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劇場 .11] 오르간 연주자 나운도의 ‘밤무대 외길 인생’

  • 이춘호
  • |
  • 입력 2014-11-14   |  발행일 2014-11-14 제33면   |  수정 2014-11-14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나훈아? 나운도! 40년만에 ‘해떴다’

20141114

내겐 가족이 낯설다.

음악에 오래 빠져있다 보면 누구나 그렇게 된다. 언젠가부터 대한민국에선 음악이 ‘고생’의 대명사가 돼버렸다. 그걸 아는 이는 일찌감치 이 바닥을 도망친다.

누가 가족 얘기를 하면 난 금방 눈시울이 붉어져 온다. 그럴 때마다 핑계처럼 오르간 앞에 앉아 못난 나를 지운다. 음악은 절대 식솔을 먹여살리지 못한다. 돈을 다 벌어놓은 뒤 취미로 음악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음악은 한계가 있다. 평생 음악만 붙들고 온 사람의 음악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 바닥 사람만이 그걸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누가 그 차이를 인정해줄까. 유명하지 않으면, 이 바닥 말로 ‘뜨지 못하면’ 모든 게 허사다. 실력이 말해주는 게 아니고 ‘유명세’가 모든 걸 말해준다. 그러니 우리 모두 유명해지기 위해 ‘환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밤무대는 나의 고향이자 내 인생 최대의 위안이다.

숱한 스타가 처음부터 큰 무대를 만난 게 아니다. 모두 콧구멍만한 그 공간에서 ‘눈물밥’을 먹고 더 큰 세계로 비상할 수 있었다. 나훈아, 조용필, 이미자, 패티김…. 거장들의 첫 단추도 실은 밤무대였다.

워낙 오래 어둠과 벗하다 보니 지금은 친구까지 낯설다. 그냥 부적 같은 오르간만 품고 40년간 밤무대를 누볐다. 그래서 내 얼굴에는 짙은 고독이 안개처럼 스멀거린다. ‘선천성 고독증후군’이다.

당신은 밤무대가 어떤 곳인지 피상적으로만 알 것이다.

밤무대에선 손님이 ‘갑’이고 연주자는 ‘을’의 신세다. 물론 70~80년대 대구가 카바레·회관의 1번지였을 때 우리 같은 밤무대 연주자도 여우비처럼 반짝 ‘갑’으로 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지금 밤무대에는 공연과 연주가 사라졌다. 오직 손님의 취흥(醉興)만 존중받을 뿐이다.

내 이름은 나운도. 본명은 손재석. 올해 예순을 맞았다. 다른 길도 몰랐다. 오직 밤무대였다.

내 이름에서 어떤 이는 나훈아, 어떤 이는 설운도를 읽어낸다.

최근 내 인생 최고의 날이 있었다.

Mnet에서 시작한 국내 최초 ‘트로트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트로트 X에 ‘노래하는 밤무대 오르간 황제’로 출연해 세미파이널까지 진출했다. 줄곧 땅 속에 있다가 비로소 땅 밖으로 나와 울기 시작한 ‘매미’ 같았다. 그 누구도 나훈아는 알아도 나운도는 몰랐다. 역시 대중매체의 위력은 가공할 만했다. 인기 프로그램에 출연하자마자 내 몸값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나운도를 밤무대 연주자로 대하지 않고 나름 공인으로 대해주는 게 여간 감격스럽지 않다. 그 프로그램에서 대상을 차지한 나미애도 30년 무명의 설움을 딛고 일어섰다.



올해 TV 트로트 오디션
세미파이널까지 올라가
수십년의 무명설움 훌훌
밤무대는 내 고향이자
내 인생 최고의 위안처다


 

20141114
밤무대 무도용 오르간 연주의 신지평을 연 나운도가 ‘울먹 스타일’로 열창 중이다.



◆ 나도 몰래 밤무대로 흘러들었다

영천 금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무원이고 집에서는 사과 과수원을 꾸려갔다. 내 음악의 첫 출발선은 고향 친구의 하모니카였다. 그 소리가 너무 좋았다. 사과를 몇 개 주고 하모니카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이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없었다. 그냥 반복 연습이 최고의 스승이었다. 유행가를 임의로 불러보면서 박자, 멜로디, 리듬 등을 익혔다. 숨어있던 음악적 열정과 호기심이 강력하게 발동된다.

중학교를 마치고 대구시 북구 칠성동으로 가족 모두 이사를 갔다. 학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일단 기타 학원에 다니다가 학원에서 소개해준 중구 향촌동에 있던 비어홀의 일종인 향로바에 나간다. 당시 5인조 캄보밴드에 속해 늦가을 수숫대처럼 서서 기타를 쳤다. 음악 때문에 고교도 중퇴했다.

조금씩 밤무대의 냄새에 익숙해진다.

동촌유원지 안에 있는 한 회관형 클럽에서 일을 시작한다. 아직 가라오케도, 노래방도 심지어 CD조차 없던 시절이라서 제대로 된 음악을 들으려면 밤무대로 가야했다. ‘연주자 황금시기’였다. 일당이 700원이었다. 그러나 연주자로서 무슨 악기에 목숨을 걸지 확신이 없었다. 우연히 영주로 공연하러 갔다가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연주를 할 수 있었다. 조용필 악단에 있던 홍모씨였다. 그는 당시 실력파 오르가니스트. 전자오르간은 아직 국내시장에선 낯설었다. 그때는 신시사이저가 아니고 건반 음만 겨우 표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전자 오르간이었다. 야마하와 파피샤 정도가 있었고 겨우 국산 오르간 ‘서니’가 출시되고 있었는데 홍씨가 그걸 다루고 있었다. 그의 놀라운 기량을 보고 나는 탄복했다. 졸지에 그가 내 롤 모델이 된다. 이후 그를 따라 서울로 갔다.

숙소는 경기도 성남의 모 여관이었다. 그 무렵 국내 밤무대 문화도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었다. 밴드문화가 추락하고 점차 그 틈바구니를 전자오르간과 가라오케가 파고들고 있었다. 흐름을 직시하지 못한 연주자는 밥을 굶을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전 국민 애도기간 때문에 내가 있던 업소도 잠시 휴업에 들어간다. 그래서 대구로 내려온다.

내 인생에 있어 비교적 행복했던 추억의 동촌 카바레 시절이 개막된다. 지금 위세를 떨치는 디지털 뮤직은 아날로그 뮤직에 감히 도전장을 낼 수 없었던 순수 공연자의 시절이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