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칠곡 역사·문화 스토리텔링 전국 공모전 대상작] 수로(水路) : 천년의 물길을 따라서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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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2-05   |  발행일 2014-12-05 제11면   |  수정 2014-12-05
이경민(일반 부문)

20141205

작품 브리핑

평생을 낙동강에서 살아온 소금뱃사공 ‘차돌’의 눈을 통해 한민족의 삶의 터전이자 생생한 역사의 목격자였던 낙동강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제목에 쓰인 ‘수로(水路)’는 두 가지 의미다. 첫째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낙동강이다. 낙동강에 위치한 수많은 나루 중에서도 칠곡 왜관나루는 과거 소금배들의 중간 기착지로 물자를 활발히 교역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왜국 사신들이 머물던 ‘왜관’이 설치되어 왜관무역이 융성하는 등 수운교통을 통한 무역의 꽃을 피웠었다. 주인공 차돌이 타고 온 소금배는 수운을 이용한 소금 길의 상징이었지만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된 후 열차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차돌은 철교가 완공되기 전 곧 나룻배의 역할이 줄어들 것을 직감하지만 그럼에도 수로는 끊기지 않고 이어질 것임을 믿는다.

둘째는 역사의 목격자로서의 낙동강이다. 호국의 현장인 낙동강은 임진왜란 등 외세의 침입뿐 아니라 6·25전쟁 때는 최후의 방어선이 되며 최대 격전지가 되기도 했다. 차돌은 낙동강의 과거와 자신이 노질을 하고 있는 현재를 대비시키며 수없이 교차된 세월을 되짚어 본다. 인간인 그로서는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시간들이다. 또한 그는 공사 중인 철교를 보며 머지않아 발생할 불길한 일을 예감한다. 그 일이란 6·25전쟁 중 유엔군에 의해 폭파될 철교다. 당시 철교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들로 인해 낙동강물은 핏빛이 되었을 터. 때마침 드리워진 노을빛은 피처럼 붉어 그는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곧 미래에 닥칠 일에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낙동강은 그 모든 슬픔과 아픔마저도 끌어안아 줄 것임을 확신하며 강물을 입에 털어넣는다. ‘물의 가르침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물을 마셔라’는 말처럼….


 

떠올린 것은 분명 강물인데
입 안에서는 소금기가 느껴졌다

소금을 낙동강 수로를 이용해
옮기는 일은 천형과도 같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의 핏줄에는
강물이 흐른다고 생각했다

천년을 흘러온 물길이었다
앞으로 천년을 더 흘러갈 강이었다

물을 한 움큼 손에 쥐었다
물빛이 맑다
그 어떤 피도 눈물도
이 물에 닿으면 절로 풀어질 것이다


강물을 한 줌 떠서 입 속으로 털어 넣는다.

한낮의 열기로 잔뜩 데워졌던 속이 씻겨 내려간다. 떠올린 것은 분명히 강물인데, 입 안에는 소금기가 느껴졌다. 혓바닥을 가만히 내밀어 손바닥 중앙을 꾸욱, 눌러본다. 그러자 비릿한 짠내가 금세 혀로 옮겨 앉았다. 입 안 가득 퍼진 짠내는 코까지 파고들었다. 크흠, 숨을 내쉬어 냄새를 흩트려본다.

그의 손에는 소금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뙤약볕에 논바닥 갈라지듯 쩍쩍 금이 간 손은 노상 밧줄을 잡아 배를 끌고 노를 쥐어 가는 통에 굳은살이 안 박인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손이 싫었던 적이 없다. 겨울이면 툭툭 터져 피고름이 나는 일이 부지기수였지만, 그 자신을 먹고 살게 해주는 고마운 손이었다. 이 손이 있기에 소금배도 몰 수 있고 일이 끝난 후 탁주 한 사발도 털어넣을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손을 오목하게 오므려 물을 담았다. 다시 한 줌 물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얼굴과 목을 닦아냈다. 찐득하게 붙어있던 땀을 닦아내자 잠시나마 숨통이 트인다. 한여름의 노질이란 잠깐 동안이라도 이처럼 얼굴에서 소금이 쏟아지게 만들었다.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젖은 목덜미와 얼굴이 말갛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 아주 잠시일 뿐이었지만 그조차도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순풍 덕에 배는 그리 힘 주어 노를 젓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갔다. 뽀얀 물안개가 배가 지나는 대로 이리저리 흩어졌다.

부산 구포에서 출발한 소금배들은 왜관에 들러 소금 가마니들을 내린다. 백색의 금. 소금을 가리켜 그리 부른 것은 때로 소금이 화폐의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물물교환의 대상으로 그만한 것이 없었다. 낙동강 상류로 오르기 전 소금배들이 들르는 왜관나루는 5일마다 장이 서는 큰 나루였다. 낙동강 수운의 중개 역할을 하는 나루이기에 그 규모는 낙동강변의 다른 나루들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장이 서기 시작한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강의 역사에 견줄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 뿌리박고 산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수로가 날라다 준 것들을 먹고 살았다.

하지만 소금을 낙동강 수로를 이용해 옮기는 일은 천형(天刑)과도 같았다. 물과 소금이란 상극의 관계, 아무리 조심해도 소금 가마니에 물이 닿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물을 먹어 묵직해진 가마니는 뱃전을 눌러 가는 길을 더디 만들곤 했다. 나루를 하나 건너는 동안 물에 녹아 없어진 소금의 양만 따져도 진즉에 낙동강은 바다가 되었을 터. 그는 강물이 짜지 않은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배에는 소금 외에도 남쪽에서 실어온 해산물들이 가득했다. 이 배가 다시 부산을 향해 갈 때에는 북쪽의 목재와 석탄, 농산물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다. 각 지방에서 나는 것을 서로 바꾸고 사들이며 부족한 것을 채워가는 무역의 장. 아마 이 수로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교역이었으리라. 육로를 이용했다면 운송을 하는 데 몇 곱절의 돈이 들었을지 모른다.

수로를 거슬러 오른 지 30년이 넘었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수로는 육로와는 달랐다.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방향은 어디인지에 따라 강물은 시시각각 달라졌다. 수로라는 건 육로처럼 고정되거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없어지기도 하는 그런 길이 아니었다. 고작 며칠에 한 번씩 배를 띄워도 그때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만들어 들이미는 것. 그러기에 잠시라도 맘을 놓았다가는 배가 뒤집히기 십상이다. 물은 자비가 없다. 그렇다고 야멸차지도 않다.

‘물은 그저 물이다.’

그의 귓가에 처음 배에 올라 아비에게 들었던 말이 맴돌았다. 설령 배가 뒤집혀 안에 든 것을 몽땅 잃는다 해도 물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아비 대신 노를 잡고 얼마 되지 않아 한 번 배가 뒤집힌 일이 있었다. 유독 사나운 바람이 불던 날, 안에 실은 짐의 무게를 생각지 않고 방향을 튼 것이 화근이었다. 때마침 분 역풍으로 배가 기울어지나 싶더니 뱃머리부터 물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는 살아 나왔지만 배가 품고 있던 것들은 살리지 못했다. 나루에 주저앉아 엉엉 울던 소년은 어느덧 소금에 절여진 듯 반백발이 성성했다.

“이거이거. 배가 닿기 어렵겠구만.’

갈수기(渴水期)에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특히 올해 여름은 장마가 늦었고,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면서 수심은 예년보다 낮아져 있었다.

모래톱에 얹혀진 배는 더 이상 물의 힘을 빌릴 수 없다. 노꾼들이 하나 둘 뛰어내렸다. 가장 먼저 나루로 달려간 이가 고디꾼들을 데려왔다. 고디꾼은 이처럼 강에 좌초된 배를 끌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수심이 깊어지고 낮아지는 일을 반복하는 낙동강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보게 되는 풍경이었다. 이렇듯 배가 모래톱에 박힐 때마다 배를 끌어내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사람의 힘으로 끄는 것. 많게는 수백 개의 소금 가마니가 들어앉은 배를 사람의 힘으로 끌기란 여간 고역인 게 아니었다. 하지만 배가 한번 모래톱에 꽂혔다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노상 있었던 일이라 새삼 고생스러운 작업으로 여겨지지 않을 뿐이지, 밧줄을 잡아끄는 힘마저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톱을 밟고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야만 배가 겨우 움직였다.

“어기영차.’

각자 배에 엮어 묶은 밧줄을 어깨에 걸친 뒤 힘차게 구령을 맞춰 앞으로 끌었다. 하나가 선창을 하면 나머지 고디꾼들이 소리를 받아 다시 외쳤다. 차돌은 뱃머리 쪽의 밧줄을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단히 박혀 꼼짝하지 않던 뱃머리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이내 뽑혀 나왔다. 뱃머리가 움직이니 나머지 선체도 모래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만 더 가면 되오.”

배가 다시 물길을 타자 고디꾼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머지않은 곳에 나루가 있었다. 까맣게 몰려든 사람들이 보였다. 객주며 거간꾼, 필요한 물건을 사러 나온 이들로 나루가 북적였다.

마침내 배가 나루에 닿았다. 오늘은 장날이다. 배가 닿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거간꾼들이 몰려들었다. 소금을 내리는 동안 어느새 흥정은 끝나버리곤 한다. 힘들게 끌고 온 고생을 생각하면 소금의 가격은 백색의 금이란 말이 무색하게 낮은 편이었다. 무거운 만큼 값이 나가는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금을 싣는 일을 마다하는 사공들은 없었다. 소금은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도 귀한 것을 찾으라면 바로 이 소금을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봄에는 각종 장을 담그느라, 가을에는 김장을 하느라 소금의 수요가 몇 배로 더 많아졌다. 만약 부산에서부터 소금을 싣고 올라오지 않는다면 낙동강 상류 쪽에 사는 사람들은 장을 담그고 김장을 하는 모든 일에 제약이 걸릴 것이다. 때로 소금이 아니라 목숨을 나르는 것과 같다던 아비의 가르침이 차돌의 귀에는 아직도 쟁쟁했다.

선원들은 짐을 내리고 난 후엔 제각기 흩어져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는 주막에 자리잡고 앉아 허기진 배를 채우고 탁주 한 사발을 목구멍에 부어 넣었다.

들어온 배들에서 내려진 물건들로 나루는 활기를 띠었다. 즉각 해산물이 거래되는 장이 서고 흥정이 붙는다.

과거 이곳은 왜인들이 드나들며 무역을 하던 곳이었다. 사신들이 머물며 먹고 자고 하던 유숙소도 있었다. 그래서 왜관(倭館)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 지금까지 쓰이는 것이다. 사신을 따라오거나 상단을 꾸려온 왜인들이 자기네 나라에서 가져온 물건을 팔고, 이곳에서 산 물건들을 다시 수로를 타고 올라가 그곳에서 파는 중개무역도 했다.

하여간에 왜놈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뜯어먹는 일이라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지. 차돌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걸린다. 그가 나고 자란 칠곡은 태생이 사방팔방 각지에서 몰려들 수밖에 없는 곳이다. 부산항으로 들어온 물자들은 경성으로 가려면 필연적으로 이 수로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이 나라에서 난 것들을 일본으로 가져갈 때도 이 수로를 타고 가야만 했다. 사방천지 뻗은 물길은 물자의 이동을 쉽게 했으나 동시에 침략도 쉽게 했다. 먼 옛날 왜란(倭亂)때는 왜군들이 이 수로를 타고 올라와 온 강토를 헤집어 놓았다. 몇백 년이 지난 지금에는 왜(倭)에서 일본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같은 핏줄인 그들이 이 땅에 활개치며 호시탐탐 나라를 노리고 있었다. 자신같은 무지렁이가 나라 걱정을 한들 무엇이 달라지나. 그는 헛헛한 마음에 다시 탁주를 부어넣다가 나루와 멀지 않은 곳에 걸린, 이제 반쯤 지어진 철교(鐵橋)에 시선이 멈추었다.

“기차가 다니게 된다는군.”

같은 배에 타 노를 저어 온 황씨는 탁주 한 사발을 들이켠 뒤 거나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사는 게 나아지려나.”

“다 지 놈들 배 불리려고 놓는 다리인데 그럴 리가 있나.”

옳은 소리였다. 철도가 놓이면 좀 더 빠르게 조선의 물자를 약탈해 갈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이 쌀이든 소금이든, 혹은 그 어떤 것이라도 그들은 빼앗아 가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뱃놈 짓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쿨룩, 기침이 뒤따랐다.

“배가 멈출 일은 없지.”

그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철교 공사가 시작되면서 나루터 사람들은 매일 아침 조금씩 연장되어 가는 다리를 지켜보며 하루를 시작하고는 했다. 나루터에서 서서 보면 떠오르는 해가 완연히 얼굴을 비춰야만 하는데, 어느 날부턴가 철교에 가리어진 뒤에야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다리가 완벽히 이어지고 난 다음에는 쉭쉭 연기를 내뿜으며 화차가 다니는 풍경을 보게 되겠지. 그런 날이 이렇듯 가까이 와 있을 줄이야.

그러나 이 배만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의 아비, 그리고 그의 아비의 아비….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자신의 핏줄에는 강물이 흐른다고 생각했다. 수로가 끊기는 것은 곧 온몸의 핏줄이 잘리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더 이상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도 이 강과 함께 일생을 보냈는데 말이지.”

“고작 30년인데.”

“그 정도면 평생이지.”

황씨가 구시렁거렸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천 년을 흘러온 강물 앞에서 일생을 들먹이기에는 자기 자신이 너무도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문득 지난 30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이 강과 떨어져 살아본 적은 없다.

이 강물은 천 년을 넘게 흘러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로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다. 그는 굳게 믿었다. 배가 아니라면 다른 무언가라도 다니게 되겠지. 기차가 다닌들, 사방팔방 육로가 뚫리든 어떻든, 이 수로가 막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수로는 곧 그 나라의 핏줄이자 젖줄이다. 그것이 막히면 그 나라 역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모름지기 강에는 배가 다녀야 한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흐르지 않는 강이 의미가 없듯, 물 위에 다니지 않는 배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이 고목 같은 손도 부지런히 놀려 배를 띄우지 않는다면 그냥 썩어 문드러지고 말리라.

언젠가는 이 소금길도 끊길지 모른다. 철교가 더욱 완전한 모양새를 잡아갈수록 그 느낌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의 대에서는 아니더라도 조만간 사라질지 모른다.

나라의 운명은 구멍 뚫린 배에 실린 소금가마니만큼이나 위태로웠다. 아무리 노만 젓는 일자무식이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며가며 듣는 이야기는 심상치 않았다. 조만간 일본놈들에게 나라가 넘어갈 것이라는 이야기는 뜬소문이 아니라 기정사실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술사발을 비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루는 장을 오가는 사람들로 여전히 분주했다. 그는 자신이 타고온 배가 정박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찰박찰박, 물을 차며 강 언저리에 섰다. 물은 무릎 근처에서 찰랑거렸다.

천 년을 흘러온 물길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천 년을 더 흘러갈 강이었다. 자신 같은 세인들은 고작 몇십 년을 머물다 갈 뿐이었다. 아마 이 강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흘렸던 땀과 피를 모두 품어 안은 채 저렇게 고고히 흘러가는 것이리라. 아마 그런 날들이 숱하게 지나갈 것이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유학산(遊鶴山)이 보였다. 그 사이로 해가 조금씩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핏빛 노을이 진다.

문득 강물에 번진 노을이 선혈(鮮血)로 보여 그는 재빨리 눈을 비볐다. 헛것을 보았군, 하며 안심했지만 이내 선뜩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이 강에 앞으로 얼마간의 피가 흩뿌려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침략을 받고, 그 침략을 막아내는 것이 이 강의 숙명이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 수로는 묵묵히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나르며 변함없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철길이 깔린다 한들 수로가 방향을 바꾸겠는가. 물은 멈추지 않는다. 강물은 묵묵히 흐른다. 그 유구한 물줄기는 우리 역사의 아픔도, 슬픔도 모두 껴안은 채 앞으로도 계속 흘러갈 것이다.

그는 갈라진 손을 강에 넣어 물을 한 움큼 손에 쥐었다. 물빛이 맑다. 그 어떤 피도 눈물도, 이 물에 닿으면 절로 풀어질 것이다. 그는 손에 고인 물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물 맛 좋구나.”

천 년을 흘러오고 천 년을 흘러갈 강물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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