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하다 .30 끝] 천년고찰 직지사

  • 임훈 박현주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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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1-27   |  발행일 2014-11-27 제11면   |  수정 2014-11-27
조선왕조 氣 꺾으려 한 일제, 뒷마당에 묻힌 ‘정종 태항아리’ 서삼릉으로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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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직지사는 신라의 두 번째 사찰로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후삼국시대 직지사의 능여 대사가 곤경에 처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우면서 전국적인 대찰로 성장했다. 직지사 대웅전 앞뜰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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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입구 전경. 조선말 국운의 쇠퇴와 함께 퇴락 일로에 있던 직지사는 1958년 녹원 스님이 직지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사세(寺勢)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372년, 소수림왕이 통치하던 고구려에서였다. 백제 역시 384년(침류왕 1)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 또한 527년(법흥왕 14)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했지만, 이미 반세기 이전인 눌지왕 때 불교가 전래되었다. 신라의 불교는 승려 아도화상에 의해 전파되었는데, 아도화상은 신라의 두 번째 사찰인 직지사를 창건한 인물이다.

아도화상의 불교 전래 이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의 직지사는 신라불교의 출발점이자, 김천을 상징하는 관광 아이콘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불교신자들은 물론 수많은 관광객이 매년 직지사에서 역사의 향취를 느끼기 위해 위해 김천을 찾고 있다. ‘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하다’ 30편은 김천의 천년고찰 직지사에 대한 이야기다.

아도화상이 창건한 신라불교의 뿌리
왕건 지원으로 고려초기 대찰로 성장
조선땐 왕실 태실 인연으로 탄압 피해

한국 불교 1600년 역사와 함께한 고찰
1960년대부터 지속적 신축·환경개선
김천 대표하는 관광 아이콘 자리잡아

◆능여 대사와 고려태조 왕건

김천지방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 신라 제19대 눌지왕(417~457년) 때로, 직지사의 창건연대(418년)와 일치한다. 직지사는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아도화상이 창건했는데, 이는 불교의 신라 전래와 같은 시기다. 직지사의 창건이 바로 신라 불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직지사라는 사찰명 또한 아도화상과 관련이 있다. 아도화상이 구미 선산에 도리사를 창건한 후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황악산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절을 지으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직지사’라는 사찰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 직역하면 ‘사람의 마음을 직관함으로써 부처의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뜻이 직지사 사찰명의 유래라는 의견도 있다.

이후 직지사는 능여 대사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싸울 때 공을 세워 하사받은 사답(寺沓)으로 능여암을 세우면서 새로운 중흥기를 맞는다. 능여 대사는 후삼국시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맞선 대구 공산전투에서 대패를 당한 왕건을 도왔다.

공산전투 당시 왕건의 정확한 탈출로는 알 수 없지만, 역사서와 당시의 교통로를 참고하면 김천과 문경을 거쳐 탈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왕건은 대구 지묘동에서 견훤에게 대패한 이후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은 후 탈출을 감행했다. 이후 대구 앞산에 몸을 숨긴 왕건은 김천에 도착한다. 당시 왕건의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신숭겸, 김락 등 왕건을 보좌하던 장수들과 1만명 넘는 군대는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공산을 포위한 견훤의 후백제군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며 왕건의 군대를 추격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왕건과 그의 남은 군대가 김천에 다다른 것이다. 직지사의 능여 대사는 고려군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훗날 견훤 휘하의 군사들에게 해를 당할 수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능여 대사와 직지사의 승려들은 왕건과 고려군을 숨겨주었고, 견훤의 군사들을 다른 곳으로 따돌렸다. 승려들은 짚신 2천켤레를 삼아 고려군에게 신겼고, 그들의 도주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직지사 승려들은 공산전투에서 대패한 고려군의 길잡이를 자처하며 송악(개성)까지 그들을 이끌어주었다.

훗날 삼한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왕건은 직지사와 능여 대사의 도움을 잊지 않았다. 왕건은 고려왕조를 튼튼히 하는 데 기여한 능여 대사와 직지사에 논밭 1천결을 하사했다. 당시 직지사가 하사받은 토지가 현재 김천시 다수동의 영남제일문에서부터 황악산 아래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니 엄청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능여 대사가 왕건에게 도움을 준 덕분에 신라말기 쇠퇴했던 직지사는 고려초 전국적인 대찰로 성장할 수 있었다. 능여 대사가 직지사를 새로 고쳐지을 때 ‘자(尺)’가 아닌 손으로 직접 땅을 쟀기 때문에 ‘직지사’가 되었다는 설은 이때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실의 전통을 품다

직지사는 숭유억불을 내세웠던 조선의 개국 후에도 옛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다. 1399년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 제2대 국왕인 정종의 태를 직지사 대웅전 뒤편 태봉에 묻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불교를 탄압한 왕조였지만 왕실과 인연을 맺은 사찰만큼은 예외였다. 원래 대웅전 북편의 봉우리 이름은 ‘북봉’이었는데 정종의 태를 묻으면서 ‘태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삼국시대부터 태를 따로 묻는 풍습이 이어져 왔지만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태를 묻는 것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행위로 변화한다. 이런 이유로 조정에서는 일반인이 태를 묻는 것을 금지하는 장태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천문, 지리 등의 사무를 보던 관청인 관상감에서는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지방관찰사들에게 명당을 찾아 올리라는 장계를 보냈다. 이후 관상감에서는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각 지역에 보내 실사한 다음 태실이나 묘터를 결정했다.

직지사 뒤편의 태봉 역시 명당이다. 태봉은 뱀의 머리에 대당하는 ‘사두혈(蛇頭穴)’의 길지로 알려져 있는데, 기운이 너무 거센 나머지 일반인이 묘를 쓰면 망한다고 한다. 하지만 왕가의 자손은 무덤이나 태실을 써도 무방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직지사는 왕실의 태실을 지키는 사찰로 정해지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시련을 겪는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사찰을 의도적으로 탄압했는데, 왕실의 태실이 있는 직지사 또한 핍박을 피할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정종태실의 태항아리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왕실의 태항아리들과 함께 1928년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이장된다. 이는 조선왕조의 기를 끊으려는 일제의 불순한 의도 때문이었다. 생명 원천의 상징이자 조선왕실의 전통이었던 태실을 파괴해 대한제국과 그 국민을 와해시키려 했던 것이다.

조선말기 국운의 쇠퇴와 함께 퇴락 일로에 있던 직지사는 1958년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당시 동국대 재단 이사장으로 재임중이던 녹원 스님이 직지사 주지로 부임하며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해 왔다. 63년부터는 직지사 성역화불사가 진행됐다. 이후 30여년에 걸쳐 만덕전·청풍료·설법전·남월료·극락전·천불선원 등 사찰의 전각들을 신축하거나 해체·보수 및 이전 개축했다.

사찰환경 개선도 이뤄졌다. 76년, 현재의 사찰 진입로인 구 마을 상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경사업을 진행했다. 이 밖에 외곽도로를 신설하고 담장과 석축 등을 세워 단장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를 거듭한다.
글=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사진=손동욱 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참고문헌=김천시사
공동기획: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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