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성석제 영주선비를 이야기하다.5] 새 시대의 설계자를 낳은 터전-정도전과 삼판서 고택(上)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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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29   |  발행일 2014-09-29 제11면   |  수정 2014-09-29
집을 양보한 맏아들 정도전, ‘民本의 나라’ 더 큰 집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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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가흥동에 있는 삼판서고택.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3명의 판서가 연이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은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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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25세 때(1366년) 부모상을 당해 영주로 내려와 묘소 곁에 여막을 치고 시묘살이를 했다.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학문을 쌓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3년간 머물렀던 여막이 지금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문천서당으로 남아있다.
[소설가 성석제 영주선비를 이야기하다.5] 새 시대의 설계자를 낳은 터전-정도전과 삼판서 고택(上)
정도전은 25세 때(1366년) 부모상을 당해 영주로 내려와 묘소 곁에 여막을 치고 시묘살이를 했다.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학문을 쌓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3년간 머물렀던 여막이 지금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문천서당으로 남아있다.


#1. 판서 3명이 산 명가의 터전에서 태어나다

2014년 여름, 영주시 가흥동의 삼판서 고택은 강렬한 햇빛에 몸이 훤히 드러난 언덕에 홀로 우뚝 서서 무심히 흘러가는 서천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따금 불어드는 뜨거운 바람이 삼판서 고택의 동쪽 숲, 키 큰 활엽수의 가지를 천천히 들어올릴 때마다 숲 아래쪽의 짙은 그늘이 드러났고 깊고 서늘한 기운을 내보냈다. 서천을 따라가는 둑길에 자전거를 세워 놓고 부채질을 하며 앉아 있거나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서넛 보였다. 그들이 혹 삼판서의 후예일까. 아니라면 저 높고 덩그런 기와집을 누가 지었으며 누가 살았는지 궁금했다.

삼판서 고택은 본채가 정면 여섯 칸, 측면 일곱 칸으로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커다란 양반 가옥이다. 문간채는 본채의 십분의 일 조금 넘는 크기로 상대적으로 작다. 원래는 지금보다 지대가 낮은 영주동 431번지에 있었는데, 1961년의 대홍수로 집이 침수되어 기울고 완전히 철거된 것을 2008년 서천이 내려다 보이는 구학공원에 복원했다고 한다. 원래 있던 곳에서 복원한 곳까지 직선거리로 몇백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집에 삼판서 고택이라는 특별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세 사람의 판서가 살았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나고 산 사람은 단순히 세 판서뿐만은 아니다. 정승 1명, 판서급이 4명, 성균관 대사성이 1명, 참판 1명, 청요직인 홍문관 교리 1명, 지방관 3명, 교수·훈도 3명, 참봉 3명 등 무수한 인물이 배출되었다. 또한 과거 급제자로는 문과 7명, 무과 1명, 생원 5명, 진사 3명을 배출했고 10명이 문집을 남겼다. 실로 명가의 터전이라 할 수 있다.

지어진 지 600년이 넘었고 이사를 한 데다 누대에 걸쳐 보수와 개축을 거쳤을 것이므로, 처음 집이 세워졌을 때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집 자체가 가지고 있던 당당함과 기품은 확인할 수 있다. 삼판서 가운데 가장 먼저 그 집에 살았던 사람은 봉화가 본관인 정운경(1305~66)이었다. 공민왕 때에 형부상서(형조판서)를 지낸 그는 사위인 황유정(1343~?)에게 자신의 집을 물려주었다. 평해황씨로 공조전서(공조판서)를 역임한 황유정은 다시 사위인 선성김씨 김소량(1384~1449)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고 김소량의 아들 김담(1416~64)이 이조판서에 올랐다. 한 집에서 판서만 세 명이 난다는 건 역사적으로 드문 일인데 그것도 사위로 이어지는 가승(家乘)이라면 유례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범상치 않은 연유가 있다.


#2. 아들 정도전이 집을 물려받지 못한 이유는

조선 초까지만 해도 재산상속에서 남녀 차별이 심하지 않았다. 아들이든 딸이든 공평하게 재산을 상속했고, 아들이 없어 딸만 상속을 받게 되면 외손이 제사를 받드는 일도 흔했다. 이른바 남녀 균분상속, 외손봉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아들이 있는 경우에도 출가한 딸(사위)에게 재산목록 1호인 집을 물려줄 수 있었다. 그럴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첫째 집주인인 정운경에게는 아들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있었다. 딸은 단 하나뿐으로 황유정에게 출가했다. 정운경은 자식들의 이름에 기대를 잔뜩 담았다. 맏이의 이름은 도(道)를 전(傳)한다는 의미의 도전이었고 둘째가 도를 보존한다는 의미인 도존(道存), 셋째 아들이 도를 되살린다는 도복(道復)이다. 여기서의 도는 물론 성현의 도, 곧 유학이다. 그런데 도를 전하고 보존하며 되살릴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 뛰어난 아들들이 아버지의 집을 물려받지 않은, 물려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운경은 영주의 향교 출신으로 1330년 개경의 문과에 급제하여 환로에 들어섰다. 이곡, 이제현 같은 당대의 신진사대부들과 교유, 각축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형부상서가 되었으며 검교밀직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특히 그는 고려를 통틀어 셋 안에 들어가는 청백리로 명성을 날렸다. 오죽하면 지인과 제자들이 ‘염의(廉義)’, 곧 ‘청렴하고 의롭다’는 사적인 시호(사시·私諡)를 지어줄 정도였을까.

정운경의 집을 물려받을 사람 가운데 일순위는 맏아들 정도전이었다. 아버지는 분명 아들에게 유학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도 전하길 원했을 것이다. 영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정도전은 가학으로 공부를 시작해 향토의 선비인 진중길, 최림 등의 스승에게 수학했다. 벼슬을 하러 개경으로 간 아버지를 따라가서는 당대의 거유 이제현에게도 배웠다. 마침내 사학의 최고 명문이던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이는 아버지 정운경과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나이를 잊은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정도전은 정몽주, 이숭인, 이존오 등 많은 동문을 사귀게 됐고 학문은 더욱 깊어졌다. 스승인 이색이 정도전을 “군자로 존경한다”고 했고 5세 위인 정몽주는 “안목이 뛰어나다”고 했다.

정도전은 23세의 나이에 홍건적의 난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했다가 귀경하던 중 결원된 관리를 충원하고자 청주에서 치른 과거에서 급제함으로써 대를 이어 관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첫 임지는 충주사록이었으며 전교주부(정8품), 통례문지후(정7품)로 순조롭게 승진했다.

정도전은 25세 때(1366년) 정월에 아버지의 상을 당해 영주로 돌아왔다. 한 달 넘게 산소 자리를 찾아다녔으나 좋은 자리를 얻지 못하던 중 하루는 한 자나 되는 눈이 왔다. 그런데 현재의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의 어느 곳에는 한 점의 눈도 없는 상서로운 자리가 있어서 그 자리에서 장사를 지냈다. 같은 해 그믐달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정도전은 전후 3년간을 부모의 산소 곁에 여막을 치고 시묘살이를 했다. 그 당시 관리나 선비들은 부모상을 당했을 때 거의 100일 만에 탈상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후일 왕이 교서를 내려 ‘부모상에 성인의 예절을 잘 지켰다’고 상찬할 정도였다.

정도전은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학문을 닦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묘를 하는 상주가 학문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정도전은 어린 동생들과 함께 이들을 성심으로 가르쳐 많은 제자들이 등과하게 했다. 그 자리는 지금 ‘문천서당’으로 남아있다.


#3. 새로운 세상, 새 시대를 향한 꿈

부모의 상을 당해 영주에 머물렀던 시간은 그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정몽주가 ‘맹자’를 한 질 보내온 것을 정도전은 매일 한 장이나 반 장씩 아껴가며 읽고 연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도덕과 정의, 민본주의와 왕도론, 특히 백성의 인망을 잃은 군주는 더 이상 군주일 수 없는 평민에 불과하므로 없애도 된다는 혁명 사상을 강조한 맹자는 정도전 자신의 가치관에 정확히 합치했다.

정도전은 고향에 있는 동안 동생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힘써서 노비 가운데 건장하고 힘이 센 자는 모두 형제와 누이에게 주고 자신은 늙고 약한 자만 가졌다고 사서에 기록돼 있다. 노비는 삼판서 고택 같은 양반가의 자산을 보전하고 늘려나가는 데, 기득권층의 위상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재산’이었다. 그는 청백리였던 아버지를 닮아 개인 소유의 집이나 토지 같은 유무형의 재산에는 별다른 욕심이 없었다. 실상 그의 꿈은 어마어마하게 큰 집, 새로운 정치 사회체제와 나라를 새로 짓는 것이었다.

918년부터 500여년간 존속한 고려왕조라는 거대한 ‘고루거각’은 공민왕 이후의 임금이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으며 정통성을 위협받았고, 친원파 권문세가의 토지 겸병, 정치와 유착하여 세속화한 불교의 폐해 등으로 백성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정도전 자신의 국가 설계도라 할 만한 ‘조선경국전’에는 그가 꿈꿨던 나라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들어 있다.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그러므로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적게 하여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해주어야 하며 천재지변으로 해를 입으면 부역을 덜어주고 면제해 주는 것으로 그 근본을 두텁게 해야 하는 것이다.”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고 백성이 군왕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진 정도전은 백성의 마음이 떠난 왕, 왕조는 존속할 수 없고 존속할 이유도 없다고 여겼다. 이처럼 그는 20대에서 30대에 걸쳐 새로운 체제, 새 세상이라는 웅대한 설계를 완성해가고 있었다. <下편에 계속>

20140929

글=성석제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 : 박석홍 전 소수박물관장
공동기획 : 영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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