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불편한 진실 대구 ‘가창골 학살’ 재조명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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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10   |  발행일 2014-10-10 제33면   |  수정 2014-10-10
아버지는 골로 갔다…그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20141010
1950년 여름 가창댐 아래 골짜기에서 ‘골로 간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 지난 4일 함종호 10월항쟁유족회 자문위원이 학살 현장을 가리키며 그날의 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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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덕교회(대구시 중구 삼덕동2가) 인근 메트로 주차장은 옛 대구형무소건물 정문이 있던 자리다. 시인 이육사의 수인번호 ‘264’는 대구형무소 복역시절 번호였다. 이밖에 시인 김영랑 등이 복역을 했으며 독립운동가 장진홍·박상진 열사 등은 이곳에서 순국했다. 대구형무소 옛터에 표석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헌병대서 보도연맹 5천명 등 총 8천여명 가창골 등으로 끌고가 집단학살
1950년 6∼9월 집중…정치적 견해 다른 국민 잠재적 적대세력으로 몰아
좌익 등 사상과 무관한 민간인 대거 포함…진실규명 여전히 현재진행형

세계미술계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Guernica)’는 ‘아비뇽의 처녀들’과 함께 피카소를 대표하는 그림이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 일어난 대량학살의 비극적 참상을 예술로 표현한 대작이다. 피카소는 14년 뒤 또 한 번의 학살을 전 세계에 폭로하는 그림을 그렸다.

총과 칼을 든 철갑투구의 군인이 벌거벗은 여인과 아이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이 그림의 제목은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이란 작품이다. 피카소는 6·25전쟁 중 일어난 대학살 소식을 접하고 이 그림을 그렸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6·25전쟁 당시 미군이 개입한 황해도 신천 민간인학살이 창작배경이란 설 때문에 1980년대까지 ‘국내반입금지예술품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학살은 유사 이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야만의 산물이다. 인류역사상 20세기에 자행된 수천만명에 대한 학살은 19세기 이전까지 벌어진 누적학살보다 그 수가 많았다. 나치의 유대인 홀로코스트, 일본의 조선인·중국인 대학살, 소비에트의 폴란드인 학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등이 그것이다. 학살은 대부분 전쟁이라는 틀 속에서 이뤄져왔으며 심각하고 지속적인 후유증을 낳았다. 도덕적, 윤리적인 책임은 물론 법적 배상과 보상을 해야만 했다. 그런 관점에서 독일의 사죄와 참회는 모범이 되며 일본은 지탄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에서 보듯 6·25전쟁을 전후로 한반도에선 100만명가량의 대량학살이 있었다. 6·25전쟁 전에는 10월항쟁(1946년), 제주 4·3항쟁(1948년), 여순항쟁(1948년) 등으로 약 10만명의 양민이 학살됐다. 그 학살의 중심에 보도연맹사건이 있다.

보도연맹사건은 국군특무대, 헌병대, 반공극우단체 등이 개입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학살한 사건이다. 국민보도연맹은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을 사상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졌으나 이 과정에서 좌익 활동 및 사상과 무관한 민간인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지금까지 정부는 공식적으로 4천934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고 발표했다. 지금도 법정소송과 진상조사가 이뤄지고 있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특히 6·25전쟁 중 북한의 미점령지역인 영남에서 대량학살이 많았다. 경남 23만명, 경북 21만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도시지역으로선 단연 대구가 가장 많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골로 간다(골짜기로 죽으러 간다)’는 말의 어원이 생긴 것도 이때다. 그 ‘골’은 바로 물 좋고 산 좋기로 유명한 ‘가창골’이다. 이 밖에 경산코발트광산, 앞산빨래터, 학산공원, 신동재, 파군재 등이 있다.

대구에선 50년 6~9월에 학살이 집중됐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 2천~3천명과 각지에서 예비 검속된 보도연맹관련자 5천여명 등 8천여명이 가창골, 경산코발트광산 등 학살터로 끌려갔다. 대전과 부산의 형무소에서도 같은 학살이 있었다. 6·25전쟁을 전후한 민간인학살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국민을 잠재적 적대세력으로 몰아 재판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지난 1일 대구고법 제3민사부(강승준 부장판사)는 대구보도연맹사건 희생자유족 이모씨 등 17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원고에게 3억5천만원을 배상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이모씨의 할아버지는 50년 7월, 대구가창골에서 군헌병대 등에 끌려가 학살됐다.

이번 주 위클리포유는 당시 대량학살현장이었던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 병풍산과 가창댐 아래 학살현장 등을 찾았다. 50년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돼 아버지와 함께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던 유병화씨를 인터뷰했다. 또 10월항쟁과 가창골 학살조사에 매진하고 있는 함종호 10월항쟁유족회 자문위원의 글도 소개한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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