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개청 100년, 1914~2014 칠곡 .16] 매원마을의 비극과 희망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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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31   |  발행일 2014-10-31 제11면   |  수정 2014-11-21
매화를 닮은 마을, 옛모습 그대로 피어나라

‘왜관개청 100년-1914~2014 칠곡’은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가 왜관으로 옮겨 개청한 1914년부터 100년 동안, 칠곡의 주요 역사와 인물을 다룬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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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꽃 모양처럼 생긴 매원마을의 전경. 경주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영남 3대 반촌’ 중 한 곳으로 장원급제한 사람이 많아 ‘장원방’이라 불리기도 했다.

◇ 스토리 브리핑

칠곡 매원마을은 ‘매화꽃 모양처럼 생긴 마을’이라 해서 매원(梅院)마을이다. 광주이씨(廣州李氏) 집성촌으로 유림 사이에서는 경주 양동마을과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영남 3대 반촌’으로 불렸다. 조선 선조 때 낙향한 석담 이윤우(石潭 李潤雨)가 입향조로, 이조판서·대사헌 등을 배출했으며 장원급제한 사람이 많아 ‘장원방’이라 불리기도 했다. 마을의 최대 번성기였던 1905년 무렵에는 가옥이 400여 채에 이르렀고, 이수목과 이두석 등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애국지사도 6명에 달한다. 하지만 6·25전쟁 때 북한군이 이 마을 박곡종택에 지휘부를 설치함에 따라 미군이 집중 폭격을 했고, 이에 고택 300여 채가 소실되면서 마을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현재 주민들은 ‘매원전통마을보존회’를 만들어 마을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데 힘쓰고 있다.


#1. 매화꽃 양반촌

땅도 스스로 꽃이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꽃을 알아본다.

풍수지리의 물형(物形) 가운데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라는 것이 있다. 마치 매화 꽃잎이 떨어져 흩어진 것처럼 주변 산들이 흩어진 형세를 말하는데, 꽃잎이 5장이니만큼 주변에 5개의 산이 우뚝 솟아 있어야만 그 범위에 든다. 매원마을의 경우에는 죽곡산을 비롯한 5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여 마을의 심장부에 서서 마을을 둘러다보면 하늘과 땅이 닿은 자리가 마치 매화꽃 같고, 거기에 노을까지 얹으면 홍매화가 부럽지 않다.

허면 매(梅)는 그렇다 치고 어찌하여 매원(梅院)이 되었을까. 조선시대 매원(梅院)이라는 원(院)이 있었다고 해서 매원이다. 원은 일종의 역 같은 곳으로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매원마을에는 맨 처음 야로송씨(冶爐宋氏)가 살았고 그 다음은 벽진이씨(碧珍李氏)가 살았다. 이후 1595년(선조 27) 무렵 광주이씨(廣州李氏)가 입촌하면서부터 동성(同姓)마을을 이루기 시작했는데 마을의 맨 위쪽을 상매, 중간을 중매, 아래 부분을 서매라 일렀다. 본디는 상중하(上中下)로 구분하였으나 ‘하’에 낮춤의 표현이 있다 하여 상중서로 부른 것이다.

입향조였던 석담 이윤우(石潭 李潤雨, 1569~1634)는 후학을 위해 서매에 감호당(鑑湖堂)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도록 했다. 이후 셋째 아들인 이도장이 계승하여 수많은 문인을 배출해냈다. 이에 매원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 경주의 양동마을과 더불어 영남의 3대 반촌(班村)으로 일컬어졌으며, 장원급제한 사람이 많아 ‘장원방’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류씨(豊山柳氏)와 퇴계 선생 집안인 진성이씨(眞城李氏), 경주 양동마을의 여강이씨(驪江李氏) 가문과의 혼인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매원마을의 최대 번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05년 무렵에는 가옥이 400여 채에 이르렀고 이수목(1890~1948), 이두석(1902~1938) 등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애국지사도 6명에 달한다.


#2. 1950년 6·25전쟁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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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인민군이 지휘부를 두었던 박곡종택. 적의 지휘부를 향해 미군이 집중폭격을 가했고, 이로 인해 매원마을 400여채의 가옥 중 300여채가 소실되었다.

땅도 스스로 꽃이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꽃을 슬퍼한다.

전쟁은 붉었다. 온 산하가, 사람들의 가슴이 그렇게 붉게 물들었다. 피가 흐른 땅은 차라리 꽃이었다. 매원마을도 피해 가지 못한 붉은 전쟁이었다.

마을을 건너 들려오는 소식은 하루하루 불길해져 갔다. 한강 다리가 무너졌다느니, 떼로 몰살을 당했다느니, 하나같이 끔찍한 이야기뿐이었다. 그 소식들을 피해 마을의 주민들은 집을 떠났다. 그 바람에 마을은 텅 비다시피 했으니 북한군 제3사단 지휘부가 들어선 것은 그래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은 낙동강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왜관에 진격한 북한군은 왜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고, 경부철도와 도로가 관통하던 교통요지이자 다부동으로 연결되는 통로였던 매원마을을 중심으로 주둔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박곡종택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이이종(李以鐘)이 차남을 분가시키기 위해 건립한 주택인 지경당(止敬堂)을 아예 북한군의 야전병원으로 운영했다. 매원마을이 처절했던 낙동강전투의 한복판으로 빨려든 것이다. 그런 북한군을 미군이 그냥 곱게 보아줄 리 없었다. 피란을 가 민간인이 거의 없던 마을에 집중 폭격을 했고 이에 고택 300여 채가 소실되면서 마을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400년 역사의 매원마을이 전쟁을 만나면서 재앙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포탄은 가려 떨어졌다.

“이상하게 사당하고 재실은 거의 다 남았어요. 귀신이 있나봐. 몇 개만 탔어.”

실제로 전통 가옥 중에서 민가(民家)는 거의 소실되었으나, 재실과 사당은 대부분 화를 면했다. 현재 마을에 남아있는 재실로는 광주이씨 재실인 관수재(觀水齋)와 석담 이윤우를 추모하는 귀후재(歸厚齋), 아산 이상철(雅山 李相喆)을 추모하는 아산재(雅山齋), 그리고 덕여 이동유(德汝 李東裕)를 추모하는 용산재(龍山齋)가 있다. 또한 매원마을의 고택 중에서 건립 연대가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잘 갖추어진 주거 건축물로 해은고택(海隱古宅)이 있는데 1788년(정조12) 이동유가 건립했고, 사랑채는 1816년(순조16)에 건립,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집안의 자손이 계속해서 살고 있다.


#3. 비극은 희망으로, 체험형 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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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은고택은 매원마을의 고택 중에서 건립 연대가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잘 갖추어진 주거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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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호당은 조선시대 경성판관과 담양부사를 지낸 석담 이윤우가 매원마을의 자연 풍광에 매료돼 만년에 강학하며 거처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감호정사라고도 한다.

땅도 스스로 꽃이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꽃에 설렌다.

지난 봄, 매원마을에 퍽 근사한 한옥 한 채가 준공됐다. 주민은 주민대로 마을 앞 논에 연을 심어 소득을 창출하고, 마을을 찾는 관광객은 연밥·연차 등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공간이 들어선 것이다. 바로 선비문화가 서린 매원마을을 체험형 전통한옥마을로 정비하기로 한 데 대한 하나의 과정이다. 체험형 전통한옥마을. 이를 위해 칠곡군은 앞으로 10년 동안 사업비 185억원을 들여 고택을 복원하고, 전선을 지중화함과 아울러 아스팔트를 흙길로 바꾸는 사업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복원의 기준은 6·25전쟁 이전이다. 나아가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개별 고택을 하나씩 문화재로 평가받은 뒤 장차 마을 전체를 ‘민속마을(중요민속자료)’로 지정 받는 것도 추진 중이다. 이미 학술조사도 마쳤으며, 해은고택과 지경당, 감호당 3곳은 최근 도 지정문화재가 됐다.

또한 올해부터 문화재청이 지원하는 세시풍속체험잔치 마을로도 선정되어, 지난 5월 단오 앵두잔치를 시작으로 6월 유두잔치와 7월 백중 풋구먹기와 깨이말타기 등 12월까지 총 일곱 가지의 세시풍속을 매월 세시일이 든 주말에 릴레이식으로 재현할 계획이다. 특히 세시풍속은 세시의례와 세시음식, 세시놀이로 구성해 마을주민과 체험관광객이 한데 어울려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잔치분위기로 전개하고 있다. 필자가 마을을 찾았던 지난 25일 토요일 오후에는 ‘떡 축제’가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 칠곡군


대원군이 탐낸 벼루탓에 몰락한 집안

풍각댁 이동형(李東炯)은 매원 마을에서 삼천 석을 넘게 한 부자였다. 그리고 벼루 사건은 이동형의 현손인 이상림의 이야기다.

이상림의 집에는 수대를 내려온 보물로 벼루가 있었다. 이 벼루는 물 없이도 편지 한 장 정도는 거뜬히 쓸 수 있는 특이한 벼루였다. 한데 이 소문을 들은 대원군이 이상림의 매제인 풍양조씨가 승지로 있을 때 수차 그 벼루를 가져와 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하지만 이상림은 번번이 거절하였고, 이에 참다못한 대원군이 1886년(고종 23) 9월 초순 직접 과객이 되어 이상림의 집을 찾았다. 그러고는 마루에 앉자마자 민비의 욕을 해댔다. 손님이 대원군인 줄 모르던 이상림은 얼떨결에 말을 섞었고, 이 일이 결국 화근이 되었다. 그 일 후 보름쯤 지났을 무렵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이상림을 연행해 갔다.

한 가지 기이한 것은 1886년 10월 중순경 사랑채 기와지붕 위에 큰 구렁이가 나타나더니 그 자리에서 그만 죽어버린 일인데, 바로 그 날 이상림의 시신을 찾아가라는 전갈이 내려왔다. 하여 식솔들이 한양 마포 지하 형장에 가보니 이미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시신 수백 구가 늘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 많은 시신의 주머니를 일일이 뒤져서 그가 평소 사용했던 라이터를 보고 시신을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장례식을 하던 날이었다. 상여가 출발을 할 무렵 이상림의 매제인 조 승지가 갑자기 식중독 증상으로 데굴데굴 뒹구는 것이었다. 하여 집으로 돌아가 쉬게 하였는데, 조승지가 이 틈을 타 벼루를 숨겨두었다가 훗날 대원군에게 상납함으로써 높은 벼슬을 얻었다. 반면 이상림의 집은 웅장한 안채와 사랑채 모두 뜯겨나가는 수모를 당했으며 가세는 풍비박산해 몰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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