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 그곳 .6] 봉화 승부역(하)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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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1-25   |  발행일 2014-11-25 제13면   |  수정 2014-11-25
누군가의 서러운 사랑도, 고독한 한때도…세평 하늘 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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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부터 중부내륙순환열차(O-train)와 백두대간협곡열차(V-train)가 승부역에 서면서, 산골오지 간이역은 관광객으로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열차가 아닌 계곡과 산길을 따라 승부역을 찾는 이들도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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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역 승강장의 작은 대합실(맞이방). 왼쪽에 작게 보이는 나무가 두 남녀의 애틋한 사연을 담고 있는 단풍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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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역 건너편 산에 우뚝 서 있는 용관바위는 ‘용의 갓’이라고 한다. 장군과 용의 ‘소원 전설’이 전해져오는데 지금도 간절히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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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과 궤도 재료를 운반하던 보선 작업용 핸드카. 지금은 운행하지 않고 있고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영동선 승부역에서만 볼 수 있다.

 

#1 이루어지지 못한 철길위의 사랑
그리고 단풍나무

“그게…. 1970년대 이야기지요. 그때는 강릉에서 영주로 가는 기차와 영주에서 강릉으로 가는 기차가 여기서 교행을 했어요. 열차가 비껴 갈라꼬 딱 5분 섰지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가만 보니 매주 일요일만 되면 강릉행 열차에서 처녀가 내리고 영주행 열차에서 청년이 내리더랍니다.”



“처녀는 긴 생머리를 했고 청년은 키가 크고 눈매가 서글서글했다지요. 둘이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손을 잡고 걷기도 하다가 열차가 출발하면 서로 열차를 바꿔 타고 갔어요. 처녀는 영주행 열차를 타고 청년은 강릉행 열차를 타고…. 둘이서 그 짧은 5분 동안 데이트를 한 거지요. 매주 보니까 역무원들한테도 예삿일이 됐죠. 처녀는 풍기의 인견공장서 일했다고 합디다. 청년은 태백서 일하는 광부였고. 원체 가난하고 시간도 없으니, 그래 데이트를 한 게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청년이 보이지 않더랍니다. 일요일이 되면 처녀 혼자 승강장을 걷거나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가더랍니다. 1년이 넘도록 그러기에 한 역무원이 가서 물었다 카데요. 청년은 갱도가 무너져 죽었다고 합디다. 눈물이 글썽글썽 해가꼬. 그라고 얼마 안 있어서 처녀도 더 이상 보이지 않더랍니다. 소문에 처녀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해요. 이게 역무원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깁니다.”



“저기 저 역사 앞에 단풍나무 있지요, 저기가 처녀 총각이 만나던 자립니다. 옛날에 한 역무원이 그 두사람을 위해서 저 나무를 심었지요. 사연이 하도 가엾고 애달파서….”



#2 밤에 환자 생기면
무작정 역으로 뛰었던 승부리 사람들




승부역 앞 낙동강에는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하나는 콘크리트로 된 오래된 승부 잠수교, 또 하나는 2003년에 놓인 빨간색 승부 현수교다. 승부 마을은 이 다리를 건너 급한 산자락을 돌아 1㎞쯤 올라가야 비로소 나타난다. 비탈진 밭 사이로 집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다. 마을 사람들은 감자와 옥수수, 고사리, 고추, 당귀, 콩, 팥과 고랭지 배추 등을 재배한다. 이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70년대 말, 그 이전까지는 호롱불에 의지해 살았다.

“열여덟에 산 너머 마을에서 시집왔는데 화전민이 많았어. 쌀이 없어 감자와 옥수수를 쪄 먹었지. 고생이야 뭐 다 말할 수가 없지.”

쌀은 영주의 곡물상이 주로 공급했다. 열차에 쌀가마니를 싣고 오면 주민들은 지게에 콩과 팥 등을 지고 가 역에서 자루째 바꿨다. 물이 불어나 승부교가 물에 잠기면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주민들은 비룡산 자락인 다락재를 넘어 소천면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10㎞ 넘는 산길을 3시간 지게를 지고 걸어야 했다.



“병원은 갈 엄두도 못 냈어.”

밤에 위중한 환자가 생기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환자를 둘러업고 승부역으로 달려가 역무원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어. 역무원이 상부에 전화를 걸어 허락을 받으면 화물열차를 겨우 얻어 탈 수 있었지. 석탄 차량의 기관실 한쪽에 누워 영주나 철암의 병원에 도착하면 환자 얼굴이 석탄가루로 새카맸어.”

일부 주민은 한때 양귀비를 재배해 진통제로 쓰기도 했다고 한다.



#3 철길위의 또 다른 사연
아버지와 기관사 아들



철길 위에서 죽은 아버지와 기관사가 된 아들의 애틋한 사연도 역은 품고 있다.

“내가 2년을 울었소. 이 철길서 남편 잃고 참말로 막막해서. 막내가 젖도 떼지 않았을 때였지.”

젊디젊었던 여인은 이 마을에서 홀로 5남매를 키워냈다. 태어난 지 100일도 되지 않았던 막내아들은 어른이 돼서 어엿한 기관사가 되었다. 아버지를 빼앗아간 철길을 아들은 달리고 또 달렸다.

“꿈은 기관사가 아니었어요. 어머니는 기관사가 되기를 바라셨죠. 한때는 아버지가 사고 난 지점을 지나다녔어요.”


승부리 사람들은 오직 기차만이 길이었고 호롱불을 켜고 살던 70년대까지가 승부리의 전성기였다고 말한다.

“집집마다 자녀가 서넛은 됐고 역무원과 철로 보수원까지 합해 100여 가구가 살았지. 분교 학생은 100명도 넘었어.”

주민들은 하나둘 도시로 떠났고 광회국민학교 승부분교장은 93년 결국 문을 닫았다.


80년대 중반, 승부리와 석포를 잇는 산길이 생겼다. 시멘트로 포장된 건 90년대 말이다. 아직 비포장된 구간도 많다. 주민들은 길이 없었을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젓는다.

“험한 길이지만 이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4 승부역의 오늘
중부내륙 관광열차 서면서 시끌벅적



석포로 통학하던 학생들은 훌쩍 자라 떠났다. 지나는 열차도 대부분 화물차였고 정차 객차는 단 2회 30초간 머물렀다. 춘양장을 오가는 승부리 주민이 가끔 있을 뿐, 고정 승객 하나 없던 승부역은 2001년 결국 열차 신호만 취급하는 신호장으로 격하됐다.

승부역이 다시 보통역의 지위를 되찾은 것은 2004년이다. 환상적인 경치를 선사하는 환상선(環狀線) 눈꽃열차는 해를 거듭하며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초기에 서울 청량리와 강원도 추전역을 오갔던 열차는 대구, 대전, 군산 등지로 확대되었다. 도시 사람들에게 이 눈부신 세계로의 여행은 정신적 여유와 동일한 단어였고, 승부역은 그들이 가장 머물고 싶어 하는 곳이 되었다.

연말에는 해맞이 열차, 봄에는 산나물 열차, 여름에는 피서열차, 가을에는 단풍열차가 생겨났다. 관광열차가 정차하면서 플랫폼의 길이도 분천 쪽으로 30m, 철암 쪽으로 40m정도 확장되었고, 당시 역사 앞 강변에는 먹거리 장터가 열렸다. 주민들은 직접 쑨 메밀묵과 수확한 콩 등을 가져와 팔았다. 승객들은 감자전을 안주 삼아 옥수수로 만든 동동주를 마시기도 한다. 누군가는 근처 계곡으로 산책을 다녀오고, 누군가는 꽁꽁 언 낙동강에서 지치도록 추억을 쌓았다.


2013년, 승부역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내린다. 중부내륙순환열차(O-train)와 백두대간협곡열차(V-train)가 서면서 승부역은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봉화군은 이를 계기로 MTB 코스와 트레킹 루트도 개척했다.

역 뒤에 솟아 있는 투구봉으로 산책을 다녀오는 이들과 승부역에서 배바위재를 넘어 비동승강장까지 연결하는 6.5㎞의 ‘고요숲길’을 걷는 이도 많아졌다.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의 방문이 잦아지고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민박도 생겼다. 계곡과 산길을 달려 오롯이 승부역을 찾아오는 이도 늘었다.

승부역의 플랫폼에는 한때 인력이나 궤도 재료를 운반하던 보선 작업용 핸드카(Hand Car)가 있다. 영암선 개통 초기부터 열차 운행이 적은 선로에 사용되던 이 핸드카는 현재 운행하지 않고 있고,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영동선 승부역에 보존되어 있다. 이 핸드카가 힘겹게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간은 바로 어저께만 같은데 하나하나 생각해 보니 끝이 없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화차가 지나던 시절도, 들고 나는 이 없던 시절도, 누군가의 서러운 사랑도, 누군가의 고독한 한때도, 머묾도 떠남도, 한결같은 세평 하늘 아래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 기획: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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