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난 뒤 발굴조사 중단…가창댐 건설 때 굴착기로 땅 파자 무더기 유골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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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10   |  발행일 2014-10-10 제34면   |  수정 2014-10-10
●가창골 학살 현장 르포
20141010
함종호 10월항쟁유족회 자문위원이 가창골학살지의 하나인 가창면 상원리 옛 대한중석 폐광인 달성광산을 가리키고 있다.

지난 4일, 함종호 10월항쟁유족회 자문위원과 함께 가창골 보도연맹학살현장을 찾았다. 가창골은 6·25전쟁 중 경산코발트광산과 함께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학살지였다. 가창골은 가창댐 아래 계곡뿐만 아니라 인근 가창면 상원리 일대 계곡 등을 통칭하는 지명이다.


◆가창면 상원리 달성광산 폐광지

달성군 가창면 스파밸리를 지나 왼쪽으로 행정교를 건너면 행정리가 나온다. 다시 동쪽으로 가면 가창면 상원리다. 이곳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상원2리와 경산시 남천면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엔 전원주택단지 공사가 한창이다. 풍광이 빼어난 이곳은 6·25전쟁 당시 통곡의 길이었으리라.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상원2리인데 막다른 길이다. 오른쪽 남천 쪽 길을 택해 5분쯤 차를 타고 오르면 옛 대한중석광산이 나온다. 달성군산림조합이 세운 임도의 표지석 부근이 바로 폐광 수직갱도 입구다. 남천으로 가는 이 길은 2003년에 난 임도인데,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시멘트 포장길이다. 간간이 산악 바이크족이 땀을 흘리며 페달을 밟고 있다.

1916년에 개발된 이 텅스텐광산은 한때 강원도 영월의 상동광산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광산이었다. 전국 최고의 채굴량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75년 이후 매장량이 소진돼 폐광상태에 있다가 94년 완전히 폐광됐다. 폐광산에서 나오는 유해물질로 산 아래 주민들이 고통을 받았을 터이다. 지금은 흙으로 입구를 막아버려 광산의 흔적이 있었는지 알 수조차 없다. 대구시 달성군과 경산시의 경계선에 위치한 이 비내고개는 달성의 주석광산 인부와 경산지역 주민들이 넘나들던 고개였다. 곧장 가면 팔조령으로 이어진다.

함 위원은 “숲 가운데 화약창고가 있었는데 학살은 거기서 일어났다. 장마철 큰비가 내리면 인골이 계곡을 따라 내려오곤 했다”고 말했다. 6·25전쟁 당시 골짜기 아랫마을 주민은 트럭 짐칸에 가득 사람을 싣고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집으로 들어가라는 경고방송을 들었다고 한다.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인 계곡의 만곡부에 이르자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까마귀 두 마리가 “까악~까악~” 하며 구슬프게 울어댔다. 함 위원은 “11월쯤 이곳에서 유골 발굴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했다.



◆가창댐 아래 산자락

‘골로 가는 길’의 대표적인 곳은 가창댐 아래 산자락이다. 대구시 수성구 파동~청도 간 새로 난 자동차전용도로를 따라 가창으로 가다가 신천상류 용계천 용계교를 지나기 전 오른쪽으로 틀면 가창댐이 나온다. 한때 이곳에도 마을이 있었으나 댐이 들어서면서 주민은 이주했다. 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게이트볼 구장을 비롯해 다목적운동장이 들어섰다. 게이트볼장 오른쪽으로 좁은 등산로가 보인다. 이 길은 앞산 둘레길 구간이기도 하다. 등산로를 따라 약 5분간 오르면 사람 10명은 족히 누울 수 있는 큰 너럭바위가 나온다. 너럭바위에서 50m쯤 오르면 왼쪽에 66㎡(20평)쯤 되는 공터가 나온다. 지금은 수풀이 우거졌지만 한때는 밭을 일군 듯했다. 남쪽으로 가창댐이 보인다.

“가창댐을 건설할 당시 굴착기로 땅을 파자 수많은 유골이 계속해 나왔다더군요. 어떤 굴착기 기사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면서 그만뒀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함 위원은 10월항쟁과 보도연맹학살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8년째 가창골 학살현장을 찾아다니고 있다.

“수년 전부터 매년 7월31일 가창댐수변공원에서 가창골학살위령제를 지내자 인근 마을 주민이 이곳 학살현장을 제보해 주었습니다.”

국군 특무대와 헌병대 등은 이곳에서 양심수와 보도연맹원 등을 학살하고 난 뒤 시신을 파묻었다. 4·19혁명이 일어나고 보도연맹사건에 대한 조사가 잠시 이뤄질 때 가창골학살피해유족들이 이곳을 찾아 약 300구의 시신을 발굴했다. 하지만 이듬해 5·16군사정부가 들어선 뒤 발굴조사는 중단됐고 비극의 역사는 묻혀버렸다. 당시 유족들이 가묘를 썼다가 시신을 이장했다고 하지만 현재 그 이장지를 추측할 뿐 발견하진 못했다.

함 위원은 “권영진 대구시장이 지난 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전 가창골학살의 진실을 밝히고 위령비를 세우는 데 협조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우선 유골발굴부터 시작해야 할 겁니다. 대구시의회도 해원상생의 차원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어간 이들의 넋을 달래는 데 협조하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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