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가을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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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20 08:09  |  수정 2014-11-06 15:26  |  발행일 2014-10-20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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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가장 훌륭한 교사’라고 선언한 루소. “자연을 보라. 그리고 자연이 가르치는 길을 따라가라. 자연은 쉼 없이 아이를 단련시킨다”라고 한 그의 말을 떠올리며 가을 들녘을 걸어간다.

산 넘고 강을 건너온 청량한 바람이 여름날의 폭염과 비바람을 견뎌 낸 벼들을 쓰다듬으면, 고개 숙인 벼들은 찬란한 황금물결로 화답한다. 논두렁 억새들이 가을 햇살과 밀어를 속삭이면, 수리도랑을 따라 빨강, 분홍, 하양으로 곱게 핀 코스모스는 고추잠자리와 정담을 나눈다. 농로에 서 있는 경운기 옆에서는 초로의 부부가 새참 국수를 맛있게 먹고 있다. 들녘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가을 강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흐른다. 강둑에 올라서면 강굽이 아득하고, 짧은 가을해 어느덧 서산에 걸린다. 노을에 젖어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강변 백사장 미루나무들 사이로 새들이 재잘거리며 집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풍요로운 풍경이다.

고개 숙인 벼들은 보면 볼수록 우리의 탄성을 자아낸다. 그 낱낱의 쌀알은 햇볕과 달빛, 천둥과 비바람, 농부의 피와 땀, 그 모든 것의 정수만을 담아 영글었기에 저렇게 알차고 아름다운 것이다. 저들도 오뉴월에는 푸른 잎 칼날처럼 곧추세우고, 고개 빳빳하게 들고 당돌하게 태양과 맞섰을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말하며 겸손과 순종을 강요한다. 오뉴월에 고개 숙인 벼는 가을이 와도 쭉정이밖에 안 된다. 젊은 날은 오뉴월의 벼처럼 도도하고 자신만만해야 한다. 그래야 그 모든 시련과 도전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고, 성장에 필요한 자양분을 강하게 흡수할 수 있다. 아이와 함께 가을 들판을 걸으며 지난여름의 천둥과 번개, 젊은 날의 성장통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초로의 부부는 새참을 어쩌면 그토록 맛있게 드시는가? 성취감과 행복감이 수반될 때, 고된 노동은 밥맛을 돋워준다. 시간만 죽이고 별 성과 없이 밥을 먹게 될 때, 옛 사람들은 밥값 못했기 때문에 입맛이 쓰다고 말했다. 학생이 공부에 몰입한 후, 가슴 뿌듯한 성취감을 느낄 때 밥맛은 꿀맛이다. 종일 책상에 앉아있어도 이룬 것 없다고 생각하면, 밥알이 모래알 같고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는다. 아이와 들녘 끝까지 걸어가며 육체노동의 가치와 의미, 기다림의 미덕에 대해 이야기하고, 밥상머리에서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해, 먼저 땀 흘려 일하고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슴에 새겨보자.

아직도 산업사회 이전 단계에 사는 사람들은 일출, 일몰, 계절의 순환이 만드는 자연의 시간에 따라 산다. 현대 도시인은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은 보지 않고 톱니바퀴와 디지털 기기가 만들어내는 인공적인 시간에 따라 움직인다.

이제 중간고사가 끝났다. 한번쯤 온 가족이 황금 들판으로 나가 해와 달, 별, 쑥부쟁이, 구절초, 코스모스가 만들어내는 자연의 시간을 느껴보자. 논두렁, 밭두렁, 강둑에 앉아 함께 밥을 먹고 담소를 나누면서, 유유히 떠다니는 새털구름을 바라보며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보자. 가을 들녘과 높푸른 하늘은 오염된 영혼을 정화시키고, 신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자연은 찾아주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준다.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 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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