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성의 북한일기 .13] 천진난만한 북녘 아이들…카메라만 다가가면 피하는 이유는?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4-10-17   |  발행일 2014-10-17 제34면   |  수정 2014-10-17
20141017

◆1997년 12월7일 일요일 눈

온 천지가 하얗게 변해 있다. 어제 저녁부터 내린 눈이 제법 수북이 쌓였다. 날씨 탓에 계속해 공사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겨울이다. 나진은 겨울에 바람이 몹시 분다고 한다. 추운 곳이다. 겨울철 주민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추위와 굶주림에 얼마나 고생을 할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이것이 정녕 동포애의 표현인가. 요즈음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빈곤 속에 풍요로움이다. 이곳 사람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호사로움이다. 난방이 되지 않는 방이지만 그럭저럭 지낼 수 있고 물이 귀하다 하나 세수하고 양말은 빨 수 있다. 아침은 호텔 식당에서 따끈한 국물을 먹을 수 있어 충분하고 점심, 저녁은 무지개식당 사람들의 따뜻한 정성이 담긴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더 바랄 게 무언가. 감사와 미안한 마음이 함께한다. 낮에 회령에서 사람들이 C국장을 찾았다. 회령에서 목재를 가져와 현장에 납품을 했는데 납품대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일행이 3명이다. 10원(북한돈)짜리 국수로 연명을 하면서 C 국장을 기다린다. 중국에 나간 C국장은 들어올 것 같지 않다. 호주머니에 600원(북한 돈)이 있다. 중국 돈으로 환산하면 24원이다. 한국 돈으로는 2천원쯤 된다. 이들에게 이 돈을 건넸다. 처음에는 사양을 하다가 받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내가 도리어 고맙다. 회령으로 돌아가려면 길이 멀다. 적은 돈이지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사진기를 가지고 나와 설경을 담았다. 개울에서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뛰어 노는 모습을 멀리서 카메라에 담다가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모두 등을 돌려 달아난다. 재미있게 노는 것을 내가 방해를 한 것 같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자기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왜 피하는 것일까.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인가. 어제 공사 현장에서 K선생과 기념 사진을 찍자고 제의를 했는데 거절했다. 오늘은 작업복 차림이니 다음 날 좋은 옷을 입고 사진을 찍자면서 사양했다. 나와 거리를 두려는 것 같다. 예의도 바르고 공손한 모습으로 나를 대한다. 그러나 아직은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 조급할 것이 없다. 내 마음을 먼저 열어 보이자. 천천히 열어 보이자. 그들의 마음도 서서히 열리겠지.

어제 콘크리트 슬라브 공사 때 아래에서 불을 때던 친구를 만났다 현장에 확인차 들렀더니 그 청년이 이틀간 하루 종일 불을 때고 있다. 평양 출신 P다. 평양 돌격대원들은 모두 평양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예, 알았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뿐이라는 것이다. 상사의 명령에 절대복종이란다. 그래서 교대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불평 한마디 없이 혼자서 묵묵히 일을 하고 있다.

◆1997년 12월12일 금요일 맑음

기다리던 C국장은 오지 않고 그의 부인만 왔다. 오후에 C국장 차를 모는 운전수가 중국으로 나간다고 한다. 공사장도 월동에 들어갔다. 내가 이곳에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없다. 오후에 차로 중국에 가기로 결심을 했다. 학교와 C국장과도 통화를 했다.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얼른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내가 오후에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무지개식당 박 여사가 장사를 접고 나를 위한 송별회 자리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함께한 사람이 참석했다. 언제 준비를 했는지 푸짐한 상차림이다. 산토리 위스키도 준비했다. 참석한 모든 사람은 한결같이 잘 다녀 오라고 한다. 내년에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다. 박 여사를 비롯하여 많은 이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떠난다. 나는 참으로 행복한 놈이다. 지구상에서 살아가기 힘든 땅으로 손 꼽을 수 있는 북한이 아닌가. 내년 3월에 다시 와서 그 빚을 다 갚으리라. 박 여사는 나를 국경원정까지 배웅하겠다고 했다. 박 여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억지로 떼어놓고 떠나는 내 마음도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전 연변과학기술대 건설부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