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성석제 영주선비를 이야기하다 .6 <끝>] 새 시대의 설계자를 낳은 터전-정도전과 삼판서고택(下)

  • 손동욱
  • |
  • 입력 2014-09-30   |  발행일 2014-09-30 제13면   |  수정 2015-01-16
왕권에 짓밟혀버린 정치개혁…생가에 드리워진 ‘역사의 그늘’

 

20140930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있는 정도전의 부모 묘소. 왼쪽 묘에 아버지 정운경과 어머니 영천우씨가 합장되어 있다. 정도전은 25세 되던 해에 잇따라 부모상을 당하자 고향 영주로 돌아와 3년 시묘살이를 했다. 이후 29세 되던 해 여름에 성균관의 박사에 제수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새로운 세상을 도모했다.

20140930
정도전의 부친인 정운경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고 있는 모현사(慕賢祠).
#1. 유배생활 중 피폐한 민생 목격

정도전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었다. 외조모가 노비의 자식이라는 반상의 약점이 오래도록 따라다닌 것이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부모뿐 아니라 조부모, 외조부모의 신분에 있는 흠이 자손에게도 그대로 물려지는 법이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을 모두 막을 수 없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약점이 정도전으로 하여금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추구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영주에서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온 그는 29세 되던 여름에 성균관의 박사에 제수되어 중수된 성균관에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지금의 국립대 총장에 해당하는 성균관의 대사성이 스승인 이색이었고 동료 교수(박사)로는 정몽주, 이숭인, 박상충, 김구용 등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 무렵 명나라가 중국에서 일어나자 고려는 인근 국가 중 가장 먼저 명나라에 복속한다는 취지의 외교문서를 보냈고 이에 명나라에서는 답례로 제복과 악기를 주었다. 이때 태상박사로 있던 정도전이 태묘에 제사를 올리는 예절과 음악, 제의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하자 공민왕은 ‘큰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다’하고 예조정랑으로 옮긴 뒤 성균관·태상시 두 곳의 박사를 겸하게 하였다.

정도전을 전폭적으로 신뢰한 왕은 권좌의 상징인 옥새를 맡겨 문서를 담당하게도 했다. 공민왕이 시해 당하고 권신 이인임이 신돈을 맞아들인 뒤에도 정도전에게는 성균관 사예, 예문관 응교, 지제교가 제수되었으며 서연에 참석해서 임금에게 대학을 강론했다. 하지만 전의부령으로 전임되었을 때 명나라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간 원나라의 잔존세력인 북원과 친하려는 이인임에 정면으로 맞섰다가 결국 나주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나주에서의 유배생활은 ‘천문심답’ 등 많은 창작물을 낳게했을 뿐 아니라 피폐한 민생과 가렴주구의 학정을 체험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도전은 유배에서 풀려나서도 위험 인물로 낙인돼 개경 근처에서 사는 게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주, 제천, 안동 등을 편력하며 지냈다.

1380년, 거주지 제한이 풀려 삼각산 아래 집으로 돌아가 삼봉재(三峯齋)를 짓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도전이 학생을 가르친다는 소식에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그는 거업(擧業, 과거시험)을 거쳐 관리가 된 사람과 유자(儒者, 선비)가 본디 같은 사람이므로 서로를 비난할 게 아니라 백성을 위해 앎과 실천을 일치시켜야 함을 역설했다.



#2. 정도전에게 이성계는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나

42세 되던 해 가을(1383년), 정도전은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 함주로 간다. 탐욕스러운 권력층, 낡은 체제를 뒤집어 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혁명의 동지’로서 이성계가 합당한 인물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겨울을 함주에서 나고 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가 여름에 함주로 간다. 두 번째 만남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의지를 확인했다. 이어 정도전은 전교부령으로 복직되었고 동시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는 정몽주와 함께 서장관으로 사행길에 올랐다. 사행에서 돌아오는 날에 종삼품인 성균관의 좨주, 지제교에 제수되었다.

외직을 청해 남양부사가 되었던 정도전은 이성계의 천거에 의하여 성균관의 대사성을 제수받았다. 얼마 후 밀직제학, 예문제학을 겸하고 과거시험관이 되었다. 그는 산법, 의술에서도 저서를 냈을 정도로 당대에는 모르는 게 없는 박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1389년, 그는 조준 등과 오래도록 계획해온 전제 개혁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고려를 지탱해온 낡은 체제의 근본을 흔드는 사건이었다. 그해 11월 신돈의 핏줄로 의심 받고 있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새 임금으로 앉히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실현시켜 공신이 되었다.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가 명을 치려한다는 오해를 풀었다. 1390년, 오군을 통합하여 삼군도총부가 설치되었을 때 우군 통제사가 되어 군권을 손에 쥐었고 6월 정당문학으로 복직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도전의 앞길은 탄탄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9월에 박자량 사건에 연루되어 봉화로 유배되었고 공신록권을 회수당했다. 이듬해 봄, 귀양에서 풀려나 영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 아버지의 집에서 개경의 이성계가 낙마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시 체포되어 예천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광주로 유배되었다.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죽고 난 뒤에야 중앙관계로의 복귀가 이루어졌다.

정도전은 1392년에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했다. 그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취중에 이따금 ‘한고조가 장량을 쓴 게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한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승자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장량은 조국인 한(韓)나라를 멸망시킨 데 대해 복수를 하려고 진시황의 암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하고, 한(漢) 고조 유방에게 투신해 최고의 참모로서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를 건국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결과적으로 유방을 이용해 복수를 한 셈이다.

하지만 정도전이 뜻하는 바는 범주가 달랐다. 맹자의 혁명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에게 바친 ‘조선경국전’에서 이렇게 언명했다.

“임금의 지위는 지극히 존귀하다. 그러나 천하는 넓고 백성은 많다. 백성은 극히 약하나 힘으로 협박해서는 안 되며 극히 어리석으나 지모로 속여서 안 된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백성은 임금을 제거한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조선의 개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정도전은 자신이 생각해온 국가와 정치, 사회, 민생, 법률 체재에 관한 설계도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한양을 새로운 도성으로 정하고 새 수도를 건설하는 총책임자가 되었다. 경복궁을 짓고 역사의 교훈을 담은 ‘고려사’를 쓰고 법의 기초가 될 ‘경제문감’ ‘조선경국전’을 지었다. 세자의 스승으로서 세자에게 맹자를 가르쳤다. 사병을 혁파하고 자주국가의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 정도전에게는 조선이라는 나라, 태조 이성계는 왕도정치와 민본주의라는 가치관과 설계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3. 새 세상을 설계한 인물을 낳은 고택은 말없이…

1398년,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해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는 정도전과, 왕권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이방원이 정면으로 부딪쳐 무인정사(제1차 왕자의 난)가 일어난다. 정도전은 이때 두 아들, 동생 도존과 함께 죽고 만다. 맏아들 정진은 이성계를 수행한 까닭에 화를 피했다가 나중에 군졸로 징발된다. 목숨을 건진 셋째 동생 도복은 후일 태종 이방원 치하에서 한성부 판윤을 지내기까지 하지만 낙향 후 삼판서 고택으로 가지 않고,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이산면에서 만년을 보냈다. 맏아들 정진은 세종 대에 형조판서를 역임하던 중 한양에서 사망했다. 물론 이때는 삼판서 고택이 이미 사위 황유정에게 물려진 다음이었다.

1865년(고종 2) 경복궁을 중건한 흥선대원군은 궁을 설계한 정도전의 공로를 인정해 그의 봉작을 회복시켰다. ‘순충분의좌명개국공신특진대광보국숭록대부판삼사사동판도평의사사사겸판상서사사영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판의흥삼군부사수문전태학사세자사봉화백(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特進大匡輔國崇祿大夫判三司事同判都評議使司事兼判尙瑞司事領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判義興三軍府事修文殿太學士世子師奉化伯鄭道傳)’이 그것이다.

20140930
‘문헌(文憲)’이라는 시호가 내렸는데 부지런히 공부하고 학문을 좋아하므로 ‘문’이라 하고 박학하고 다재다능하므로 ‘헌’이라는 뜻이다. 아울러 ‘유종공종(儒宗功宗, 유학의 으뜸이자 나라를 일으킨 공이 최고)’라는 편액이 내려졌다.

1465년 증손 정문형에 의해 중간된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의 서문을 쓴 신숙주는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으나 선생에 비교될 만한 이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정도전은 ‘신하 중의 신하’였지만 근본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자 혁명가였다. 새 세상의 설계자였다.

정도전이 남긴 흔적은 고향인 영주보다는 서울에 역력하게 남아 있다. 경복궁, 사대문, 사대문 안의 지명 수십 곳에 이르기까지 정도전이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종묘와 사직단, 주요 건축물과 기관의 배치가 모두 정도전의 설계대로 이루어졌다.

한 시대를 설계하고 건축한 인물을 낳은 삼판서 고택은 말없이 백열의 한낮 속에 앉아 있었다. 뒤뜰에 무성한 초목처럼 수많은 생명의 이야기를 품은 깊고 그윽한 그늘을 거느린 채.

글=성석제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 : 박석홍 전 소수박물관장
공동기획 : 영주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