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하다 .24] 개령향교

  • 임훈 박현주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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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16   |  발행일 2014-10-16 제11면   |  수정 2014-11-21
“서양 오랑캐놈들과 손을 잡을 순 없소”
인근 유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20141016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개령향교는 500여년 동안 유교 성현을 모셔온 곳으로, 구한말 유생들이 개화정책에 반기를 든 ‘영남만인소 사건’의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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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령향교 내삼문을 지나면 대성전이 나온다. 1989년 개령향교 대성전 중수 당시 대들보에서 ‘개령향교신축중수이건기문’이 발견되어 낙파 류후조의 억울함이 완전히 풀릴 수 있었다.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개령향교는 오랜 세월 유교 성현을 모셔왔다. 500여년 동안 수차례 자리를 옮기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향교에 소속된 이들은 전통풍속을 지키는 데 힘쓰고 있다. 특히 개령향교는 구한말 유생들이 개화정책에 반기를 들고 나섰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사건’의 중심이었다. 성리학 중심의 사회체제를 지키려 고군분투한 낙동강 서부권의 유생들이 개령향교에서 자신들의 뜻을 모았다. 역사는 구한말 영남유생들의 뜻이 모두 옳았다고 단정짓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행동이 나라를 지키려는 숭고한 뜻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하다’ 24편은 제국주의 확산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김천지역 유생들에 관한 이야기다.

개화파에 맞서 ‘위정척사’ 부르짖은
‘영남만인소’ 사건의 또다른 중심…
아쉽게도 관련 자료 남아있지 않아
탄압 우려한 유림이 없앴다는 說도…

1473년 창건 후 수차례 이전 곡절 끝
1837년 현재 동부리 자리로 옮겨져


◆영남만인소의 중심

식민지 확보를 위한 서구 열강의 세력다툼이 한창이던 1881년(고종 18) 영남지역 유생들의 분기가 하늘을 찔렀다.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김홍집(金弘集, 1842~96)이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후 개방정책만이 조선이 살길이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김홍집은 청나라 사람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들여와 ‘서구 열강과의 수교만이 살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영남지역 유생들은 성리학적 전통을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는 ‘위정척사(衛正斥邪)’만이 살길이라 천명하고, 개화파의 주장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팽창을 가속화하고 있었고, 영국과 러시아는 동북아시아의 주도권 다툼에 한창이었다. 아편전쟁(1840~42) 이후 몰락을 거듭하던 청나라조차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그만두지 않았다. 미국 또한 1866년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조선에 보내 무력시위를 하며 통상을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구문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빠르게 퍼졌다. 일련의 국제정세는 조선사회의 주축이었던 유생들에게도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이에 영남지역 유생 1만여명은 1881년 2월, 조정의 개방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문에 연대 서명해 자신들의 뜻을 알리고자 했다. 이른바 영남만인소 사건이다.

특히 영남만인소는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만인소(萬人疏)’로 기록되고 있다. 만인소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1만여명의 유생(儒生)이 연명해 올린 일종의 서명운동이다. 1881년의 영남만인소 이전에도 영남 유생들의 만인소는 간간이 있었지만, 이때의 영남만인소를 끝으로 성리학을 숭상하는 유림사회는 점차 붕괴하기 시작한다.

특히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의 개령향교는 영남만인소 사건의 한 축이었다. 영남만인소는 영남 중에서도 안동과 영주, 김천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한양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낙동강 왼편인 영남좌도는 안동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연명이 이뤄졌고, 낙동강 오른편인 영남우도에서는 개령향교가 위정척사의 중심이었다.



◆성리학적 질서를 고수하다

“서양의 오랑캐 놈들과 어찌 손을 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개령향교에는 인근의 유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게 다 개화파들 때문이오. 우리가 힘을 모아 조선 유생들의 의지를 전하께 알려야 하오.” 유생들은 모두 한목소리를 내며 개화파를 비난했다. 유생들은 세력 확장에 혈안이 된 서양 나라들과의 수교로 새 문물이 들어온다면 기존의 성리학적 질서가 무너질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연명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인근의 모든 유생이 개령향교로 달려와 서명을 마쳤다. 서명이 담긴 만인소는 너무 무거워 한 명이 들기에는 버거웠다. 지게를 진 머슴이 와서야 간신히 만인소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김천을 비롯한 영남 유생들이 개화정책에 분노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향토사학계는 조선후기 다양해진 성리학의 갈래를 가장 큰 원인으로 분석한다. 실제로 조선후기로 들어서면서 영남지역 남인과 서해안·기호지방을 중심으로 한 노론의 대립은 고착화됐다.

특히 퇴계 이황의 문하 상당수는 숙종대부터 관계진출을 봉쇄당하면서 학문에 주력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이유로 영남에서는 중앙정부에 대한 반발심이 상대적으로 컸다. 안동을 중심으로 퇴계의 문하들이 똘똘 뭉쳤고, 김천의 분위기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구한말의 영남지역 유생들 역시 중앙정계를 주름잡던 개화파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외세의 영향을 극단적으로 경계한 유생들의 중심에 개령향교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영남만인소 당시 개령향교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향토사학계에 따르면 상소 때문에 탄압을 받을까 우려한 유림들이 관련 자료를 일부러 없앴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치 않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영남만인소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논외로 하더라도, 용기 있는 행동임에 분명하다. 역사적으로 최근의 사건임에도 관련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점은 매우 아쉽다”고 말했다.



◆낙파 류후조와 개령향교

개령향교는 1473년 개령현감 정난원이 관학산(유동산) 아래 창건한 향교로 1522년과 1563년 중수했다. 1609년 감천의 범람으로 수해가 잦자 동쪽으로 옮겼다가 1837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개령향교의 이전과 관련한 이야기도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데 상당히 흥미롭다. 이야기의 골자는 서애 류성룡의 후손이자 고종 때 재상의 반열에 오른 낙파 류후조(洛坡 柳厚祖, 1798~1876)가 명당으로 이름난 관학산에 자신의 묘를 쓰기 위해 사사로이 향교를 이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향토사학자들은 청빈한 삶을 살았던 낙파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향교를 이전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청백리로 이름난 낙파가 사익을 위해 향교를 이전했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다. 1989년 개령향교 대성전 중수 당시 대들보에서 발견된 ‘개령향교신축중수이건기문’의 기록에서도 낙파가 세상을 떠난 연도와 향교를 옮긴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낙파의 자유로운 성격도 뜬금없는 소문에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 고향 상주로 낙향한 낙파는 자신을 찾는 관리들과 문인들의 방문이 번거로울 것이라 생각해 낙동강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낙동대감’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재상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 낙파의 성격은 세인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낙파의 억울함은 풀렸지만 개령향교에 대한 여러 이야기는 개령면을 내려다보는 관학산의 지세와 무관치 않다. 관학산의 주산인 감문산은 삼한시대 소국인 감문국의 감문산성이 위치한 곳으로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곳이다. 호랑이 형상인 감문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신라에 불교를 전한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계림사라는 절을 지었다고도 전해진다. 개령면 주민들 역시 관학산 아래 개령향교 주변이 천혜의 명당이라 믿고 있다.

명당에 위치한 덕분인지 개령향교는 지금까지도 옛 전통을 지켜나가고 있다. 매년 가을, 지역 노인들을 위한 기로연을 열어 ‘효(孝)’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향교의 본래 목적인 유교 성현을 모시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음은 물론이다.

글=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참고문헌=김천시사, 송기동 저‘김천의 마을과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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