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머리의 작은 기적] 남의 처지를 생각하는 마음(역지사지)도 자랍니다

  • 최은지
  • |
  • 입력 2014-11-24 08:07  |  수정 2014-11-24 09:41  |  발행일 2014-11-24 제18면
버스에서 자리 양보하기…작은 것부터 실천해 보세요
20141124
일러스트=최은지기자

꽤 오래전 일이다. 초등학교 3학년 교실이었다. 남자아이들이 청소를 잘 못해서 단체로 칠판 앞에 나와서 벌을 서는 중이다. 벌은 ‘앞으로 나란히’이다. 운동장에서 줄을 설 때 앞으로 나란히 하듯이 두 손을 어깨 높이로 들고 오래 서 있는 벌이다. 쉬운 것 같지만 결코 쉬운 벌이 아니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벌을 받던 남자아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 하기 시작했다. 몸을 비비꼬기도 하고 고통을 참느라 끙끙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나왔다. 그때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순이가 오른 손을 번쩍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기훈이가 금방 쓰러질 것 같아요. 제가 대신 손을 들고 있으면 안 되나요?”

영순이는 기훈이 짝꿍이었다. 짝꿍이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을 보다 못해 대신 벌을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깜짝 놀랐다. 벌을 대신 받겠다고 나서는 아이는 생전 처음 봤기 때문이다. 듣도 보도 못했던 일이다. 잠시 머리가 띵했다. 기특하고 갸륵하다. 그렇지만 얼른 허락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엄중하게 벌을 받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팔이 굉장히 아플 텐데.”

이렇게 뜨뜻미지근하게 대답을 했다. 단박에 내 마음을 눈치로 알아차린 영순이는 주춤주춤 앞으로 나오더니 짝꿍 기훈이를 들여보내고 자기가 ‘앞으로 나란히’를 하는 게 아닌가? 곧이어 재미있겠다 싶었던지 다른 여자아이들도 앞으로 나오더니 자기 짝꿍을 보내고 대신 벌을 섰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두 팔을 빙빙 돌리며 자리로 들어간 남자아이들이 조금 있다가 다시 앞으로 나와서 여자아이들을 들여보내고 자기들이 원래대로 벌을 섰다. 잠시 뒤에는 다시 바뀌고. 벌이 아니라 완전히 장난판이 되고 말았다.

친구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런 따뜻한 마음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를 생각했던 겁니다. 벌 받는 남자아이들 처지가 되었던 것이지요.

이런 것을 두고 어려운 말로 ‘역지사지’라고 합니다. 처지 바꿔본다는 말이지요. 이는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이해를 영어로 언더스탠드(understand)라고 합니다. 언더(unde=아래))+스탠드(stand=기준 즉 상대편). 그러니까 상대편보다 낮게 내려가서 본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상대편의 처지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은 나이를 많이 먹거나 공부를 많이 해야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신비하고 놀라운 마음입니다. 우리가 슬픈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까워하는 것 모두가 이 역지사지하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이런 역지사지가 우리 주위에서 늘 일어나지 않을까요? 당연해야 할 대신 받는 벌이 놀라운 일이 되는 걸까요? 그건 바로 생각과 행동의 차이입니다. 우리 마음 바탕에는 역지사지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역지사지의 실천은 갑작스럽게 되는 게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길러진 작은 실천에서 자라나는 겁니다. 우리 몸이 성장하듯이 역지사지하는 마음과 실천도 성장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바탕에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는 이 역지사지를 실천으로 옮기려면 연습이 필요합니다. 작은 용기도 필요합니다. 옆 짝이 준비물이 없어 곤란해 할 때는 얼른 빌려주세요. 친구 앞에서 남이야 먹고 싶어 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며 혼자서 맛있는 간식을 먹지 마십시오. 식탁에서 맛난 것은 식구들에게 양보해 보세요. 버스나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세요. 주춤거리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말입니다. 역지사지를 실천하는 일은 크든 작든 아름다움이지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모여서 새싹이 되어 자랍니다. 이런 것이 몸에 배어 습관이 됩니다.

사람이 짐승과 구별되는 것은 이 역지사지하는 마음이랍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역시사지 마음을 실천으로 옮긴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우리 가슴에는 누구나 ‘역지사지’라는 새싹이 있습니다. 새싹은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 쑥쑥 잘 자라게 되어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우람하게 서서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게 하는 아름드리나무도 처음에는 작은 새싹이었습니다.

윤태규<동화작가, 전 동평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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