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개청 100년, 1914~2014 칠곡 .10] 기도하며 일하라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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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19   |  발행일 2014-09-19 제11면   |  수정 2014-11-21
6·25 전후 고통의 시기에도 그들의 기도는 계속되었다

‘왜관개청 100년-1914~2014 칠곡’은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가 왜관으로 옮겨 개청한 1914년부터 100년 동안, 칠곡의 주요 역사와 인물을 다룬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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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북한 덕원과 중국 연길수도원에서 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이 6·25전쟁 때 남한으로 피란을 오면서 설립됐다. 왜관 수도원 구성당 아래로 물기 없는 가을 햇살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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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수도원의 본성당.

◇ 스토리 브리핑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에 속한 천주교 남자 수도자의 자치수도원이다. 베네딕도 성인의 제자인 성 마오로와 성 플라치도를 주보성인으로 모신다고 해서 정식 명칭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성 마오로 플라치도 수도원’이다. 칠곡군 왜관읍에 자리하고 있어 ‘왜관수도원’으로도, 베네딕도의 우리말인 ‘분도(分道) 수도원’으로도 불린다. 설립일은 1952년 7월6일이다.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수도원으로부터 파견된 수도자들이 북한 덕원과 중국 연길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중 이념 차이로 인한 당국의 탄압과 더불어, 6·25전쟁 당시 북한 정권의 박해로 피란을 오면서 설립되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정신에 따라 깊은 신앙심과 성스러운 노동으로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1. 하느님을 찾는 삶

연둣빛 잔디 위로 구름의 그림자가 종종종 걸어갔고, 물기 없는 햇발이 수도사의 머리와 어깨 위로 온기를 얹었다.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성 베네딕도회는 이탈리아 누르시아 출신 베네딕도 성인(St. Benedict of Nursia, 480~547)이 저술한 ‘수도규칙’에 따라 수도생활에 전념하는 가톨릭교회의 수행공동체이다. 베네딕도회는 근대 이후 설립된 대부분의 수도회와는 달리 어떤 특별한 창립목적이 없다. 굳이 하나를 들자면, 일정한 장소에 정주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을 찾는 삶’ 자체가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은 서로 종속관계에 있지 않고, 인사나 경제문제에 있어 외부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으며, 각자 독자적인 운영을 하는 자치수도원이다.


#2. 두 번의 시작

첫 번째 시작, 1909년.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일어나기 한 해 전, 두 명의 수도사가 조선으로 들어왔다. 소박한 수도복에 단정한 머리카락, 선한 미소. 독일 남부에 위치한 성 오딜리아 수도원 소속으로 신념과 신앙심이 깊은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수도원 건립이었다. 바로 서울 백동(현 혜화동)의 수도원(1909~27)이었다. 이로써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주로 교육 사업을 벌였다. 그러던 1927년 이후, 함경도 덕원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1927~49)과 중국 연길에 성 십자가 수도원(1928~46)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두 곳에서는 본당 사목과 신학 교육 그리고 출판사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사회사업으로 수도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광복 후 38선 이북이 공산화되면서 결국 탈이 났다.

“우리 수도원이 폐쇄 당했습니다.”

“우리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랬다. 6·25전쟁을 전후해 70여 회원들이 체포·구금되었다. 이 중 30여 회원은 피살되기도 했고, 4년여의 강제수용소 생활 도중 옥사하기도 했다. 순교의 때였다. 이때 용케 남한으로 피신한 이들이 바로 왜관 수도원의 시작이 되었다. 따라서 왜관수도원 역사의 진정한 첫 발자국은 바로 1909년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작 1952년.

전쟁의 한복판에 이른 초여름. 그 누가 꽃송이만 붉다 하랴. 시절을 아랑곳하지 않고 매달린 열매도 붉었고, 전쟁으로 이래저래 경각에 달린 목숨들도 붉었다. 그렇게 열매가 꽃처럼 맺힌 대구 주교관에서 20여명의 베네딕도회 회원들이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6·25전쟁으로 흩어져 남한으로 피신한 한국인 수도자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가 디모테오 신부에게 제의했다.

“왜관과 낙산에서 본당사목을 시작하여 주십시오.”

이에 1953년 왜관지역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었고, 동시에 비테를리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55년, 드디어 수도원 건물이 들어섰다. 식구도 크게 늘었다. 북한의 덕원 수도원과 만주 연길수도원에서 생활하다가 공산당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되었던 수도자들이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한국으로 파견되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연히 본당수도 늘어났고 그러던 56년 1월9일, 왜관의 새 수도원은 로마로부터 정식 수도원으로 인가되었다.


#3. 다섯 차례 기도…오전·오후 노동

수도원 뜰엔 침묵이 침묵의 허리춤을 잡고 따라다니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침묵이 안개나 연기 같다면, 그러니까 불투명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아마도 뜰은 자욱할 것이었다. 두 발짝 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앞이 뿌연 그런 날처럼 말이다. 침묵이 짙었다. 구천 높이까지도 뻗칠 만큼이었다. 하지만 침묵은 보이는 물질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도사들은 수도원 뜰에 가득한 침묵을 종종 잊었다. 수도원을 구성하는 주성분이자 수도원이 돌아가는 원칙인 침묵을 그렇게 번번이 잊었다. 침묵의 힘이었다. 잊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잊었다는 사실을 개선할 수 없어서 침묵은 굳건할 수 있었다. 그 침묵 사이를 번번한 기도가 비집고 흘러 다녔다.

수도원에서의 일상은 하루 다섯 차례의 기도와 오전·오후 노동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기도는 수도생활의 중심이다. 비록 아무리 다양한 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는 않다. 노동은 베네딕도 성인이 ‘자기 손으로 노동함으로써 생활할 때 비로소 참다운 수도승이 되기 때문이다’고 말한 바와 같이 수도공동체의 자급자족을 위한 것일 따름이다. 때때로 교회의 요청과 선교적 목적으로 여러 일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찾는 삶의 핵심인 기도생활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베네딕도회 삶에서의 노동은 기도 다음으로 중요하다. 수도 전통 안에서 노동은 몇 가지 차원을 띠고 있다. 먼저 금욕적 차원이다. 베네딕도 성인이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라고 했듯이, 노동은 한가함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금욕적인 수단으로 간주되어 왔다. 둘째는 실제적인 차원이다. 즉,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수도공동체의 생계유지를 위한 방편이라는 사실이다. 끝으로 애덕적인 차원을 들 수 있다. 수도사는 노동을 통해 얻은 결실을 가난한 이웃과 나눔으로써 애덕을 실천하는 것이다.


#4. 하느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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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운영하고 있는 분도출판사. 수도원에서는 교육, 출판, 인쇄업 등 다양한 사회사업을 하며 애덕을 실천하고 있다.

왜관 수도원에서 하는 일은 다양하다. 우선 대구대교구 내 대명·왜관·석전·약목·신동·가실 등 6개 본당을 맡아 사목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대구 베네딕도 수녀회·부산 베네딕도 수녀회·수정 트라피스트 수녀회에 신부를 파견하여 지도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피정의 집과 손님의 집을 운영하여 신자들의 영적 성장과 영성 교육에 도움을 주고 있다. 1964년 왜관에 세워진 피정의 집은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써 한국교회에 큰 자극을 주어 훗날 수많은 피정의 집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베네딕도회는 71년에는 부산에서, 79년에는 서울에서 각각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55년 4월1일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마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애를 썼다. 그리고 철공소, 목공소 같은 작업장과 성당의 창문을 기도할 수 있도록 아름답게 장식하는 유리화 공예실, 제단에 사용되는 성작(聖爵)과 성반(聖盤)·감실(龕室)·촛대 등을 제작하는 금속 공예실, 성당에 사용되는 의자와 제단 등 여러 가지 가구를 제작하는 분도가구공예사 등을 통해 교회 문화예술에도 기여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작품과 성물 중의 일부는 수도원을 방문하면 직접 구할 수도 있는데 그 공력이 일반 전문가와 견주어 볼 때 전혀 모자람이 없다.

사회사업도 한다. ‘분도노인마을’과 ‘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더불어 양로사업 및 노동사목에도 종사하고 있다. 특히 현대식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데, 이것은 왜관수도원의 자급자족에 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농장경영의 현대화를 통해 지역사회에도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덕원과 연길에서 행해진 출판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1960년에 설립한 분도출판사에서는 기도서, 전례서 등과 함께 시대의 징표를 읽어 내는 다양한 서적을 출판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 교회의 문서선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과거 선교지였던 북한 및 중국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이 모든 일이 곧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 칠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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