수황씨 사정공파 종가는 황희 정승의 맏이 집안은 아니지만, 현재 장수황씨의 종택을 유지하고 있는 가문은 이 사정공파가 유일하다고 한다.

현재 이 종택은 황희의 22세손인 황규욱 종손이 관리하고 있으며,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이 종가는 오래 전부터 황희 정승의 생일(음력 2월10일), 사당인 숙청사에서 지내는 다례(茶禮) 행사 때 가양주를 빚어 올려왔다. 이 가양주가 지금의 호산춘(湖山春)이다. 물론 다른 선조 제사의 제주로도 사용해왔다.

20140918
도자기병 ‘호산춘’

이름에 酒자 대신 春자
맛과 향이 뛰어난
최고의 술에 붙이는 별칭

황희 정승의 증손자 황정
조선초 문경에 자리잡아
가양주로 빚기 시작

쌀 한 되에 술 한 되 정도
깊고 진하며 솔향이 솔솔
500년 전통의 맛 지켜내


◆최고급 술 이름에 붙던 ‘춘(春)’자가 붙은 ‘호산춘’

술 이름으로는 보통 ‘주(酒)’자가 붙지만, 드물게 ‘춘(春)’자가 붙는 술이 있다. ‘춘’자가 붙는 춘주는 맑고 깨끗하며 맛과 향 등이 특히 뛰어난 귀한 술의 별칭으로, 당나라 때 생겨났다고 한다. 황실과 사대부의 가양주 중 주도가 높고 맛과 색, 향이 특별히 좋은 고급 술에 ‘춘’자를 붙여 ‘춘주(春酒)’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황규욱 종손은 도연명의 시 ‘독산해경(讀山海經)’에 나오는 ‘작춘주(酌春酒)’라는 문구를 예로 들었다.

호산춘은 문헌상으로 ‘산림경제’(1715), ‘임원경제지’(1827), ‘양주방’(1837) 등에 소개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춘’이 붙은 술은 일반적으로 ‘주(酎)’의 무리에 속하는 것으로 특품의 술을 가리키며, 술을 빚기 어려운 여름에는 소주를 내려 애용하기도 한 일반적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춘’자가 붙은 술로 호산춘과 함께 약산춘(서울), 벽향춘(평양) 등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술은 호산춘밖에 없다고 한다.

호산춘이 이처럼 뛰어난 술이라는 것이다. 호산춘은 황정이 조선 초기에 문경 한두리에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가양주로 빚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황규욱 종손은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도 가양주를 담근 사실이 확실하니 호산춘의 역사는 최소 200년은 넘는다"고 말했다. 칠봉 황시간 생존시에 시작됐다면 400여년, 입향조 황정 때부터라면 500년 정도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호산춘의 옛 한자 이름은 ‘호산춘(壺山春)’이었다. 술 빚는 과정의 특징과 함께 전북의 익산의 옛 지명이 ‘호산(壺山)’인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문경의 이 호산춘은 1990년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받을 때 황규욱 종손이 ‘호(壺)’자를 ‘호(湖)’자로 바꾼 것이다.

호산춘의 명칭과 관련, 장수황씨 후손중 시 짓기를 즐기는 풍류객인 황의민이 자기 집에서 빚은 술에 자신의 호인 ‘호산(湖山)’에, 술에 취했을 때 흥취를 느끼게 하는 춘색을 상징하는 ‘춘(春)’자를 넣어 ‘호산춘’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문경 ‘호산춘’의 시작이라는 설도 있다.

멥쌀과 찹쌀, 솔잎, 생약재, 누룩을 사용하는 호산춘은 두 번(밑술, 덧술) 담가 숙성시키는 과정을 거치는 이양주이다. 물을 타지 않는 원액 청주로, 주도는 18도다. 청주로는 도수가 가장 높다고 한다.

밑술은 멥쌀로 담가 2주 정도 발효시키고, 덧술은 찹쌀을 밑술에 들어간 멥쌀의 두 배 양을 사용해 솔잎을 넣고 고두밥을 찐 뒤, 누룩과 물을 넣고 반죽한 후 밑술을 붓고 다시 버무려 숙성시킨다.

쌀 한 되에 술 한 되 정도 나오는데, 술맛은 매우 향기로운 가운데 솔향이 느껴진다. 맛이 진하고 깊은 편이다.

호산춘과 관련한 일화도 전한다.

옛 문경은 상주목 관할이었는데, 상주목사가 지역에서 가장 세력이 큰 어느 가문의 종갓집에 들러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가다가 호산춘이 생각나서 말을 돌려 황씨 종가를 찾았다. 호산춘 술독을 다 비우고 취해 잠이 들었다가 잠결에 요강에 든 오줌을 호산춘인 줄 알고 마셔버리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관리들이 술맛에 취해 임무도 잊고 돌아간다고 해 ‘망주(忘酒)’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술에 빠져 몸과 집안을 망친다 해서 ‘망주(亡酒)’ 등 별명이 붙기도 했다고 한다.



◆종가의 자부심을 지켜온 호산춘

호산춘은 현재 황규욱 종손(1950년생)과 송일지 종부, 그리고 종손의 아들이 함께 빚고 있다. 종부가 무형문화재 호산춘 술빚기 기능보유자이다. 종손은 전수조교이고, 아들이 전수자다. 무형문화재 등록 당시는 종손의 모친(권숙자)이 술을 담그고 있었다.

권숙자 전 종부는 좋은 술을 담그기 위해 이른 새벽 종택 마을에서 나는 물을 길어와 끓이고 식혀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좋은 지하수를 개발해 사용하고 있다.

가양주인 호산춘을 지켜오는 과정에 어려움도 많았다. 예전에는 종가의 경제적 여건이 좋았으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종가가 몰락하여 매우 어려운 시기를 견뎌야 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쌀 한 되에 술 한 되 나오는 가양주를 계속 빚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밀주 단속을 피하기 위해 다락에 감춰 뒀던 술독을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어 아깝지만 급한 나머지 술 단지를 아예 뒷마당에 던져 부숴버린 일도 있었다.

어렵게 지켜낸 호산춘은 그 술맛이 알려지면서 찾는 이들도 늘어났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는 청와대에서 전화를 걸어와 환영 만찬주로 쓰겠다며 호산춘을 보내달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종손이 “우리는 술을 가져다 줄 수는 없으니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했더니, 며칠 후 비서실에서 사람들이 직접 와서 술을 봉인해 가져갔다고 한다.

종손의 아들 황수상 차종손은 부친의 권유로 가양주 가업을 잇고 있다. 술을 마시지도 못하지만, 우리나라의 대표적 주류회사에 들어가 이론과 실기를 배운 뒤 집으로 돌아와 부모를 도우며 술을 빚고 있다. 안동대 대학원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호산춘은 이렇게 대를 이어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종택 부근에 최신 양조시스템을 갖춘 호산춘 제조공장이 신축되고 있어, 더욱 본격적인 생산이 이뤄질 전망이다. 호산춘은 일반 판매도 한다. 예전에는 종택에서만 구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택배로도 배송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