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사는 ‘일본의 양심’ 오카다 다카시 계명문화대 교수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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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24   |  발행일 2014-10-24 제35면   |  수정 2015-01-30
日 운동권 대학생 출신, 대구서 탈핵평화운동 전도사로
20141024
오카다 다카시 계명문화대 교수가 대구 KYC사무실에서 ‘탈핵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인들과 평화운동 하고 싶었다”
日서 교사 퇴임 7년 앞두고 대구行
한국 원폭2세 도우려 특별법 운동
“가해자 일본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죄씻기’ ‘보상’을 먼저 해야 옳아”

한 권의 책은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 오카다 다카시 교수(62·계명문화대 호텔항공외식관광학부)의 일생에 영향을 끼친 것도 한 권의 책이다. 그는 일본 조치(上智)대학 3학년 때 ‘침략-중국에 있어서의 일본전범의 고백’이란 책을 읽고 ‘왜 일본인은 이러한 잔학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이 책은 1958년 일본에서 출간된 책으로, 중일전쟁에 참전한 일본군 사령관, 헌병, 병사 등 침략 가해자의 증언록이었다. 이 책에는 일본군이 저지른 살육이나 강간에 대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록돼 있었다. 증언자들은 러일전쟁 중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에서 중국 푸순으로 보내졌다. 그들은 푸순에서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고서야 스스로 저질렀던 행위를 고백하게 됐다.

“70년대 당시 일본에선 평화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점이 많았어요. 미국의 베트남침략전쟁에 일본도 한국과 같이 가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전 ‘평화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전쟁에서 일본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전쟁의 가해자와 피해자 문제를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오카다 교수는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출신으로 71년 조치대 물리학과에 입학한다. 대학시절 등록금인상 저지시위와 오키나와 주둔 미군기지철수시위에도 참가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비롯해 도쿄의 요코타 기지, 가나가와의 사가미하라 기지, 아쓰기 기지 등은 미국의 전략적 아시아방어기지였습니다. 도로에서 M48미군탱크를 가로막고 연좌시위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덕에 한 달간 미군탱크가 베트남에 못 들어갔지요. 베트남전에서 추락한 미국의 B52폭격기 잔해를 이용해 반지를 만들어 전 세계인들에게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그 수익금으로 베트남 사람을 돕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가나가와현에 있는 통신제고교(방송통신고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교사생활 5년째, 그는 한국의 광주에서 벌어진 5·18민주항쟁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었다. 신군부의 광주시민학살에 분개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80년 신군부로부터 내란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됐을 때 도쿄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항의시위까지 벌였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전쟁과 미국의 베트남침략전쟁은 제국주의와 패권주의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는 통신제고교 교사를 그만두고 야간고등학교, 특수학교 교사로도 재직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을 가르치다 어린이를 가르쳤습니다. 무척 재미있었어요.”

그는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켜 식민지화한 나라에서 서로의 과거를 응시하고 신뢰와 평화의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정년퇴임 7년을 남기고 한국으로 오겠다는 결심을 했다. 일본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부인을 설득한 뒤 2006년 한국으로 건너와 2007년 9월부터 계명문화대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다.

“일본에서의 평화운동에 대해 한계를 느끼고, 그 평화정신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싶었습니다. 일본 사람도 여러 부류가 있다고 생각해요. 일본의 조선침략을 반성하는 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시민들과 평화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오카다 교수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평화운동을 하고 있다. 2008년 교토에서 여러 시민과 함께 ‘한국 강제병합 100년 시민네트워크’를 조직해 일본의 침략에 대해 반성과 화해를 호소하고 공동대표로 선출됐다. 이에 앞서 그는 조치대학에서 크리스티앙 스태파 박사의 강연을 듣고 반성과 화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독일의 바이마르와 나치시대 ‘로다 크레시그’라는 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Action T4’(히틀러의 주치의 칼 브란트가 정신병자·유전병자·장애인을 생존가치가 없는 존재로 보고 약 10만명을 학살함)를 멈추게 한 판결로 유명했습니다. 전후 그는 뉘른베르크재판에서 ‘참된 판사’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자신의 판결이 나치에 대한 확실한 저항이 아니라고 보고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반성했습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은 2차대전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란 생각이 강했는데 그는 예외였습니다. 그는 ASF(죄 씻음의 증명과 행동)와 ARSP(평화를 위한 화해서비스운동·Action Reconciliation Service for Peace)라는 NGO단체를 조직해 젊은이들과 함께 나치독일 피해국인 폴란드, 네덜란드, 이스라엘 등지에서 사죄와 봉사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학살이 있었던 마을에선 돌을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만 계속했지요. 이 단체에는 가해국과 피해국의 젊은이가 섞여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만 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쟁의 가해자 측이 피해자에 대해 과연 ‘화해’를 말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가해자가 ‘화해’를 말하기 전에 먼저 사회의 ‘죄 씻음’이 요구됩니다. 또한 화해에 앞서 반드시 보상이 필요하지요. 보상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보상은 나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카다 교수는 2009년 광주에서 발족한 ‘근로정신대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회원이 된다.

“86년 일본의 다카하시 마토코 교사와 고이데 유타카 선생은 태평양 전쟁 중 나고야·미쓰비시중공업과 도야마·후시코시·누마즈·도쿄아사이도의 3개 군수공장이 조선의 어린 소녀를 속여 강제근로를 시킨 사실을 밝혀내고, 한국 광주에 있는 근로정신대피해자를 찾았습니다. 이들은 나고야 시민과 함께 ‘나고야 소송 지원모임’을 조직해 미쓰비시중공업회사 등을 상대로 법원에 제소했습니다. 2007년 패소 후에도 매주 금요일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시위를 했지요. 결국 지난해 한국의 광주지법에서 승소를 했습니다. 국제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습니다.”

그는 최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피해자돕기 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또 탈핵아시아행동에 가입해 핵이 없는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세계에는 많은 ‘히바쿠샤(피폭자)’가 있습니다. 전 세계의 히바쿠샤와 연대가 필요합니다. 특히 한반도에선 대구에서 가까운 합천을 중심으로 피폭자가 경남·경북지역에 집중돼 있습니다. 한국인 피폭자는 전체 피폭자 70만명 중 7만명이나 됩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돌아가셨고, 한국에 돌아온 분은 그 후유증으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2005년 6월, 원폭 2세로 35세에 요절한 김영률씨는 선천성 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란 유전병에 시달리면서 ‘나의 병은 어머니가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것이 원인’이라고 절규했습니다. 그는 대구 KYC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질병으로 고생하는 2세 환우를 위해 ‘한국원폭 2세환우회’를 조직했습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조사에 따르면 ‘피폭 2세나 1세는 일반인에 비해 질병 발병률이 높으며 다양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음’이 확인됐습니다. 2005년 김씨가 사망하기 전 ‘원폭피해자 및 그 자녀를 위한 특별 법안’이 국회에 제출됐으나 제대로 심의조차 된 적이 없습니다.”

오카다 교수는 지난 19일 바보주막 개점 1주년을 맞아 바보주막에서 열린 김광진 의원 초청 특강에서 위 사실을 언급하며 특별 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는 거의 매일 대구 KYC사무실에 들러 한국의 젊은이와 함께 국적을 뛰어넘는 시민단체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일본의 양심’이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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