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4]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12·끝> 송라면 조사리와 원각조사

  •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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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28   |  발행일 2014-10-28 제11면   |  수정 2021-06-15 16:51
아들 찾아 下界로… 바위가 된 용왕 부부
20141028
포항시 북구 송라면 조사리에 있는 용암(龍巖). 암용 바위는 도로를 건설하면서 파손되었고, 현재는 수용 바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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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리 북쪽 구릉 솔숲에 위치한 원각조사비. 원각조사비는 원래 송라면 하송리 오역촌의 도성암에 있었지만 임진왜란때 분실된 후 우여곡절 끝에 현재의 위치로 오게 됐다.



#1. 사람의 몸을 빌려 탄생한 용왕의 아들

동해의 월포 해수욕장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5리쯤 가다보면 천년 전의 대왕고래뼈를 발굴하여 유명해진 방어리가 나온다. 거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한적하고 평화로운 어촌마을이 나타난다. 이곳의 행정구역상 지명은 포항시 북구 송라면 조사리다. 마을 이름이 특이하게도 불교적 용어인 조사리(祖師里)가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기이하고 신비로운 이야기 하나가 전해오고 있다.

고려 말기인 우왕 시절에 이 마을에는 김백광(金白光)과 정덕(淨德)이란 부부가 살고 있었다. 고을 아전이던 남편의 성품은 순박하고 부지런했으며, 부인 역시 현숙하고 인정이 많았다. 하지만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태기가 없었다. 집안의 대가 끊어질까 염려한 부인은 날마다 먼동이 틀 무렵이면 동해가 바라보이는 바위에 올라 자식을 얻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빌었다.

부인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까. 어느 날 밤, 부인은 해와 달이 가슴에 안기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게 되었다. 믿기 어렵지만 부인이 임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천신(天神)의 도움 덕분이라고 한다.

설화에 따르면 그 당시 천신은 고려 말기의 혼탁해진 정치로 말미암아 신음하는 민초의 고통과 슬픔을 달래줄 인물을 하계로 보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 동해바다를 향해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는 정덕부인을 본 천신은 부인의 몸을 통해 이를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하계로 보낼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때마침 동해용왕(東海龍王)의 막내자식이 천신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금지옥엽이나 다름없는 막내를 용왕이 순순히 내어줄 리가 없었다. 기회를 보던 천신은 용왕부부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용왕의 막내를 정덕부인의 몸을 빌려 세상에 나가도록 조치했다.

해신(海神)들의 모임에서 돌아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용왕부부는 부랴부랴 막내를 찾아 마을 앞바다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나 용왕의 몸인지라 바다를 벗어날 순 없었다. 애가 탄 용왕부부는 자식이 있는 마을까지 접근하기 위해 해변에 늘어선 바위에다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어려움 속에 마침내 바위굴을 통해 집까지 당도했지만 그때 부인은 이미 천신 시녀의 도움을 받아 바다와 떨어진 신구산(神龜山) 기슭으로 몸을 피한 다음이었다.

크게 낙심한 용왕부부가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바위굴을 나왔을 때는 어느덧 동녘하늘이 환하게 밝아온 연후였다. 해뜨기 전에 반드시 용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용왕들의 오랜 계율을 지키지 못하고, 자식마저 찾지 못한 걸 애통해하던 용왕부부는 끝내 마을 앞의 바위로 굳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2. 마흘, 해탈의 경지에 이르다

천신의 점지를 받아 태어난 아기였기 때문일까. 기록에 의하면 아기가 태어난 날은 우왕 5년(1379) 음력 2월 보름으로, 그날부터 열흘 가까이 비가 내려서 메마른 대지를 충분히 적셨다고 전해진다. 당시는 오랜 겨울가뭄으로 대지가 말라서 봄 농사를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마실 우물까지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그런 까닭에 주민들은 아기의 탄생이 단비를 몰고 왔다고 믿었다.

‘마흘(摩訖)’이라는 이름을 얻은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눈빛이 선지자처럼 맑고 깊었으며, 다른 젖먹이들처럼 보채거나 울지 않아 부모를 편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또 뛰어나게 총명하여 세 살 무렵에 천자문을 외었고, 열한 살 때는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열두 살 되던 해에 병으로 부친을 여의게 되었다. 그 충격 때문인지 마흘은 돌연 말문을 닫았고, 깊은 사색에 잠겨 홀로 해변을 배회하거나 혹은 불경공부에 몰두하며 나날을 보냈다.

달마대사가 면벽하여 묵언수행하듯 말을 잊고 지낸 지 3년이 되던 해 어느 날이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듯 바닷가에 나가 있던 마흘은 동해에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보자 마치 천신의 계시라도 받은 양 ‘크도다! 태양의 정기여!’하며 크게 한 소리 외치곤 해탈의 미소를 환하게 지었다고 한다.

그 뒤로 마흘은 높은 식견과 뛰어난 학문을 지녔음에도 벼슬길에 나갈 마음을 품지 않았다. 태조 5년에 재야에 묻힌 인재를 찾기 위한 과거가 시행되었고, 주변사람들의 권유에도 그는 응시하지 않았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그는 인근의 평범한 촌부인 유씨(劉氏)와 결혼한 후 스스로 논밭을 갈고 김을 매며 마을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대중 속에 있다는 평소의 생각을 몸소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마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집에서 가까운 보경사(寶鏡寺)와 도성암(道成菴)을 다니면서 스님들과 불법을 논하고 불경을 읽으면서 참다운 삶의 진리를 찾는 일에 몰두했다. 스님들도 그의 해박한 지식과 불경에 대한 심오한 해석에 혀를 내둘렀다. 어떤 스님은 마흘을 두고 천년에 한 번 보기 힘든 돈각(頓覺: 소승, 대승을 차례를 밟아 학습 수행하지 않고 변칙적으로 한꺼번에 깨닫는 일)의 귀재라고 말했다. 어떤 사찰에서는 마흘을 주지로 모셔가기 위해 몇 번씩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마흘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을 위로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책무이자 본분이라며 살던 거처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삶의 진리와 불법을 강론하는 일뿐 아니라 농사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또한 홍수와 가뭄을 예언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이에 대비하게 했다. 사람들은 이런 마흘을 높이 사서 이인(異人)이라거나 혹은 성인(聖人)으로 부르기도 했다.



#3. 용왕 부부의 恨이 서린 곳

이러한 마흘의 민중을 위한 자애심과 깊은 지혜, 뛰어난 설법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고, 인근 절의 스님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먼 길의 수고로움을 마다않고 찾아왔다. 또한 마흘의 학식과 불법을 추앙하여 제자가 되길 자청하여 찾아오는 젊은이도 적지 않았다. 그 뒤로 마흘은 조사로, 마을이름은 조사리로 불리게 되었다. 조사란 불교에서 ‘한 종파를 세우고 종지(宗旨)를 열어 주장한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이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을 위하여 애쓰던 원각조사는 81세가 되던 1459년 유월 보름날에 등신불이 되어 열반에 들었다. 열반에 들기 전에도 원각조사는 제자들에게 송라(松羅)에 역(驛)이 생긴다는 예언과 함께 130여년 뒤에 왜적의 침략으로 한반도가 피의 전란에 휘말릴 것을 예고할 만큼 민족의 장래에 대한 걱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원각조사가 열반에 든 후 제자들이 모여 불교의식에 따른 화장을 한 뒤 사리를 봉안하고 비(碑)를 세웠다. 처음에 원각조사의 비는 송라면 하송리 오역촌의 도성암에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암자가 불타버리고 그로 인해 원각조사의 비석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 뒤 수백 년이 지난 뒤인 일제강점기에 홍수로 인해 도성암 터가 유실되면서 비석의 거북 받침돌이 드러났고, 인근을 파헤쳐 비신을 찾아낼 수 있었다. 광복이 된 후에 조사리 주민들이 힘을 모아 비석을 조사리의 원각조사 출생지에 세웠다. 그러나 교회가 들어서면서 다시 비석을 원각조사를 해신신앙의 신으로 모신 서낭당 옆 소나무 숲으로 옮겨 세워야 했다.

현재 마을을 지키는 서낭당에는 ‘경신위천(敬神爲天)’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이는 용왕신이나 해신을 공경하고 하늘을 떠받들라는 의미로, 동해용왕의 자식에서 천신의 점지로 인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원각조사의 출생의 비밀이 깃든 현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막내자식을 찾기 위해 바위에 굴을 뚫다가 해가 뜰 때까지 용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굳어버린 용왕부부 바위는, 도로를 건설하면서 암용의 자태는 사라지고 수용의 자태만 바닷가에 애처롭게 남아 있다고 한다. 자식을 잃은 용의 한이 서린 이 바위에 정성껏 기도하면 득남을 한다고 해서 멀리서 적지 않은 사람이 찾아온다고 한다.

아울러 용이 자식을 찾기 위해 뚫어놓은 속칭 ‘구들고래’ 혹은 ‘용치바위’에서는 요즘도 여전히 듣는 사람에 따라서 용왕이 자식을 찾아 ‘내 새끼야’하며 울부짖는 소리나 가야금이나 뿔고동 소리가 들려온다니 정녕 신기하고 경이로운 관광명소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글=박희섭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공동기획:포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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