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경북여성 .1]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최초의 여성통치자, 선덕여왕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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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20   |  발행일 2014-10-20 제11면   |  수정 2014-11-21
백성을 감동케 한 ‘애민의 리더십’… 국난을 돌파한 ‘뛰어난 외교술’

◇ 시리즈를 시작하며

경북 여성들은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며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특유의 인내와 저력으로 가문을 일으켰고, 국난 때는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졌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남성 중심이었다. 이 때문에 여성의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기억되지 못하고 조명받지 못했다. 언제나 누구의 어머니로, 아내로, 딸로만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다행히 경북도는 최근 몇 년 사이 지역 출신의 여성을 집중 조명하고 다양한 선양사업을 펼치고 있다.

영남일보는 경북도와 공동으로 ‘역사 속의 경북여성’ 시리즈를 연재한다. 정치, 사회, 교육, 문화, 예술 등 각 방면에서 선구자 역할을 한 경북의 여성들을 재조명하고, 그들의 치열했던 삶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낸다. 원고 집필은 이하석·성석제·박희섭·김진규 등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와 심충택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이 맡는다. 시리즈 첫회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통치자인 선덕여왕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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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선덕여왕릉.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은 여성 특유의 기질로 백성을 자식처럼 돌본 것은 물론, 탁월한 인재등용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1. 왜 덕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나

신라 26대 진평왕은 무려 53년간 재위하며 나라를 잘 다스렸다. 하지만 나이 칠십이 넘으면서 잠을 제대로 못 이룰 때가 많았다. 자신의 왕위를 이어갈 왕세자가 없어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진평왕에겐 왕비 마야부인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덕만, 천명, 선화 이렇게 공주만 셋 있었다. 당시 왕위는 성골 출신만이 이어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골은 덕만 공주와 사촌동생인 승만 공주뿐이었다. 하지만 유사 이래로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준 적은 없었다. 게다가 24대 진흥왕 당시 국토확장정책으로 억눌러 두었던 고구려와 백제가 나날이 왕권과 병력을 강화하고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한다는 불길한 소문마저 들려오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왕의 고민이 깊어갔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당나라 태종이 붉은빛, 자줏빛, 흰빛의 세 가지 빛깔의 모란꽃 그림과 꽃씨 석 되를 선물로 보내왔다. 진평왕이 내전에서 모란꽃 그림을 보고 있을 때 마침 곁에 있던 덕만 공주가 다소곳이 말했다.

“이 꽃은 비록 아름다우나 향기는 없을 것입니다.”

덕만 공주의 지적에 진평왕이 고개를 돌렸다.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이 꽃 그림을 보면 벌도 나비도 없습니다. 대체로 여자가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모이는 법입니다. 이 꽃 그림은 매우 아름다우나 벌과 나비가 없는 걸로 보아 향기가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진평왕은 신하에게 꽃씨를 내리고 내전 뜰에 심도록 했다. 얼마 후 싹이 나고 꽃이 피었으나 덕만 공주의 예측대로 꽃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았고, 벌과 나비도 찾아들지 않았다. 진평왕은 덕만 공주의 식견이 뛰어난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사실 이전부터 덕만 공주가 자비로운 성품에 타고난 통찰력과 명민함을 갖추었다는 얘기는 신하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진평왕은 덕만 공주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지켜보면 볼수록 인자한 성품에다 사리에 밝고 명민했으며 지혜 또한 깊었다. 진평왕은 흔쾌히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마침내 632년에 덕만 공주는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그녀가 신라 27대 선덕여왕이다.


신라문화 최고의 전성기 이끌고 삼국통일 영웅 김춘추·김유신 발탁
인재등용에도 남다른 능력 보여줘···죽는 날까지 예언한 ‘지혜의 여왕’


#2. ‘자식 돌보듯’ 여성 특유의 애민 정치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한 선덕은 먼저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베푸는 데 힘을 쏟았다. 즉위한 2월에 대신 을제(乙祭)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그해 10월에 추위가 닥치자 급히 전국 각 지방에 특사를 보냈다. 그것은 과부와 고아, 홀아비와 자식 없는 노인을 비롯한 홀로 사는 사람과 생활능력이 없는 백성을 조사하고, 곡식과 땔감을 주선하여 겨울을 편히 날 수 있도록 배려한, 여성 특유의 세심한 조치였다.

또 즉위 4년 10월에는 이찬 수품과 남편 용수를 전국 각지로 파견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구휼사업에 나섰다. 그 뒤 즉위한 지 7년째 되는 638년에 고구려가 침공해왔다는 소식을 접한 여왕은 장군 알천을 급파하여 최우선으로 백성을 안전한 곳에 피신시킨 연후에 고구려와의 전쟁에 임하도록 명했다. 이는 백성을 염려하는 여왕의 따뜻한 애민(愛民)정신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보살피듯 하는 이러한 여왕의 자애로운 태도에 감동한 백성들은 자진해서 여왕을 따르고 나랏일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여왕은 인재등용에도 남다른 능력을 드러냈다. 널리 훌륭한 인재를 구하고, 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통치의 기본임을 잘 알고 있던 선덕여왕은 후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룰 김유신과 김춘추를 전격 등용했다.

이는 비록 진골이었으나 가야의 후손이란 이유로 신라 귀족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던 김유신과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라는 신분적 약점을 지닌 김춘추를 과감하게 중용함으로써 개혁이 필요한 조정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동시에 능력은 갖췄으나 등한시되던 신진인사의 숨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기회를 열어준 계기이기도 했다.

아울러 여왕은 국가의 미래를 선도할 인재를 육성하는 일에도 적극적인 열성을 기울였다. 신라의 많은 자제를 선발하여 당나라에 유학을 보냈으며 당 태종에게 국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당시 당나라는 아시아 최고의 선진유학지로, 당 태종이 직접 천하의 뛰어난 학자를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강론하고 널리 외국의 인재까지 등용했다. 또 능력 있는 학생을 배출해 관리로 중용하고 있던 시기였다. 젊은 인재들에게 선진학문을 배우게 하는 일이야말로 국가를 융성하게 하는 지름길임을 여왕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인재육성정책을 통해 후일 통일신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인재를 양성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3. 신라문화 전성기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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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신라 문화의 전성기를 이끌기도 했다. 동아시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진 첨성대는 선덕여왕 16년에 세워졌다.

여왕은 문화적인 분야에도 다양한 업적과 성과를 남겼다. 천문현상을 관측하고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한 첨성대(국보 제31호)를 최초로 건립했다. 첨성대는 천체의 운행을 살펴 국가의 융성과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여왕의 마음이 깃든 국가적 축조물이었다. 또 즉위 3년에는 성진리 강가에 영묘사(靈妙寺)를 세웠고, 서라벌 북천 남쪽에 분황사(芬皇寺)를 세웠다. 분황사란 말 그대로 향기로운 황제의 절이란 뜻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된 기이한 일화가 일어났던 곳이며, 고승 원효 대사가 머물며 ‘화엄경소’와 ‘금강명경소’를 비롯한 많은 저술을 남긴 명찰이기도 했다.

또 신라 최대의 절인 황룡사에 당시 동양 최고의 탑인 9층 목탑을 세운 것도 여왕의 간절한 호국의지의 발현이었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자장(慈藏) 법사가 국가의 안위와 평안을 위한 비책으로 탑을 세울 것을 요청하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탑의 아홉 개 층은 모두 신라 변방의 나라를 의미했고, 탑을 세우는 것으로 그들 나라의 침략과 재앙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4. 당 태종의 경멸… 뛰어난 외교술로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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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릉 아래쪽에 있는 사천왕사 터. 여왕이 죽음을 예견한 일화가 전해진다.

여왕의 이런 다양한 업적과 선정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한 대내외적 어려움과 난관이 적지 않았다. 당 태종 역시 여성인 선덕여왕의 등극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그런 까닭에 재위 11년 9월에 백제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방의 요충지인 대야성을 빼앗긴 신라가 급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지원을 요청했을 때, 당 태종은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을 것”이라며 다분히 경멸적인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명분보다 실리를 중요시한 여왕은 내정간섭이나 다름없는 당 태종의 무례함에 개의치 않고 현실주의적 외교정책을 펴나갔다. 또한 당시는 진흥왕 시절 위축되었던 고구려와 백제가 국력을 회복하고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찾기 위한 침략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시기였다. 이런 국가 위난을 선덕여왕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잘 극복해나갔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여왕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일부 귀족세력의 노골적인 도전까지 일어났다. 신라 최고 직책인 상대등 자리에 있던 비담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한때 궁궐을 포위했을 정도로 기세를 떨쳤던 반란은 김춘추와 김유신 군대의 반격으로 겨우 격퇴할 수 있었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통일신라의 위업을 몇 년 앞두지 않은 변화와 격동의 시기에 국내외적 혹독한 시련과 도전을 맞이하여 자애로운 왕으로, 지혜로운 통치자로, 뛰어난 외교가로 삼국 통일의 여건을 마련하고 신라문화의 최전성기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던 여왕은 마침내 자신의 죽음까지 예견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여왕은 “모월 모일에 내가 죽을 것이니 도리천 가운데에 장사지내라”는 유언을 남긴다. 신하들이 그곳이 어딘지 몰라 정확한 장소를 묻자, “낭산(狼山) 남쪽이다”라는 의미 모를 말을 남겼다고 한다. 결국 즉위 15년째인 646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이후 신하들은 유언대로 낭산 남쪽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 뒤 문무왕이 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다. 불교에서는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말한다. 사천왕천을 상징하는 사천왕사가 지어졌으므로, 그 바로 위인 선덕의 무덤은 도리천이 되는 것이다.

이에 선덕여왕의 신령함과 지혜로움에 신라 왕실과 백성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전한다. 유사 이래로 신화와 전설, 역사를 통틀어 가장 독보적인 여성이라면 역시 선덕여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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